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돌베개, 2008)
음악평론가 강헌의 <신해철>(돌베개, 2018)에서 먼저 살펴볼 부분은 ‘예술가’와 ‘논객’ 사이를 오고가는 신해철이다. 1988년 제12회 대학가요제에서 밴드 「무한궤도」, ‘그대에게’라는 곡으로 대상을 받으며 그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렸다. 그는 한 세대의 아이콘으로 부상하지만 처음부터 음악에 대한 천부적인 소질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음악적 재능이 평균이하라는 열등감은 그의 유년과 청소년 시절을 괴롭혔다. 뮤지션이 될 수 없다면 그는 “프로듀서나 엔지니어가 되어서 음악 속에 있고 싶었고, 그마저도 힘들면 거의 천부적으로 타고난 말재주를 다듬어 음악을 소개하는 DJ나 비평가라도 되고 싶었다.”(p.16)라고 다짐했다. 저자 강헌이 본 관점은 “아무리 생각해도 버릴 수 없는 음악을 향한 간절함”(p.16)이었다. 그는 무한궤도를 시작으로 솔로와 1992년에 결성한 밴드 넥스트와 2000년에 새롭게 뭉친 비트겐슈타인을 거쳐 다시 넥스트로 이어지는 자신만의 길을 걸었다. 대중음악, 국악, 클래식, 재즈, 월드 뮤지 같은 ‘모든 음악의 내면’으로 들어서며 다양한 시도를 하는데 그의 태도는 거침이 없었다. 예술가로서 행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다음은 논객 신해철이다. 작가 강헌은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논리와 행동으로 참여한 논객’으로 그를 바라봤다. 글쓴이의 말에 따르면 정치와 사회적 개입은 식민지 시대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대중예술인이 절대해서는 안 될 금기사항이었다. 여기서 신해철의 태도는 단호했다. 그는 “‘연예인’이라는 단어를, 신분을, 그런 시선 자체를 거부”(p.16)했으며 “연예인을 ‘공인’으로 몰아가는 한국 사회의 비상적인 시각에 분노”(p.16)하는 입장을 보였다. 현재에도 여전히 통용하는 사회 현상 중 하나다. 사회는 그의 발언을 존중하기보다 독설가라는 이미지 프레임을 씌웠다. 그는 종교 보수진영과 음악 마니아에게 노골적으로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의 소신을 그대로 알 수 있는 사건 중 하나가 바로 찬조연설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는 연사로 나섰다. “2002년까지 자신이 정치적 무관심, 혹은 정치 혐오의 스탠스를 지녔”(p.184)음을 스스로 고백했다. 그가 연설을 하기로 마음먹은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람답게 사는 것과 정치가 무관하지 않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p.186)였다. 거리 유세까지 감행한 그의 행동을 본 강헌은 “2002년은 1987년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하나의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p.187)이라는 시선으로 바라봤다. 1988년 대학가요제 대상으로 이례적인 데뷔를 한 신해철은 서강대학교 87학번 철학과 2학년이었다. 전국적인 민주항쟁이 일어난 1987년. 25년의 군부통치를 종식시킨 세대였다. 그는 예술가와 논객이 아니라 한 국가의 시민으로 대중 앞에 서있었다.
