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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y Jo Jun 27. 2023

벌새가 현재진행형 성장영화인 이유

김보라(2019)

좋은 무엇은 무엇인가라는 형태의 질문은 잘 묻지도, 굳이 대답하려 하지도 않는 편이다. ‘좋음’이라는 것에 대한 정의를 과연 내릴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과 어떤 식으로든지 그 질문에 꼭 맞는 하나의 대답을 제시하는 것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때의 폭력은 하나의 선택만을 정답이라는 울타리로 둘러쳐, 남겨진 무수한 가능성을 소외시켜 버리는 차원의 폭력이다. 특히 좋은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너무나 쉽고 명쾌하게 해답을 제시하는 자기계발서들을 가까이 두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견을 ‘감히’ 꺼내 보려 한다. 영화에 대한 깊이가 얇은 나로선 좋은 영화는 물론이거니와,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꺼내 감당하기도 벅차다. 하지만 망망대해 위를 떠다니는 좋은 영화에 대한 정의 중 하나를 건져 꺼내 올린다면 그중 하나는 상영관을 나선 이후를 상상하게 만드는(혹은 만들고 싶어지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영화를 보고 나선 곧바로 글을 쓰고 싶어진다. 아니, 써야만 할 것 같은 조급함이 생긴다.      


 김보라 감독이 2018년에 연출한 <벌새>가 나에겐 그러한 영화였다. 극 중 은희는 공부에 큰 관심이 없고 만화 그리기를 좋아하는 15살 소녀다. 그리고 남자친구가 있고 노래방에 드나드는 ‘날라리’의 두 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날라리 소녀이기도 하다. 아, 그러나 오해 없길 바란다. 이 날라리의 조건은 영화 속에서 ‘나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간다’의 구호를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교사가 내린 천박한 정의일 뿐이니까. 오히려 은희는 고등학생 언니의 일탈을 눈감아주고 남자친구와 설레는 마음으로 첫 키스를 겨우 하게 되는 순수함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랑스러운 날라리다.      


 또한 은희는 경제적 빈곤 혹은 풍요가 만든 이분법적 날라리의 구도에서도 벗어나 있다. 정말 꼭 그러겠냐는 의구심이 들기는 하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는 청소년들의 일탈은 가정이 경제적으로 몹시 어려워 또래 아이들과의 비교에서 시작된 열등감에서 비롯되거나, 반대로 모든 것이 차고 넘쳐 부족한 것에 대한 정서적 공감이 결여되어 있을 때 발생하지 않는가. 은희 가족은 대치동 아파트에 살며, 부모님은 상가 떡집을 운영한다. 영화 초반부에 은희를 비롯한 온 가족이 정신없이 가게 일을 하고 나서 거실에 앉아 수북이 쌓인 돈을 세는 장면은 이 가족이 적어도 경제적으로 부족한 상태는 아님을 보여준다. 그러나 정서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공부도 못하는 것들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선생과 마찬가지로 은희 아빠도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맘에 들지 않았던 손님에 대한 흉을 보며 상스러운 욕설을 쏟아낸다. 그러면서 “아빠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너희는 늦잠이나 자고. 아빠가 너희 땐 새벽 4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갔어”라는 대사는 자신의 권위를 세우고자 발버둥 치는 것처럼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본디 권위란 것이 주변의 도움 없이 내가 억지로 만들고자 할 때 해변의 모래성처럼 얼마나 허약한가.)      


