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88)
소설가란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알고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이야기를 구두로 하는 대신에 글로 써놓는 사람이었다. 그 자신은, 새로 꾸미는 것은 거의 없고 다만 단정히 가다듬을 뿐이며, 상상적인 것의 기록자였다. 한데, 소설가가 스스로 이야기를 꾸며서 그것을 발표하기 시작하게 되자, 그는 자기 자신을 반성하게 된 것이다. 그는 거의 죄악과 같은 자신의 고독과 정당화될 수 없는 무상성과 문학적 창조의 주관성을 한꺼번에 발견했다. 모든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그런 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즉 글을 쓸 권리에 근거를 주기 위해서, 소설가는 그가 꾸민 이야기를 자신처럼 보이게 하려고 했다.
집단적 상상에서 나오는 이야기에는 거의 물질과 같은 불투명성이 배어있는 것이 특징인데, 자기의 이야기에 그런 불투명성이 깃들이게 할 수 없는 소설가는 다른 것은 고사하고, 그 이야기가 스스로 꾸민 것이 아닌 척하고, 추억담으로 받아들여지게 만들었다. 이 목적을 위해서 소설가는 구전 문학의 화자와 같은 인물을 빌려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이와 아울러 현실적 독자를 대표하는 창자를 등장시켰다.
<데카메론>의 인물들이 그런 예이다. 그들은 일시적인 피신 때문에 야릇하게도 성직자의 처지와 흡사하게 되며, 화자, 청자, 평자의 역할을 번갈아 한다. 이리하여 객관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리얼리즘―이야기의 말들과 그 말이 지칭하는 사물들이 같은 것으로 생각되고 세계를 이야기의 실체로 삼았던 그런 리얼리즘의 시대가 지나간 다음으로, 문학적 관념론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제 말은 입속에서나 붓끝에서만 존재할 따름이고, 본질적으로 말 자체를 통해서만 그 현존성이 보장되는 그런 화자의 것이 되고 말았다. 또한 이야기의 실체는 세계를 자각하고 생각하는 주관성이었고, 소설가는 독자를 사물과 직접적으로 접촉시키는 대신에, 매개자로서의 자신의 기능을 의식하게 되고, 허구적인 화자라는 형식으로 그 매개자로서의 기능을 실현시켰다.(p.187-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