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댕동. ‘프록시마 인간동물원’을 찾아주신 여러분 안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도 즐거운 관람 하셨나요? 아쉽지만 이제 곧 폐장 시간입니다. 우리 다음에 다시 만나요!
휴. 오늘도 어찌 어찌 하루가 갔다. 펜스 바깥으로 관람객들이 하나둘씩 발길을 돌리고 있다. 벌써 집에 가야 하냐며 생떼를 부리는 아이들을 달래는 부모 모습을 보면서 지구 생각이 났다.
“뭐해 태식이 형. 얼른 정리하고 가서 저녁 먹어야지.”
뒤를 돌아보니 연주가 여기저기 널린 짐들이며 장비들을 챙기며 눈을 흘기고 있다. 오늘 동물원 테마는 운동경기였다. 아침에 농구, 점심 먹고 축구, 그리고 조금 전까지는 야구를 했더니 온몸이 성한 데가 없다. 아니 이걸 보는 게 그렇게 재밌으면 지들도 하면 될 것을. 우리가 하는걸 보는 것만 좋아한다. 프록시마 놈들은 지구인들이랑 놀라울 정도로 생긴 게 비슷하다. 팔다리 두 개씩에 손가락 발가락 열 개씩. 우리처럼 하나씩 달린 머리에 눈코입 붙어있고. 차이가 있다면 우리보다 키가 좀 크다는 거? 대략 평균 재보니까 한 3미터 정도 되는 거 같다. 옆에 서면 아, 간달프 옆에 선 프로도 마음이 이랬구나 싶다.
“아 빨리 정리하고 안 갈 거냐고요!”
“알았어 인마! 성질하고는…”
연주 저놈은 꼭 나를 형이라고 부른다. 지구에서 경찰로 일할 때 조금 친하다 싶은 남자 선배들은 그냥 다 형이라 불렀고, 그래야 더 친해진다고 했다나 어쨌다나. 아 저 독종. 나보다 체력이 몇 배는 더 좋은 거 같다. 어차피 관람용으로 하는 건데 지가 뛰는 경기는 무조건 이겨야 한다면서 축구에서 해트트릭하더니, 야구는 멀티히트에 기어이 도루까지 해버리는 놈. 세상에 동물원 신세 주제에 도루해서 경기 이겨 먹겠다고 하는 놈이 지구상에, 아니 우주에 어디 있냐고.
“태시끄 상. 연주 누나 더 화내면 무섭습니다. 빨리 정리합시다.”
“어 와타나베. 아까 다친 데는 괜찮아? 하여간 이놈이나 저놈이나 적당히 하면 될 거를 그거 하나 이겨 먹겠다고. 그렇다고 무슨 승리 수당 챙겨주는 것도 아닌데.”
“괜찮습니다. 다행히 뼈는 안 부러진 거 같습니다.”
좀 전 야구할 때 상대 투수가 던진 공에 팔뚝을 세게 맞았다. 분명 아팠을 텐데 이 녀석 크게 내색을 안 한다. 와타나베는 내가 프록시마에 와서 만난 인간 중에서 최고 엘리트다. 일본 최고 명문 와세다 대학교 경제학부 졸업했지, 일본 3대 은행 중의 하나인… 뭐였지? 마쓰이? 아 미쓰이스미토모 은행 입사해서 초고속 승진했지, 한국말도 잘해서 서울지점 해외영업부장으로 발령받았지… 아직 30대 중반밖에 안 됐는데. 듣기론 일본 유력 정치 가문 어디에 외가 쪽 후속이랬나. 암튼 잘나가는 놈이다.
아 그렇지. 연주도 엘리트지. 그리고 독종이지… 경찰학교 수석 졸업에 굳이 힘든 남대문 경찰서에 자원해서, 그중에서도 굳이 험한 강력계에 들어가서 웬만한 남자들은 다 형이라 부르면서 이겨 먹고…
와타나베랑 연주,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은 프록시마 동물원 동기다. 지구에서 한날한시에 같이 붙잡혀 왔으니까. 아, 그러고 보니까 우리 셋은 지구에서부터 나름 동기 비슷한 거였다. 와타나베는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 19층에 근무. 연주는 그 옆 서대문경찰서 근무. 나? 난 서울역 광장 근무. 광장 근무라니 의아할 거다. 그런데 말 그대로 광장 근무다. 그것도 24시간. 숙식을 모두 해결한다. 맞아. 노숙자다. 영어로 하면 홈리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있는데 노숙자가 아무 할 일 없이 그냥 누워만 있거나, 빈둥거리기만 하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서울역을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 대충 나라 돌아가는 흐름이 읽힌다. 무슨 무슨 집회를 하는지 보면 아 요새 저게 이슈구나 싶고, 서울역 오가는 좀 차려입은 사람들 표정 어두운 거 보면 경제가 영 시원찮구나 싶은 거다.