 어디 그뿐인가, 은희는 한 살 터울인 오빠에게 매일같이 얻어맞기 일쑤다. 외고와 서울대 진학을 목표로 하는 오빠는 집안의 대들보 같은 존재이다. 따라서 여동생에게 손찌검하는 걸 부모님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딱히 뭐라 할 생각도 없어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은희네 부모님이 또다시 언쟁을 높이며 싸우기 시작한다. 오빠는 저쪽 방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은 채 귀를 막고 있고 분쟁의 원인 제공자인 언니는 바닥에 앉아 울고 있다. 점차 엄마와 아빠의 감정이 격해지고, 엄마가 그동안 모르는 체했던 아빠의 비밀(그는 사교댄스에 빠져 있었다)을 폭로하고 부끄러운 줄 알라며 다그친다. 그러다가 역으로 밀쳐진 엄마가 바닥에 쓰러지고, 옆에 있던 작은 전등을 아빠에게 던지면서 깨진 유리조각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맞은 아빠의 팔 또한 찢어졌는지 피가 흐른다. 깨진 유리조각들과 흐르는 피. 이쯤되면 가정의 파탄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히 주어진 셈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김보라 감독은 관객의 예상을 비껴간다. 다음 날 아침 일어나보니, 마치 전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빠와 엄마가 거실에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며 웃고 있다. 아빠의 팔에 붙여있는 상처와 깨진 채 베란다에 놓여있는 전등이 나란히 교차 편집된 장면은 어젯밤 사건이 분명히 일어났던 일임을 환기시킨다. 또한 은희가 수술해야 한다는 의사의 소견을 듣고 눈물을 터뜨려 버린 아빠의 모습, 가까스로 사고를 모면한 누나의 상황에 가슴을 쓸어내리며 식사 중 오열해버린 오빠의 모습. 겉으로 보기에 엉망진창인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그래도 가족이라는 안전한 울타리에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이라는 말을 이 영화는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를 본 이들은 알겠지만 은희에게 가족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대신 김보라 감독은 은희의 단짝친구(수희), 남자친구(지완), 한 살 어린 후배(유리), 그리고 학원 선생님(영지) 이들 4명과의 관계 설정을 통해 은희의 성장을 프레임 속에 담아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성장영화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선 은희를 둘러싼 이 4명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가장 눈에 띄는 이들의 공통점은 이들 모두가 적어도 한 번씩은 은희를 떠난 자들이란 것이다. 극중 시간상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수희: 은희와 수희는 같은 학교와 학원에 다니는 단짝 친구다. 어느 날 이들은 문방구에서 재미 삼아 물건을 훔치다 주인에게 걸리고 만다. 부모님을 대라는 주인의 성난 다그침에 수희는 그만 은희의 부모님이 상가 떡집을 하고 있단 말을 함으로써 은희를 배신하게 된다(적어도 은희의 입장에서 이건 배신이었다). 그리고 영화는 이들이 나중에 다시 자연스럽게 화해하기 전까지 같은 화면 프레임 속에 등장시키지 않는다.  

    

2. 지완: 은희는 120일 기념일을 챙길 정도로 지완을 향한 마음이 애틋하다. 하지만 어느 날 창밖으로 지완이 다른 여자에게 어깨를 두르며 다정하게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마음에 상처를 입는다. 수술한 은희의 병문안조차 하지 않은 지완을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였음에도, 지완의 엄마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지완은 다시 한번 수희를 (떠밀리다시피) 떠나버린다. 둘이 서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지완의 엄마가 “얘가 그 방앗간 집 애니?”라는 말은 멸시와 조롱이 가뜩 섞여 있으며 사실 은희는 이런 엄마에 아무 저항도 못하고 끌려간 지완보다는 이 말에 더 큰 상처를 입었으리라 짐작된다.      


3. 유리: 유리는 어느 날 갑자기 은희가 마냥 좋다면서 무턱대고 찾아온 한 살 아래 학교 후배다. 은희는 이런 유리가 낯설고 조심스럽지만, 점차 마음을 열게 된다. “전 언니가 좋아요, 그냥 너무 좋아요”라는 유리의 말에 정말이지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들의 좋은 관계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노래방에서 은희가 부른 노래의 가사를 그대로 옮기자면, “정말 몰랐어요, 사랑이란 유리 같은 것. 아름답게 빛나지만, 깨어지기 쉽다는 걸. 이제 깨어지는 사랑의 조각들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에요”. 여기서 유리는 후배 유리를 뜻하면서도 언제든지 부서질 수 있는 중학생들의 풋내나는 일시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고백하듯 노래를 부르던 은희의 얼굴이 설레기보다는 한 조각 슬픔을 머금고 있던 것처럼 보인 이유는 또다시 다가올 부서짐을 미리 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기어코 유리는 어느 날 등굣길에서 만난 은희를 무시한 채 가버리고, 이어진 장면에서 유리가 “언니, 그건 지난 학기잖아요”라는 말은 수희와 지완의 배신이 새긴 상처를 다시 덧내고야 만다.      


