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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또비됴 Sep 02. 2023

이름을 지우면 무엇이 남나요?

영화 <한 남자> 리뷰

(이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죽은 남편을 ‘X’라 부르겠습니다” <한 남자>는 의문투성이인 한 남자의 행적을 뒤쫓는 미스터리 드라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다. X라는 남자의 숨겨진 이야기이자 진실을 쫓는 또 다른 남자의 이야기, 이 상황을 마주하는 또 다른 이들의 이야기다. 이야기 안에 또 다른 이야기가 숨겨진 영화의 또 다른 특징은 시간이 지날수록 인물의 이름이 흐릿해진다는 점이다. 마치 이름을 지우면 우리에게 남는 건 무엇인지 확인시켜 주는 듯 말이다. 


교외 작은 마을에서 문구점을 운영하는 리에(안도 사쿠라). 자식의 죽음과 이혼이란 풍파를 겪고 고향으로 내려온 그녀에게 어느 날, 벌목이 직업인 다이스케(쿠보타 마사타카)라는 과묵한 남자가 문구점 문을 연다. 유명한 료칸 둘째 아들로 가족과 연을 끊고 이곳을 내려왔다는 마을 사람들의 소문만 있을 뿐, 모든 게 비밀에 쌓인 이 남자. 시간이 지날수록 리에는 다이스케와 가까워지고, 서로가 지닌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며 부부가 된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다이스케는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1년 후, 리에의 집에 방문한 다이스케의 형은 불단에 놓인 사진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이건 다이스케가 아닌데요.” 이후 변호사 키도(츠마부키 사토시)는 리에에게 이 일에 대한 조사를 의뢰받고 다이스케라 불린 이 남자의 정체를 찾아 나선다. 



| 단서는 포스터와 첫 장면! 

▲ 영화 <한 남자> 포스터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한 남자>의 외피는 미스터리 장르를 표방한다. 연출을 맡은 이시카와 케이 감독은 전작 <우행록 어리석은 자의 기록>와 마찬가지로 중요 사건을 추적하는 인물을 통해(우연의 일치일지 몰라도 전작, 그리고 이번 영화에도 츠마부키 사토시가 그 인물을 맡는다.)를 통해 다이스케라는 거짓 이름의 소유자이자, 약 3년 동안 리에의 남편으로 살아간 X라는 남자의 정체를 파헤친다. 


감독은 영화를 보기 전 친절하게도 관객에게 단서를 던진다. 포스터와 첫 장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이 영화의 구조와 X라는 남자의 비밀을 어느 정도 간파할 수 있다. 포스터를 보면 츠마부키 사토시의 얼굴이, 그 뒤에 묘한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한 남자의 뒷모습 그림. 바로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1937)이다. 자세히 보면 소름이 돋는 이 작품(거울에 비친 사람의 모습이 얼굴이 아닌 뒷모습이라는 점)을 등지고 어디론가 응시하는 키도의 모습도 보인다. 


▲ 영화 <한 남자> 스틸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영화는 포스터를 통해 이야기 안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감춰져 있는 액자식 구성으로 진행될 것이라는 걸 알려준다. 여기에 X라는 존재를 투영하듯 뒷모습만 보이는 의문의 그림 속 남자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건 키도다. 이 그림을 뒤로 한 채 어디론가 응시하는 그의 모습은, 그림 속 남자(X 남자)를 찾는 듯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그림 속 남자와 동일시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서 있는 위치와 검은색 옷, 정갈한 헤어스타일 모두 그림 속 남자와 똑같다. 이는 X와 키도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걸 은연중에 알려주는 포인트다. 


이에 걸맞게 첫 장면 또한 이 그림이 걸려 있는 한 술집을 배경으로 한다.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누군가 이 그림을 배경으로 자리에 앉는데, 그 후 리에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녀의 이야기가 끝난 후 마지막 장면은 첫 장면과 이어진다. 감독은 결국 그림을 배경으로 앉은 사람이 누군가에게 리에 이야기를 전한다는 인식을 심어주며 액자식 구성을 확고히 가져간다.



| 이름을 지우면 내가 보이나요?

▲ 영화 <한 남자> 스틸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저는 이 영화를 미스터리라 보지 않고,
정말 인간을 그리고 있는 드라마라고 생각해요.


안도 사쿠라의 말처럼 <한 남자>는 내피는 인간을 탐구하는 드라마로 채워진다. 그 탐구 방법은 ‘이름’에 있다. X라는 남자와 키도는 자신의 이름(또는 뿌리)가 부여한 정체성의 무게감에 시달리는 인물이다. 


X라는 남자가 다이스케라는 거짓 이름을 갖게 된 건 살인자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유년 시절 사람을 죽이고, 피 묻은 돈을 건네며 웃는 아비의 모습이 트라우마가 된 X는 이름으로 내려받은 살인자의 흔적에 고통을 받는 남자였다. 어른이 될수록 아버지와 얼굴이 닮아가는 게 더 두려웠던 그는 권투를 시작한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나(또는 아버지)를 때리기 위해서. 그가 링에 올라가는 건 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맞기 위해서다. 


