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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또비됴 Apr 28. 2023

스페인에서 학폭 하면 이렇게 돼,
연진아!

영화 <피기> 리뷰

우리나라에만 연진이가 있는 건 아니다. 저 멀리 스페인에서도 연진이가 존재한다. 남들보다 과체중인 동급생을 타깃으로 ‘돼지’라 놀리고, SNS를 통해 동급생뿐만 아니라 가족까지 놀림거리로 만든다. 우리나라의 연진이가 그랬듯 스페인의 연진이도 천벌을 받는다. 하지만 방식은 다르다. <더 글로리>에서는 아주 계획적이며 올곧은 신념으로 정진하는 복수극이지만, <피기>는 정반대로 계획적이지도 않고, 심리적 갈등이 첨예하며 벌어지는 이상한(?) 복수극이다. 


영화 <피기> 스틸 / 해피송 제공


스페인의 한 마을. 남들보다 과체중이라 놀림을 받는 게 생활화된 정육점 집 딸 사라(라우라 갈란)는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하대하는 이들과 마주하기 싫어서다. 더운 여름이라 집 근처 수영장을 가고 싶어도 사람들이 없는 시간대를 골라 그것도 몰래 가는 것도 같은 이유. 홀로 수영하러 간 어느 날, 자신을 놀리는 3인방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옷이 있는 가방까지 빼앗긴다. 어쩔 수 없이 땡볕에 속옷만 입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라는 한 의문의 남자(리차드 홈즈)가 누군가를 납치해 자신의 차에 태우는 걸 목격한다. 알고 보니 자신을 괴롭힌 3인방이 납치된 것. 그 순간 사라는 잠시 고민한다. 신고할지 아니면 모른 척할 것인지. 


영화 <피기> 스틸 / 해피송 제공


<피기>는 <더 글로리>가 수면 위로 끌어 올린 학폭이란 자장 안에 그대로 편승한 영화는 아니다. 명확한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하고, 사라를 괴롭히는 3인방이 벌을 받지만 그 과정에서 얻는 복수의 카타르시스는 크지 않다. 대신 학폭 3인방이 납치를 목격하고 신고하지 않은 이후 벌어지는 그녀의 심리 변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사라의 곁에 천사와 악마가 공존하듯 통쾌함과 죄책감에 사로잡힌 그녀는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수 없는 상황에 놓인다. 편안해야 할 집에서도 쉬지 못하고, 엄마의 폭압적인 잔소리와 눈치를 봐야 하는 것도 또 다른 압박감을 준다. 카를로타 페레다 감독은 1.33:1 화면 비율을 선택해 관객이 사라의 시련과 심리 변화에 집중하도록 환경을 조성한다. 마치 그녀가 꾸는 악몽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영화 <피기> 스틸 / 해피송 제공


흥미로운 건 납치를 행한 연쇄살인범이다. 압박감에 사로잡혀 있는 사라가 유일하게 안식을 얻는 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남자다. 그녀가 수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걸 옆에서 지켜본 것도 속옷 차림의 그녀에게 타월을 준 것도, 납치 현장에서 범인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의 도피를 도와준 것도 그이기 때문이다. 보는 이에 따라 다르게 보이지만 이 남자는 마치 사라 내면에 웅크려져 있는 공격적인 자아가 튀어나온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세상에서 사라를 가장 잘 이해하고 살인을 불사하고서라도 도와주려 하는 모습은 이를 잘 보여준다. 후반부 납치된 이들을 사이에 놓고 돼지 도축장에서 벌어지는 이들의 피 튀기는 추격전과 대결 장면은 사라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선과 악의 대결로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피기>는 학폭이라는 시의성 소재를 가져와 흥미로운 설정으로 그 문을 활짝 열었지만, 그 패기어린 시작과 상반되게 평이한 마무리로 매듭짓는다. 미성년자에 남을 미워하거나 싫은 소리를 하지 못하는 소녀라는 설정에 복수보단 용서를 택한 결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좀 더 당차고 강단 있는 사라의 모습이 더 보고 싶었던 게 사실. 극 분위기상 용서보단 주체적인 결정과 책임을 지며 성장하는 마무리가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은 남는다. 


추신: 제38회 선댄스영화제에서 호평받은 <피기>는 카를로타 페레다 감독의 동명 단편영화가 원작이다. 201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되었던 이 단편에서는 납치를 목격한 후, 헤드폰을 쓰는 사라의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끝을 맺는데, 그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다. 원작은 300개 이상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됐고, 고야상과 호세마리아포르크어워드를 비롯한 90개 이상의 최고단편영화상을 휩쓸었다고. 원작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온 힘을 다해 사라를 연기한 이는 라우라 갈란이다. 그 노력에 힘입어 제37회 고야상에서 신인여자배우상을 받았다.




한줄평: 흥미로운 설정을 먹어 치우는 ‘용서’라는 달콤함! 

평점: 2.5 /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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