4. 영지: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은희와 은희의 한문학원 선생님인 영지의 관계다. 영지는 서울대학교에 다니다 휴학 중인 대학생으로, 층계참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우지만, 수업 중에는 어린 학생들에게 깍듯이 존대하는 멋있는 선생님이다. ‘상식만천하 지심능기인. 즉,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늘 그랬듯이 수업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던 은희에게 어느 날 영지의 저 ‘가르침’은 영지에게 큰 울림을 준 듯하다.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누구보다 가깝다고 생각했던 수희, 지완 그리고 유리까지 이들의 마음속이 헤아려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대신 은희는 이제 영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싶어 한다. 영지는 은희가 가족들과 겪는 불화, 수희와 지완이 남긴 배신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선량한 치료사의 역할을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 더 이상 맞지마, 어떻게든 맞서 싸워”라고 단호하게 말하며 눈빛으로 분노를 표출하는 존재다. 수술을 마치고 학원으로 돌아온 은희는 영지가 떠났음을 알게 되고 수소문 끝에 집으로 찾아가지만, 영지의 엄마와의 대화에서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영지도 그곳에 함께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은희가 가장 크게 의지했던 영지마저 은희 곁을 말없이 떠나가 버린다. 그리고 영화는 영지가 은희에게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보이스오버되면서 마무리된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어느 날 알 것 같다가도 정말 모르겠어. 다만 나쁜 일들이 닥치면서도 기쁜 일들이 함께한다는 것우리는 늘 누군가를 만나 무언가를 나눈다는 것세상은 참 신기하고 아름답다. 학원을 그만둬서 미안해. 방학 끝나면 연락할게. 그때 만나면 모두 다 얘기해줄게”    

      

 이때 은희의 시선은 소풍 가기 직전 운동장에 모여 들떠 있는 또래 아이들을 향해 있다. 그러나 표정은 한없이 복잡하다. 신기한 듯하면서도 길 잃은 당혹감, 그리고 상실의 여운이 짙게 배 있다. 정말 영지의 말대로 세상은 신기하고 아름다운가? 영지는 과연 무엇을 은희에게 다 얘기해주려 했던 것일까? 혹 어떻게 사는 것이 맞는지를 찾아낸 거라도 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영지는 이 편지에서 이미 그 답을 찾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세상은 나쁜 일과 기쁜 일이 공존하며, 우리는 타인과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 영화 마지막 장면 속 은희의 표정을 통해 미루어보건대 아직 은희는 이 편지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 15살 아이가 이를 깨닫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잔인하지 않은가.      


 이제 미뤄두었던 이 영화는 은희의 성장영화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하고자 한다. 그렇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다. 물론 이 작품은 성장영화가 갖추어야 할 장르적 특성은 갖추고 있다. 어린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겪는 내적인 고통, 실연과 상처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요소가 빠져있다. 바로 그러한 상처들을 이겨내고 한 단계 도약해 성숙한 세계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정신적 고양말이다. 감독의 의도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영화 속 은희의 모습은 마지막까지도 이 정신적 고양에 다다르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실패한 성장영화인가? 아니다. 앞서 좋은 영화의 기준으로 상영관을 나서면서 새롭게 시작될 수 있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제 은희가 성장할 수 있는 마지막 몫은 이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 달려있다고 말하면 지나친 책임 전가일까? 분명 은희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해서 상처를 입을 것이다. 산다는 것이 그러하므로. 그러나 중학교 2학년 이 시절의 아픔이 이후 은희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 될 수만 있다면, 그럴 것이란 관객의 믿음이 계속된다면 현재진행 중인 은희의 성장을 조심스레 기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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