그때 또 살기 가득한 고함이 들려온다.
“아 팔 아픈 와타나베가 일 다 하잖아요. 진짜 빨리 안 움직여!?”
허둥지둥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던지 옆 동 사우디 녀석들이 키득거린다. 저 자식들을 확 그냥.
뭐지 이건. 오늘도 저녁 배식이 영 시원찮다. 요새 왜 이러지? 달랑 정체불명의 검정 프로틴 바 하나에 우유 맛이 나는 흰색 액체 한 컵이라니. 이건 뭐 서울역 급식 수준보다도 못한 건 아닌가.
“연주야 이거 좀 심한 거 아니냐? 오늘 그렇게 죽으라고 구르고 뛰었는데 꼴랑 이게 뭐냐.”
“아 내 말이요.” 연주도 어이가 없었던지 손도 안 대고 넋 놓고 식판만 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구에서 먹던 양갱처럼 생긴 거 같기도 하다. 맛은 무슨 바퀴벌레 갈아 넣은 거 같지만.
“저기, 잠깐 할 말이 있습니다.”
그때 맞은 편에 앉아있던 와타나베가 조용히 목소리를 낮춘다.
“야 너 왜 갑자기 목소리를 깔아. 무슨 일이야.”
와타나베가 신중하게 주위를 한 번 살핀다.
“내가 요즘 보니까, 여기 프록시마 경제가 영 시원찮은 거 같습니다.”
“경제?”
연주의 귀가 솔깃해진다.
“네. 우리 여기 온 지도 벌써 2년짼데. 물론 프록시마 행성 기준으로요. 지구 시간으로 계산하면 한 6년 정도네요. 근데 요새 이상한 거 못 느낍니까?”
와타나베가 식판을 옆으로 쓱 밀어내곤 이마를 가까이 들이밀었다.
“이상한 거? 일단 먹는 게 거지 같아졌지. 동물원이 갑자기 짠돌이가 돼버렸어.”
“맞습니다. 내가 보니까 여기 경제 돌아가는 것도 지구랑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일단 화폐를 쓰고 있죠. 동물원 가격이 계속 오르는 걸 보면 우리처럼 인플레이션이란 개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플레이션이 있으면 따라오는게 뭘까요.”
“흠. 인플레이션은 물가가 오른다는 뜻이니까 경기가 좋아졌다 나빠졌다 할 수 있다는 뜻이야?”
“맞습니다. 바로 그거에요. 최근에 동물원에 오는 손님이 많이 줄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우리한테 주는 식사 좀 보세요. 이건 확실히 프록시마 경제가 안 좋아졌고, 덩달아 동물원 예산도 줄었다는 뜻입니다.”
듣고 보니 와타나베가 하는 말이 일리가 있었다. 최근 들어서 확실히 손님이 확 줄긴 했다. 뭐야. 그러면 여기도 자본주의가 작동한다는 거야? 인제 보니 맑스 이 양반 완전 사기꾼이었네. 자본주의가 지구에서도 안 망했고 심지어 4.2광년이나 떨어진 프록시마에서도 잘 살아 있잖아. 망하기는 개뿔. 이 정도면 자본주의가 우주 보편 법칙 같은 거 아니야? 그나저나 내가 지구에서 사업 말아먹고 노숙자 신세가 되긴 했지만 이거보단 잘 먹고 잘살았다. 아. 이러면 여기도 재미가 없는데…
“그래서 와타나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본론을 얘기해봐.”
와타나베가 주위를 쓱 한 번 훑어보더니 아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다.
“우리 탈출… 합시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랑 연주의 시선이 동시에 마주쳤다.
“와타나베 씨. 지금 뭐라 그랬어? 탈출? 어떻게?”
