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조차 비추지 않는 늦은 저녁. 스산한 기운이 뿌연 안개 속에 깊이 녹아들어 있다.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당신은 사방이 좀비 떼들로 둘러싸인 작은 건물 안에 고립되어 있다. 마치 녀석들은 당신이 안에 있는 것을 알고 있는 듯하다. 소름끼치는 신음을 토해내며 느린 걸음으로 시선을 고정시킨 채 건물 주위를 뱅뱅 돌고 있다. 다행히 콘크리트로 지어진 건물은 안전해 보이지만 먹을 식량과 마실 물은 얼마 남지 않았다. 계속 갇혀 있기만 한다면 1주일 이상을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용감하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면 1시간, 아니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몸이 산산조각 찢겨나갈 것이 확실하다. 어쨌든 살아서 도망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희박하다. 선택의 순간은 점점 다가온다. 이제 미룰 수 없다.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어느 새부터였을까. 사람들이 좀비에 열광하고 있다. 수요를 따라가서일까. 좀비 영화와 드라마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좀비물이 많아져도 지루하지 않다. 왜? 똑같은 것을 견디지 못하는 현대 대중들의 변덕스러운 소비성향 때문일까? 한때 드라큘라가 아이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적이 있다. 아 물론 드라큘라는 영국 작가 스토커의 소설 속 주인공 이름이며 이후 드라큘라는 흡혈귀라는 ‘종’으로 포함되어 대중화되었다. 아무튼 어느 순간부터 흡혈귀는 좀비에게 공포의 왕좌를 내준 지 오래되었으며 더 이상 흥행몰이를 하지 못한다. 왜? 스토커 이후의 드라큘라는 변신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날카로운 송곳니와 타인의 피를 갈망하는 존재. 마늘과 십자가를 무서워하며 또한 대부분 백인 남성이라는 틀에 박힌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대부분의 드라큘라는 매혹적인 미남이다. “조 블랙의 사랑”의 브래드 피트나 “드라큘라 : 전설의 시작”의 루크 에반스를 보라) 즉 시대가 변해 어릴 적 공포의 대상이었던 드라큘라가 나이가 들어서 봐도 여전히 어릴 적 그 드라큘라였던 셈이다. 자칫 잘못하면 친근한 마음마저 들 수 있다.
하지만 좀비는 어떠한가? 변화무쌍하다. 그래서 재밌다. 내가 좀비물을 좋아하는 첫 번째 이유다. 속도와 지능, 좀비화 되는 원인과 과정, 지닌 약점이 다양하며 심지어 “웜 바디스”처럼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좀비도 있다. 가장 전투력이 약한 좀비를 꼽자면 “워킹데드”의 좀비들이 우선순위를 다툰다. 10년 넘게 장기 방영중인 워킹데드 세계의 좀비들은 느리다. 뛰지 못하기 때문에 적당히 거리만 두기만 한다면 안전하다. 또한 지능도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에 웬만한 장애물을 좀처럼 피해가는 법이 없다. 끊임없이 찔리고 베이고, 떨어진다. 하지만 그들의 가장 큰 장점은 군집이다. 떼를 지어다니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이들과 전투를 시작한다면 싸움 도중 스스로 체력이 떨어져 죽을 확률이 크다.
반면에 영화 “월드 Z”의 좀비들은 강력하다. 빠르다. 영화 속 한 장면을 예로 들어보자. 이미 세상은 좀비떼로 가득차 있다. 반면, 이스라엘은 확실한 초기대응으로 몇 안되는 안전지역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쌓여 있어 안전하다고 여긴 탓에, 좀비물에서 항상 주문처럼 외우며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만다. 방심이다. 갑자기 흥에 겨운(도대체 왜?)수 많은 사람들이 춤을 추기 시작하고 이윽고 한 여성이 스피커에 연결된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결국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 성벽 바깥에 있던 수십 만 무리의 좀비들이 서로를 발판으로 삼아 성벽을 넘어 침투하는데 성공하고,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산 자를 제물로 삼는 죽은 자들의 피의 축제가 벌어진다. 물론 이들은 바이러스에 취약하다는 약점이 있다. 영화는 이 점을 절묘하게 포착해 극적으로 결말을 맺는데 성공하고...
