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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Jun 27. 2023

숨겨진 삶

실비 제르맹(2019)

늦은 밤, 한 여자가 차가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종종걸음을 친다. 산타 클로스 복장을 한 한 남자가 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그 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본다. 한편의 스릴러 영화의 오프닝 같은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혼자서 상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주인공 사빈은 어느 날 피에르라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피에르는 사빈의 충실한 조력자이자 네 아이, 특히 앙리와 마리에게 가족 이상의 존재가 된다. 하지만 평소에 이를 못마땅하게 지켜본 할아버지 샤를람은 어느 날 피에르에게 씻을 수 없는 모욕을 주게 되고 피에르는 그길로 사빈의 가족 곁을 쫓기듯 떠나간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데 뭉쳐있던 여러 인생이 조금씩 갈라져 그 간격이 점점 벌어져가던 어느 날, 행방이 묘연했던 피에르가 다시 등장하게 되는데... 


    프랑스 작가 실비 제르맹이 2008년 발표한 작품 “숨겨진 삶”은 사빈과 피에르를 중심으로 등장인물들의 삶을 차례로 조명하고 이면에 숨겨져 있던 모습을 조심스레 들춰낸다. 우선 이야기의 전개를 주로 이끌어가는 것은 사빈처럼 보인다. 사빈의 남편 조르주는 과속을 하다가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받아 죽었다. 가족들조차 아무도 모르는 과속의 원인은 복권 때문이었다. 당첨된 복권표를 어디에 두었는지 찾다가 사빈과 언성을 높이게 되었고 차에 올라타 속력과 분노의 경계선을 스스로 허물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 속에 딸 마리도 개입이 되어 있다. 아빠 몰래 차 뒷좌석에 타 있던 마리가 결국 멀미를 참지 못하고 본인의 존재를 드러냈을 때 화들짝 놀란 조르주가 순간 집중력을 잃고 플라타너스 나무를 들이받았기 때문이다. 결국 마리 또한 남들에게 밝히지 못한 삶의 숨겨진 그림자가 있는 셈이다. 


    이후 사빈은 가족 곁을 떠나 왕고모 에디트가 남긴 개 한 마리와 바닷가 마을에 정착한다. 큰 비중은 아니지만, 소설은 에디트(꽃다발의 여인)의 삶도 조명한다. 젊었던 시절, 자신의 조카 조르주에게 충동적인 이성적 감정을 느껴 스스로 비밀이라고 생각했던 한 여름밤의 꿈이 지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이것이 자신만이 아는 비밀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되고, 에디트는 뒤늦게 삶의 열정을 느끼면서 회오리바람 속에 몸을 내던진다. 네 아이 중 피에르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이는 마리와 앙리다. 마리는 어릴 적 교통사고로 한쪽 발을 잃고 뒤틀린 균형인 상태로 성장한다. 그러한 뒤틀린 균형 상태는 결핍과, 지나칠 정도로 성숙하고 또 한편으로 기괴한 상상력으로 채워진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는 피에르가 선물로 준 순금 발찌를 바닥에 내동댕이친다. 뿌리 깊었던 결핍이 피에르의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곧바로 피에르의 냉혹하고도 차분한, 얼음처럼 초연한 시선이 마리를 일순간 사로잡게 되고, 마리는 ‘몸이 갈라져 자신의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수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분노에서 놓여났으며, 내면에 기은 정적이 자리잡는다.’ 이후 마리는 피에르가 남긴 젤리의 흔적을 발자취 삼아 성공한 동화작가의 길을 걷는다. 반면 앙리에게는 마리만큼 눈에 드러나는 사건을 겪지 않는다. 다른 등장인물과 달리 뚜렷한 비밀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피에르가 사라진 뒤, 그의 아파트를 찾아가 침대 건너편 벽을 가득채운 작열하는 노란 태양빛 그림을 보고선, ‘황홀감에 휩싸이며 엄숙하고도 경쾌한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리곤 매일 일어나면서 이 그림을 보았을 피에르를 상상하며 그에 대한 일말의 오해를 거두어버린다. 그리고 이후 앙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증언하고 드러내 보이는 르포타주 작가가 된다. 


    소설 도입부에서 산타클로스 복장으로 등장하고 중반에는 반쯤 벗은 스키복으로 퇴장한 피에르의 삶의 무게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스스로 ‘완성을 지향하지 않는’ 피에르는 자기 가족, 출신 배경 등 아무것도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동전 던지기라는 순전한 우연으로 사빈의 일자리 제안에 응하기로 한 피에르는 이후 그동안 이어져 왔던 무기력한 방랑 생활을 접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통와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며 스스로를 가문의 족장으로 여기는 샤를람에게 피에르는 초대받지 못한 이방인일 뿐이었다. 어느 여름 날 저녁 가족 공연이 끝나고 옷을 갈아입으러 집에 들어갔을 때, 샤를람은 피에르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작가는 이 장면을 ‘얼음 화살촉 같은 찌릿한 전율이 두개골 밑에서 솟구쳐 발꿈치까지 곤두박질친다’고 표현하고 있다. 때마침 나타나 이를 우스꽝스럽게 여긴 사빈과 마리에게 웃지 말라고 소리친 피에르는 그길로 집을 나가 사라진다. 


    그리고 나서야 작가는 피에르의 숨겨진 삶을 천천히 드러낸다. 동성애적 기질이 있던 피에르의 아버지, 전쟁 중 독일군 남자와 사랑에 빠져 여동생 젤리를 가진 어머니, 전쟁 이후 이에 대한 마을 주민들의 가혹한 보복. 그리고 잇따른 부모님의 죽음과 스스로 허공 속에 몸을 날린 젤리의 마지막까지. 피에르는 이처럼 본인의 비극적인 삶을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면서 심호흡하듯히 회상한다. 작가는 이를 다음과 같이 그려낸다. ‘그는 공空 속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느릿느릿 흐르는 시간은 매 방울이 추억과 어두운 그늘, 엉클어진 섬광과 속삼임으로 꽉 차 있다...시간의 물방울들이 즙 가득한 포도알처럼 익어 떨어져 내린다. 바위투성이 심연으로 가로지르는 기나긴 낙하다. 무겁고도 가벼우며, 눈에 띄지 않아도 찬란히 빛나고, 소리가 없지만 낭랑한, 이상한 낙하.’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해방에 이른 피에르는 다시 사빈 가족의 집으로 찾아간다. 하지만 이제는 샤를람 가문의 새로운 안주인이 된 루마가 피에르의 ‘햇빛 가득한 빗물의 색, 바람의 색’을 띈 눈빛을 보고 분노와 공포가 뒤섞인 듯한 반응을 보이며 피에르를 내쫓는다. 그렇게 집안으로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한 피에르는 발길을 되돌리는데, 이때 소설 배경은 작렬하는 눈부신 하늘과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를 교차시키며 막을 내린다.


    예기치 못한 지점에서 갑자기 화면이 어두워지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때의 당혹스러움. 소위 말하는 발단, 전개, 절정, 결말의 구조에 익숙한 우리의 인식구조를 비웃기라고 하듯이 작가는 이후의 전개를 독자의 상상력에 맡긴다. 과연 피에르는 진정한 해방을 얻었는가? 숨겨진 삶이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숨겨진 것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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