연주가 땀에 젖은 운동복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의자를 바싹 끌어당겼다.
“사실 얼마 전부터 프록시마에 있는 지구인인권해방단체 조직원들과 접선 중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왔던 선글라스 커플 기억나세요?”
“선글라스 커플?”
아, 맞다. 진짜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와서 유독 우리가 있는 철책 앞에만 오래 머물러 있다가 간 커플들이 있었다. 설마 와타나베가 그런 일을 꾸미고 있었을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이 녀석 똑똑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치밀함까지 있는 줄 몰랐는데.
“맞아 맞아. 기억나 와타나베 씨. 그 프록시마인 들이 그런 분들이었어요? 난 전혀 눈치도 못 챘네. 근데 우릴 어떻게 도와준다는 거야?”
“간단하게 말할게요. 우리가 납치되어서 타고 온 비행선 있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밤 그 비행선이 또 들어온답니다. 그리곤 바로 다음 날 새벽에 지구로 출발하고요. 일종의 노예상선 같은 셈이죠. 우린 일단 이 동물원에서 탈출해서 어떻게든 그 비행선을 타야 합니다. 다행히 여기서 멀지 않아요.”
“근데 와타나베야. 플랜은 좋은데.”
내가 잠시 말을 끊었다.
“내가 무슨 말 할지 알지? 이 프록시마 친구들 우리가 여기서 얌전히 있기만 하면 그래도 굶기지는 않잖아. 근데 너 작년에 탈출 시도했다가 실패한 이탈리아 마피아 패거리들 기억 안 나? 걔네 막판에 자기네끼리 서로 배신해가지고 어휴. 난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태시끄 상. 솔직히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우린 걔네랑 다르잖아요. 난 태시끄 상이랑 연주 누나 믿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상황이 더 안 좋아 질 거랍니다. 결국 동물원 운영 예산이 부족해지고 폐쇄까지 돼버리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때 되면 우리 효용가치는 끝이에요. 탈출하다 죽나, 여기서 굶어 죽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맞아 태식이 형. 나 이제 더는 못하겠어. 죽더라도 다시 지구로 돌아가는 시도라도 해봐야 할 거 같아. 내가 그동안 여기서 왜 그렇게까지 열심히 살았는데. 이 악물고 끝까지 버티면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고 생각해서였어.”
와 연주 너까지. 독한 것들. 그렇게 해서라도 지구에 돌아가야겠다고? 막상 탈출이란 단어를 들으니까 난 겁부터 났다. 그래도 죽는 것보단 배고픈 게 낫지 않나? 식당 밖을 바라보니 밤하늘에 떠 있는 여러 개의 달 뒤편으로 은하수가 물결치며 흐르고 있었다. 크. 여기가 경치 하나는 진짜 끝내 주는데. 지구에 있을 때 말로만 들어봤던 프록시마 항성계에 와서 살게 될 줄이야. 꿈에도 상상 못했다. 근데 지금 다시 지구로 돌아간다…
“형 지금 또 딴생각했죠?”
이 귀신. 아주 내 속을 지속 마냥 꿰뚫고 있다.
“형도 여기서 이렇게 살지 말고 지구로 돌아가서 다시 마음먹고 새로 시작해요.”
“아니 나도 가고야 싶지. 근데 너무 위험하다 이거지…”
솔직히 안 가고 싶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 잘 될 거예요.”
이 근거 없는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건가 싶다. 와타나베 눈을 보니까 이 녀석은 이미 탈출에 성공한 거 같았다.
“아 몰라 알았어 일단. 오늘 밤 하루만 더 생각할 시간을 줘봐.”
“그래 잘 생각했어 형. 그리고 우린 끝까지 함께 갈 거 잖아.”
연주가 내 등을 찰싹 때리며 좋아한다.
“아 아파 인마. 그리고 아직 간다곤 말 안 했어.”
“쉿. 목소리를 낮추세요. 그리고 태시끄 상. 신중하게 잘 생각하십시오. 우린 내일 밤 자정에 탈출합니다.”