그런가하면 좀비는 시공간을 초월한다. 한반도에 상륙한 좀비들은 조선(“킹덤”)과 대한민국(“부산행”, “살아있다”)을 넘나들며 종횡무진 활약한다. 대부분 전투력도 좋다. 빠르고, 무리를 지어 세를 키울 줄 알며, 치명적인 약점도 별로 없다. 이 정도면 흠잡을데가 별로 없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 측면에선 할말이 많다. 부산행이 쏘아올린 K-좀비의 서막은 장대했으나 그 바통을 이어받은 “반도”는 기대감이 너무 컸다. 스토리는 엉성하고 연출은 빈약하며, 또다시 억지 눈물을 쥐어짜는 신파가 등장한다. (강동원은 어찌도 이렇게 영화를 고르는 안목이 없단 말인가) 반면, 역병이라는 사극의 단골소재를 훌륭하게 변용시켜 조선좀비로 탈바꿈시킨 김은희의 연출력은 놀랍다. 몇몇 소름끼치는 장면들은 분명 서구권에서 드러난 시도와는 결이 다른 동양적인 특성이 있다. 프리퀄 성격이 강한 “아신전”으로 한 템포 쉬어가려는 속셈(?)이 보이긴 하지만 킹덤의 끝이 어디로 향할지 몹시도 궁금하다.
상상력을 자극하는데 좀비물 만한게 없다. 내가 만약 저런 상황에 처하면 어떡하지?라는 안전이 담보된 스릴 넘치는 상상 말이다. 좀비물이 아무리 변화무쌍해도 대부분은 한 가지 분명한 목적의식을 지닌다. 생존이다. 모든 살아 있는 자들에게는 살아 남아야 하는 지상 과제가 주어진다. 물론 병든 세상을 치유하기 위한 치료제를 개발하는 것(“나는 전설이다”)이 영화가 설정한 핵심 목표이거나 혹은, 아직 좀비로 물들지 않은 안전한 낙원으로의 탈출(“새벽의 저주”, 결국은 처참하게 실패하지만)이 플롯의 중심부를 차지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핵심은 생존이다. 살아남아서 치료제를 개발하든, 지상 낙원으로 탈출하든. 일단 살아 남아야 한다. 자, 그렇다면 살아 남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가장 먼저 안전한 거처가 필요하다. 며칠 먹고 마시지 않는다고 죽지 않으니까. 어디가 안전할까? 도심 속 빌딩 아니면 인적이 드문 시골 마을? 식량은 어떻게 확보해야 하나? 오랫동안 보관하려면 통조림 음식이 많아야 할텐데 하지만 무겁다는 단점이 있다. 물은?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해선 결국 안전한 곳에 정착을 해서 자급자족을 해야 하나? 아무래도 혼자보단 여럿이 있는 것이 생존 확률이 높을 것 같다. 그렇다면 적정 인원은 몇 명인가? 성별 비율은? 반드시 필요한 직업이 있을까? 아무래도 의사가 필요할 것 같다. 전투 경험이 있는 경찰이나 군인도 생존에 도움이 될 것 같고. 교육자는? 아니, 교육과 관련된 직업군은 가장 후순위 중 하나로 밀린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결국 끝이 없다. 그런데 이런 쓸모 없어 보이는 상상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샌가 생존에 대해 꽤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렇군, 이럴 경우엔 이렇게 대처하고 저럴 경우엔 저렇게 하면 안되고... 의외로 유익하다. 실용적이다. 좀비물을 계속해서 보게 되는 두 번째 이유다.
끝으로 좀비 장르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생존과 탈출의 기본 서사 구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드러난다. 그런데 좀비물이 단순 B급 오락물에 그치지 않는 이유가 따로 있다. 바로 인간과 인간세상의 별볼일 없는 민낯을 여지없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좀비물의 중요한 교훈 중 하나는 좀비보다 더 무서운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서로 힘을 합쳐 생존하기도 버거운데, 내가 그동안 봤던 좀비물들을 끊임없는 탐욕과 배신의 연속이었다. 특히 비교적 최근 신작인 “블랙썸머”는 신뢰를 얼마나 경계해야 하는지 시종일관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신뢰는 이미 구시대작 유물이 되어버렸으며 자의든 타의든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인간은 대부분, 죽는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인간의 신뢰를 위협하는 것이 과연 좀비 만일까? 겉으로 보기에 살만해 보이는 우리네 현실 세상은 얼마나 견고한 것일까? 역사는 전쟁과 학살, 폭력으로 짓이겨진 길을 걸어왔다. 얼마 되지 않았는데(사실 아직 지구 곳곳에선 현재진행형이다) 과연 인류는 진보했을까? 민주주의와 평화, 자유와 평등의 구호로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 내면에는 여전히 추악한 본성이 꿈뜰거리진 않는가? 그럴리 없겠지만 어느날 진짜 좀비가 나타나 서로 살아남기 바쁘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느긋하게 연대와 공존의 가치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당신은 재미와 유익을 거쳐, 느닷없이 인간 실존의 문제를 고민하게끔 하는 서늘한 매력이 내가 좀비에 끌리는 세 번째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