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럭저럭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중•고등학생 때는 부모님과 선생님께 혼나지 않기 위해, 대학을 가기 위해 공부를 했다. 성적은 나름 괜찮은 편이었지만 솔직히 공부가 싫었다. 특히 싫어하는 과목을 공부할 때면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나올 정도였다. 그래도 공부를 하긴 했으니 성실한 학생이었던 것 같기도.
고3 겨울, 대학 합격 통지를 받았다. 기대한 것보단 다소 아쉬운 결과였지만 공부가 끝났다는 사실에 후련함이 더 컸다. 비슷한 성적이 나오던 한 친구가 국내 최상위 법대를 붙었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는 부럽지 않냐고 물었다. "전혀. 걔는 대학에 가서도 공부를 해야 하잖아." (비하가 아니라 고시공부를 한다는 게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물론 나도 대학에 가서도 공부를 했긴 했다. 학점, 토익 등 취업을 위한 공부를. 대학원이나 갈까 잠시 고민도 했지만 졸업 전 마지막 원서를 넣은 회사 합격 통보를 받자마자 냉큼 마음을 접었다.
직장인이 되고는 공부가 아닌 곳에 힘을 쏟았다. 일을 하고, 운동을 하고,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고, 복직을 하고.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할 일은 너무나도 많았고 시간은 턱없이 모자랐다. 아이가 잠들고 난 뒤 마시는 맥주 한 캔이 나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남편이 대학원을 다니겠다고 했다. 남편이 말한 대학원 과정은 회사 업무와도 연관성이 있었고, 일을 하면서 다니기에 그렇게 벅찬 과정은 아니었다. 회사 연계 과정이라 학비도 저렴했다. 반대할 이유가 없었기에 쿨하게 오케이 했다. 그런데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남편이 부러웠다. 그냥 남편이 공부한다는 사실이 부러웠다. 내 표정을 읽은 남편은 무슨 문제가 있는지 물었다. "나 혼자 뒤처지는 기분이야. 나도 공부가 하고 싶어."
아니, 이 대사가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맞나? 남편이 듣는 과정은 내가 관심 있는 분야도 아니었고, 나와 남편이 동시에 대학원을 다닐 경제적, 시간적 여유도 없긴 했다. 그냥 남편이 뭘 한다니까 부려본 심통이였을까. 그런데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은 생각보다 오래 유지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 없이 공부해보는 건데.' 학창 시절 더 공부를 열심히 했어야 했다는 후회마저 밀려왔다.
그래, 난 공부를 하고 싶은 게 맞았다. 근데 뭘 공부하고 싶은 걸까?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나도 언젠가 마음에 드는 분야를 찾아 대학원에 다닐 수 있지 않을까? 학원을 다닐 수도 있고 말이지. 그때부터 나는 내 용돈의 일부를 나를 위해 저금했다. 그리고 그 통장에는 '내 공부 적금'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