저녁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곤 숙소로 돌아왔다. 와타나베랑 연주한텐 내일 아침 식사 때 확답을 주기로 했다. 하. 진짜 돌아버리겠네. 안 가곤 싶은데 막상 여기 남았다가 와타나베 말대로 동물원 폐쇄되면 어떡하나. 나 혼자 남으면 걔네들 보고 싶을 거 같기도 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애꿎은 머리만 계속 긁어댔다.
그때 갑자기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건물 전체에서 방송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아. 친애하는 인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프록시마 동물원장입니다.”
뭐? 진짜 동물원장이라고? 본 적도 없었지만 목소리도 처음이다. 아니 그런데 인간 말을 하고 있네? 동시통역인가? 다들 나처럼 놀랐는지 복도 위 스피커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어 있다.
“생각해 보니까 이렇게 여러분께 직접 말을 전하는 게 처음이네요. 오늘 중대 발표가 있어서 직접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우리 동물원이 계속 적자를 내고 있습니다. 요즘 프록시마 경기가 너무 안 좋아요”
역시 와타나베 말이 맞았다. 설마 했는데 진짜일 줄이야.
“그런데다가 최근 프록시마에서 ‘인간해방’운동이 시작되면서 여러분들의 인권 문제가 중요한 사회 이슈가 되어 버렸습니다. 진짜 살다 살다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네요. 국정감사 출석까지 하다니… 내가 언제 여러분들을 탄압했습니까. 인간들의 인권이라… 아 말하다 보니 감정이 올라와서 이야기가 잠시 옆길로 샜습니다. 뭐 결국 이 이슈의 본질은 여러분들을 다시 고향 지구로 돌려보내야 해결이 된다는 말이겠죠.”
“그런데 우리도 수익을 창출해야 하는 입장에서 나름의 절충안을 생각해 봤습니다. 동물원 입장에서 다음과 같은 제안하고자 합니다. 지구로 돌아가는 걸 원하시는 분들은 아무런 조건 없이 모든 귀환을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세상에나. 무슨 이런 핵폭탄급 선언이 다 있나. 잡아 올 땐 언제고 이제 보내준다고?
“그리고 만약에. 이건 정말 만약에 입니다. 동물원에 남아 있기를 원하시는 분들은 지금 복지수준에 2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강제노동은 물론이고, 더 이상의 무리한 운동경기 일정도 없을 겁니다. 숙소 리모델링은 물론, 식사의 질부터 개선하겠습니다. 게다가 남겠다고 하신 분들에겐 월급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프록시마 기준 최저임금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이제부터 우리가 여러분을 직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잠깐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 거지. 이러면 지구로 돌아갈 이유가 딱히 없는데.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남아야 하는 상황 아니야? 이거 판 뒤집힌 거 맞지?
“물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산이 문제입니다. 저희야 최대한 다양한 분들이 많이 남아 있으면 관람 다양성 차원에서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럴 형편은 못 됩니다. 그래서 딱 10명의 지원자만 선착순으로 받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희망하시는 분들은 잘 생각하셔서 내일 아침 7시까지 동물원 사무실로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모레 새벽에 출발하는 비행선 때문에 많은 시간 못 드리는 점 양해 바랍니다. 그럼 이상 방송을 마칩니다.”
그래 잘 됐어. 난 아무래도 프록시마 체질인 거 같아. 이건 하늘이, 아니 우주가 나보고 여기 있으란 뜻인 거야. 가만있어 보자. 근데 10명만 선발이면… 경쟁률이 얼추 10:1인데… 에이 설마 나처럼 여기 남겠다고 하는 인간들은 없겠지? 암만 호구 조사를 해봐도 나처럼 돌아가봤자 갈 수 있는 집도 절도 없는 지구인은 없었다. 대충 옆 동 분위기를 둘러봐도 다들 지구로 돌아갈 생각에 들떠 있는 거 같았다. 뭐야 이거 이러다 진짜 나만 남는 거 아니야?
애들한텐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결심을 세우니까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침대에 누우니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스쳐 지나갔다.
