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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찹쌀떡 Aug 13. 2020

아이가 아닌 엄마의 학습지 수료기

"어머님, 상담 좀 받아보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바빠서..."
"아, 그러면 전단지라도 받아 가세요"

금요일 퇴근 후 아이 어린이집 하원 길. 단지 내 00학습이라고 쓰여있는 파라솔 부스에서 한 분이 나에게 전단을 내밀었다. 나는 오른손에는 아이의 손을 잡고, 왼팔에는 내 짐과 어린이집 가방과 어린이집 낮잠 이불까지 주렁주렁 낀 채로 왼손을 겨우 뻗어 전단지를 받아 들었다.

아이가 잠든 일요일 저녁, 집을 치우다 거실 한편에서 뒹굴던 학습지 전단을 발견했다. 국어, 중국어, 영어, 한자, 일어. 나는 배달 광고지를 읽듯이 학습지 전단을 꼼꼼하게 읽어보았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가 아닌 내 이름으로 학습지 신청을 했다.




당시 나는 첫째 육아휴직 후 복직하여 회사를 다니던 중이었다. 동시에 머리가 점점 굳어가는 기분이 들어서 뭔가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 '뭔가'는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일과 육아에 치이고, 남편이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으므로 시간도 돈도 여유롭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날 밤 학습지 전단지를 보며 문득 동기 언니 중 한 명이 학습지로 일어 공부를 한다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생각해보니 학습지는 시간도 돈도 크게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그렇게 충동적으로 학습지를 신청하게 되었다.


학습지 과목은 한자와 영어를 선택했는데, 사실 과목 선택에 있어서 큰 고민을 하지 않았었다. 둘 다 기존에 접해본 적이 있어서 좀 더 쉬울 것 같았고, 일상생활에서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영어는 도중에 그만두었다.(영어는 리딩에 치중되어 있는 느낌이었고, 대부분 영어 지문들이 올드한 동화라서 내 관심사와는 멀었다.)


매주 20여 장의 교재를 받았다. 다 풀고 우편함에 넣어두면, 담당 선생님이 채점을 해서 다시 우편함에 넣어주셨다. 방문 시간을 맞추기가 어려워 선택한 비대면 방식이었다. 채점된 교재의 빨간색 동그라미들이 마음을 설레게 했다. 반면 틀렸다고 체크가 되어 있으면 그게 뭐라고 시무룩해지기도 했다.


D1~K단계까지 총 11단계를 끝냈다. 거의 2년 가까이 걸렸던 것 같다. 그동안 도합 2,200여 장을 푼 셈이다. 중간에 딱 한번 밀린 거 빼고는 밀린 적이 없었다. 어릴 땐 그렇게도 하기 싫어서 자주 밀리고, 교재 잃어버렸다고 거짓말도 하고 그랬었는데... (역시 내 돈의 힘이란!) 매일 풀지는 못해도 일주일에 3일 정도는 풀었다. (20장 정도지만 하루 만에 몰아 푸는 건 어른이 되어도 힘든 일이었음ㅠㅠ)


사실 학습지를 하고 나서 엄청난 한자실력의 상승은 없었다. 꼬박꼬박 하긴 했으나 목표의 부재와 활용도가 낮아 배운 것을 잊어버리기 일쑤였다. 나름 복습한다고 일주일 과정이 끝나면 새로운 한자를 노트에 적었지만 그 정도로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영단어를 한 번 적는다고 외워지는 경우가 없는 것처럼... 뭔가 목표가 있었다면 더 효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을 거란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만 마지막 교재를 제출하던 날,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실력의 상승보다도 성취감이 컸던 학습지 수료. 하지만 끝난 게 끝난 게 아니다. 언젠가 우리 아이가 학습지를 하게 된다면, 그때는 미처 하지 못했던 다른 외국어 학습지를 함께 해 볼 생각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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