권투로도 가벼워지지 않는 고통의 무게감은 결국 이름을 바꿔 살고, 그리고 리에 가족을 만나면서 덜어낸다. 그가 리에의 아들에게 유독 잘해주는 이유는 자신의 아버지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려는 의지 때문이다. 이는 그의 직업에서도 볼 수 있다. 벌목일을 하는 그는 자기 손으로 나무를 자르는 일을 한다. 이 모습은 자신의 뿌리를 잘라내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과 행동이 담겨 있다고 보여진다. 물론, 그 일을 하다 결국 자른 나무에 죽임을 당하지만 말이다. 


▲ 영화 <한 남자> 스틸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키도 또한 자기 뿌리 때문에 매번 딜레마를 겪는 인물이다. 극중 재일한국인 3세로 나오는 그는 일본인들에게 차별과 무시를 당한다. 장인어른은 대 놓고 재일한국인에게까지 사회보장제도가 미치는 걸 못마땅해 한다. 뉴스에는 재일한국인을 몰아내자는 우익들의 시위가 방송된다. 더불어 X의 정체를 찾기 위해 감옥에 찾아가 만난 죄수 오미우라(에모토 아키라)는 곧바로 그에게 ‘조센징’이라는 단어를 내뱉는다. 


키도는 애써 자신의 뿌리에 대한 일본 사회의 부정적 시선을 인식하지 않는 척하지만, X의 정체를 밝히면서 자신처럼 바꿀 수 없는 이름과 뿌리 때문에 힘겨워하는 인물이 또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심지어 일본인인데도. 결국 X와 키도는 방법은 다르지만,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뿌리를 잘라낸 후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지 고민하고 행동하려 했던 같은 남자로 보인다. 영화의 포스터처럼 말이다. 


▲ 영화 <한 남자> 스틸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반대로 리에는 확실한 이름이 부재하며 얻는 공허함과 불안함에 떠는 인물이다. 일본의 경우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르는 제도인데, 리에는 이혼 후 이름을 통한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졌다. 이는 문구점에서 펜을 정리하는 리에의 첫 등장에서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이 없어진 후, 똑같이 생긴 펜처럼 자신의 정체성이 불분명해졌다는 걸 깨달은 후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인간에게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회의 일원으로서 꼭 필요한 부분이라는 걸 깨닫게 한다.  


리에는 다이스케와의 결혼 후 정체성이 확립된 듯했지만, 그가 죽은 후, 그리고 그 이름이 가짜라는 것을 알게 된 후 이전처럼 자신의 모호해지고, 채울 수 없는 공허함이 커진다. 이는 그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X의 전사를 알게 된 이들은 다이스케라는 이름을 가진 이가 아닌 그들의 기억 속에 행복으로 남겨진 남편과 아버지로서 X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한다. 참고로 실제 다이스케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에피소드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 원작에 기대지 않은 깔끔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

▲ 영화 <한 남자> 메이킹 영상 캡처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한 남자>는 히라노 게이치로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분인(分人)주의를 설파한다. 분인주의란 즉, 한 사람에게 다양한 얼굴 혹은 자아가 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고, 이 자아의 총합이 한 인간을 구성한다는 얘기다. 


감독은 이 개념은 물론, 원작에 온전히 기대기보다는 스토리와 개념을 녹이지만, 원작을 만나지 않은 관객들에게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연출한다. 무엇보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밀도있게 그리고 일본 사회 이면에 담긴 주요 이슈까지 끌어안은 점은 눈에 띈다. 특히 재일한국인, 이혼녀, 범죄자, ‘죠하츠’(蒸發) 불리는 자발적 실종 등 사회적 소재들은 각 인물의 전사를 소개하는데 사용되는 동시에 일본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조심스럽게 드러낸다. 


▲ 영화 <한 남자> 스틸 /  트윈플러스파트너스(주) 제공


분인주의 개념은 배우들의 연기에서 잘 나타난다. 츠마부키 사토시는 영화의 중심 축인 분인주의를 연기로 표현하는데, 상황마다 미세하게 변하는 키토의 표정, 성격, 말투 등을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간은 이미지로 여러 가지를 만들어 가지만, 그걸 깼을 때 자신에게 무엇이 남는지를 느껴주시면, 아주 기쁠 것 같습니다.”라는 츠마부키 사토시의 말처럼 분인주의를 몸소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다. 죄수 오미우라와의 대면 장면, X와 관련된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마지막 장면의 연기는 눈여겨보시길.(<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츠네오의 이미지는 지워도 무방하다.)


안도 사쿠라의 사실적인 눈물 연기도 흡입력을 자아낸다. <어느 가족>의 심문 장면에 못지않은 그녀의 눈물 연기는 진짜 같다. 겉으로 눈물은 흘리지만 어떻게든 슬픔을 머금으려 애쓰는 표정연기는 진짜 같다. X 역을 맡은 쿠보타 마시타가는 불안하면서도 어느 순간 순수한 소년의 말간 눈빛을 선사하는 등 냉온탕을 넘나드는 연기로 이목을 집중시킨다. 왜 그가 츠마부키 사토시, 안도 사쿠라와 함께 일본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상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한 남자>는 영화가 끝난 후, 다시 시작하는 작품이다. 마치 키도 등 주요 인물들이 고민했던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관객에게 전이되는 느낌이다. 나의 이름을 지웠을 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나 또한 르네 마그리트의 ‘금지된 재현’(1937)을 유심히 바라봐야 할 것 같다. 



평점: 3.5 / 5.0

한줄평: 이름을 지우면 무엇이 남나요?



(이 리뷰는 ‘헤드라잇’에 쓴 글을 재편집한 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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