이 책의 흥미로운 점은 ‘한국대중음악문화론’이다. 저자 강헌은 “100년이 채 되지 못하는 한국 대중음악사는 스타를 꿈꾸는 젊은이들이 감행하는 데뷔의 명암을 극적으로 연출해 왔다.”(p.35)라고 말했다. 1964년 기타리스트 신중현이 결성한 록 밴드 에드 훠를 첫 번째 출발점으로 삼아야한다라는 게 그의 관점이다. ‘남루한 한국 사회 풍경’에서 음악은 청년의 이상향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1970년대 한국 록 음악은 대마초 파문으로 추락해갔다. 1977년부터 시작한 대학가요제는 록 밴드의 부흥기였다. 1980년에는 주류와 비주류를 대표하는 뮤지션이 등장했다. 전자는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이고 후자는 「들국화」, 「시나위」, 「부활」, 「백두산」 언더그라운드 헤비메탈이었다. 언더그라운드 음악 문화는 영토, 진화, 소멸 세 갈림길에 들어섰다. 신해철 역시 이들의 존재에 영향을 받았다. 1990년대 선두주자는 신해철과 댄스그룹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 대학가요제에서 화려한 데뷔를 한 그는 솔로로 전향하고 러브 발라드로 인기를 끌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아이돌 문화의 문을 열었다. 1996년 여름, 100개 팀에 달하는 아이돌 댄스 그룹의 비정상적인 열풍으로 이어졌다. 화려함과 무관심으로 희비가 엇갈리는 데뷔라는 시선에 작가 강헌은 주목하며 ‘정글게임’으로까지 내다봤다. 그는 “박정희 시대를 지배한 권위적인 가부장주의 아래서 유년을 보내고 전두환 시대의 폭력적인 비민주성을 정면에서 마주한 청년, 어쩌면 한국 근대에서 지극히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해철의 주체 형성 과정은 그로 하여금 뮤지션십과 시민성을 분리하지 않게 만들었다.”(p.171)라며 신해철을 중심에 놓고 전후 세대의 시대성을 관통했다. 한국대중음악문화를 전체적으로 조망하려는 강헌의 태도는 주목해볼만하다. 대중음악의 보편성은 과연 존재하는지 되묻는다.
신해철은 음악의 보편성이라는 관점에 대해 “서태지 신드롬 이후 불붙은 흑인 음악의 개떼 현상은 다른 장르를 전부 죽였다.”(p.239)라며 “분노한 록 팬들은 컬트화했고, 다른 장르에 대해서 적개심만 증폭되었다.”(p.239)라고 말했다. 그는 다른 요인 중 하나로 ‘클럽 문화의 괴멸’을 꼽았다. 밴드 문화 활성화는 물론 리코딩 엔지니어나 장르별 프로듀서 층이 다양해야 한다라는 게 그의 입장이었다. 그는 “뛰어난 연주자가 되기 위해 산전수전 다 겪어야 하는데 클럽 문화가 괴멸된 이 참혹한 땅에서 어디 가서 내공을 단련하겠는가?”(p.259)라고 반문했다. 보편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형적인 문화임을 시인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보편성의 부재는 표절시비로 이어졌다. 그의 견해는 “개인의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문제다.”(p.265)였다. 식민지 시대에 시작한 대중음악사와 ‘생존과 성공의 강박관념’에 찌든 표절 두 가지 의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미국이 한반도에 상륙한 후 모방에 급급한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국가적 망신의 차원이 아니라 문화적 종속을 피할 수 없다는 문제였다. 그는 “단 하나의 희망이 있다면 1990년대 들어서 대중이 표정을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컴퓨터 통신 같은 자발적인 커뮤니케이션망을 통해 문제의식을 널리 공유해가고 있다는 점이다.”(p.265)라며 “대중음악이 발전하려면 대중음악의 문제만 얘기해서는 아무것도 안 되는 것이다.”(p.268)라고 답했다. 한국대중음악사에서 보편성이라는 문제는 여전히 피해갈 수 없다. 신해철은 그런 논쟁에서 최전선에 서 있는 인물이었다.
<신해철>의 탁월한 성취는 음악평론가 강헌이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한 세대의 아이콘 신해철을 전설화하거나 간증해내지 않았다. 예술가와 논객이라는 입장으로 나누며, ‘개인적인 삶’, ‘한국현대사’, ‘대중문화’ 안에서 신해철을 철저하게 해체했다. 때론 강헌은 ‘음악적 재능이 평균이하라는 열등감’, ‘천부적인 호기심으로 견뎌온 음악의 열정’, ‘정치와 사회에서 싸우는 행동주의자’, ‘연예인 이전에 음악인’이라는 영역에서 그의 모습을 담아냈다. 그는 “신해철은 인문주의에 관한 믿음을 지닌 마지막 세대이자 산문적인 욕망의 담론을 행동으로 피력하기 시작한 첫 번째 세대의 인물이다.”(p.214)라며 “시장 한가운데 선 고독한 몽상가였다.”(p.214)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2014년 10월 27일 의료사고로 안타깝게 죽을 맞이한 신해철. 다양한 방식으로 그를 표현할 수 있는 일은 많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본인이 선택한 음악의 장르 안에서 자유롭길 원하는 존재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대중음악사는 그의 부재로 발언권을 잃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