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시리즈 중 <아무튼, 메모>를 소개받고 한동안 사무실 책상 한 쪽에 방치해 두었다. 대개의 시리즈물들이 그렇듯이 이 책 또한 깊이 없는 얄팍한 지식의 부산물일 것이란 근거 없는 확신 때문에.
그러다 우연히 꺼내 들어 몇 페이지를 읽게 되었고(아니 흡입했고) 나는 이내 깨달았다. 아, 이건 보통 내공이 아니구나. '마술적 리얼리즘'의 세계를 구축하고 싶어 하는 저자 정혜윤은 너무나도 놀랍고 흥미진진한 마술사구나.
이 책은 시중에 흔하게 널려 있는 메모하는 법 따위의 자기계발서가 아니다. 이 책은, 이 작은 책 속에는 정혜윤이란 한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말하자면 이 책은 메모라는 단어로 포장한 저자의 인생 이야기인 것이다.
특히 이 책의 가장 마지막 이야기. 조선인 전범 이학래가 평생 셔츠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는 사형당한 조선인 포로 23명 명단이 적힌 메모. 책의 제목이 왜 아무튼, 메모인지 깨닫게 하는 전언이다.
메모는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 현재를 살고 나아가 미래를 미리 살아내기 위해서 쓴다, 것을 배웠다.
메모에는 나만의 작은 우주가 담겨 있다.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무한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