그나저나 와타나베랑 연주 얘넨 돌아가면 다시 예전 직장으로 복직이 되려나 모르겠네 …
이 녀석들 돌아가면 별 탈 없이 잘 살아야 될 텐데…
이전 월드컵이 어디였더라… 그럼 다음번엔…
그래도 내 생각은 가끔 해주려나?…
이참에 둘이 잘 됐으면 좋겠다…
새 출발?…
둘이?…
…
큰일 났다. 시계를 보니까 6시 55분이다. 젠장, 중요한 날 늦잠을 저버렸다. 쿵. 허겁지겁 일어나느라 이층 침대 난간에 머리를 세게 부딪혔다. 아오. 난 아픔을 느낄 새도 없이 옷가지를 챙겨입고 나와 내다 앞으로 내달렸다. 신발이 짝짝이다. 잠깐만, 사무실이 어디더라? 가본 적이 있어야지. 저쪽인가? 그래, 왠지 저쪽일 거 같다. 59분이다. 에이 설마 조금 늦는다고 신청이 안 되거나 하진 않겠지. 숨이 턱 밑까지 차올라 입에서 피 맛이 배어 나왔다. 설마 여기에 남겠다고 한 인간들이 있을까 싶다가도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신경이 바짝 조여왔다. 아 저 건물인가 보다.
쾅쾅쾅.
“저기요. 동물원에 남는 거 신청하러 왔습니다!”
사무실 문처럼 보이는 곳 앞에 와서 문을 두드렸다. 쾅쾅쾅.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해.
불안했던 의심의 싹이 이젠 활짝 펴서 온몸에 세포 하나하나를 짓누르는 거 같았다. 이대로 돌아가면 안 되는데. 난 여기 남아야 하는데! 야 문 열라고!
그 순간 어디선가 나타난 장대같이 큰 프록시마 동물원 간수들이 사방에서 날 에워싸더니 알 수 없는 말로 뭐라 뭐라 지껄인다. 역시 원장 말은 통역이었군.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이놈들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야 대체. 그런데 그때 안에서 와타나베와 연주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 것 같았다. 설마 하고 온몸이 싸해지는 순간 갑자기 사방이 어두워지더니 입도 틀어막혔다. 어? 이거 뭐야. 야 이거 안 벗겨? 어디로 끌고 가는 거야! 아 아파 살살해!
머리에 씌워졌던 헝겊이 벗겨지고 입에 물린 재갈이 풀렸다. 갑자기 시야가 밝아져 눈을 찡그렸다. 얼마나 묶여 있었던지 벌떡 일어서려다 다리에 힘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러나 난 곧 깨달았다. 여기가 지구로 돌아가는 우주선 안이란 사실을. 창가 쪽으로 기어가서 밖을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젠장. 망했다.
“카아악 퉤. 아니 형씨. 지금 이 얘기를 우리더러 믿으라고? 아주 소설을 쓰고 앉아 있구먼그래. 예끼 이 사람아! 뻥을 쳐도 적당히 쳐야지.”
“왜 난 재미지는데. 그러니까 이 형씨 말로는 지가 쩌짝 하늘 어디에 있는 별에 가서 한 6년인가를 살다 왔다는 얘기잖아. 큭큭”
“아 뻥이든 아니든 그거이 뭐가 중요혀. 아 시간만 때우면 됐제. 이거나 마저 들이켜.”
구멍 뚫린 벙거지랑 누런니, 그리고 한쪽 끝 떨어진 멜빵바지가 소주병에 남은 마지막 방울까지 탈탈 털어 넣는다.
“어 좋다. 역시 이걸 목구멍으로다가 좀 털어 넣어야 덜 춥제.”
“다들 자다가 입 안 돌아가려면 빡스로 바람 잘 막아야 돼. 보니까 새로 생긴 환승 출구 쪽이 덜 춥다고 하던디.”
“아 그런 명당이 있었어? 구석 자리라도 누워볼라면 얼른 가야겄구만. 이봐 프록시만가 뭔가 하는 형씨. 형씨도 얼른 누울 자리나 찾아봐.”
셋이 함께 계단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거지꼴이다. 내 꼴도 마찬가지겠지. 저 앞쪽으로 서울스퀘어 건물과 남대문 경찰서가 나란히 어깨를 기대고 서 있다. 지금 보니까 완전 딱 붙어있네. 와타나베와 연주 생각이 났다.
계단에 걸터앉아 위를 올려다보니 겨울밤 하늘이 아주 맑았다. 저기 어딘가에 있겠지. 맨눈으론 안 보여도 대충 어디쯤인지는 안다. 내가 왔던 곳이니까.
와타나베… 연주… 이 자식들 잘 살고 있을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