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네가 예쁜 일기장을 고를 때
나는 쇼핑을 싫어하지만, 팔월에는 꼭 대형마트에 간다. 구월이 신학기인 러시아는 이즈음 대형마트에 신학기 준비물 부스가 크게 설치되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나의 관심 영역은 우리나라의 공책보다 크기가 작고, 두께도 얇은 개성 만점 교과목 공책과 일기장이다.
“엄마, 나는 이 공책이 마음에 들어.”
아들은 자신이 골라온 아보카도가 그려진 공책을 카트에 담으며 말한다.
카트에 얌전히 타 있던 딸도 오빠를 따라 검지를 턱밑에 대고 고심하는 행동을 취하더니 공책을 고르기 시작한다. 욕심 많은 딸아이는 세 권의 공책을 내게 내민다.
“나경아, 이 공책에 뭐 쓸 건데? 이건 일기장이야, 넌 아직 일러.”
내가 두 권을 덜어 공책 더미에 내려놓자 나경은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결국 딸이 골라온 공책을 모두 카트에 넣고 서둘러 신학기 준비물 부스에서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시우와 나경은 각자의 공책을 손에 꼭 쥐고 잠들었다.
예비 중학생 때부터 같은 보습 학원을 함께 다녔던 친구 지원은 음악교사인 어머니와 약사인 아버지의 무남독녀였다. 매년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에 해외연수를 가던 지원은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에도 어김없이 해외연수를 갈 계획이었다.
“민아야, 이번에는 아일랜드로 어학연수를 갈 건데 너도 갈래? 가면 진짜 재미있어. 고등학생 되면 방학 때도 학교에 나가니까 갈 수 없잖아.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친구의 감언이설에 내 마음은 이미 아일랜드행 비행기에 지원과 올라타 있었다. 그러나 가정주부인 어머니와 스테인리스 제조업자인 아버지, 고3 수험생 오빠를 둔 내게 해외연수는 무턱대고 지불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비용이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더욱 열심히 공부하여 부모님의 허락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중학교 마지막 여름방학, 나는 인천공항에서 1시발 네덜란드행 KLM 항공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네 번째 어학연수였던 지원은 여유 있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막상 공항에 도착하니 부모님 곁을 떠나 한 달 동안 타지 생활을 한다는 것이 내게 설렘보다는 두려움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모님과 지원 앞에서 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는 모습을 보여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 드리기 싫었고, 친구 앞에서 해외연수 처음 가는 티를 그런 식으로 내는 건 더욱 싫었다. 그래서 더욱 활기차게 웃고, 친구와 정신없이 떠들며 손목을 만졌는데 손목시계가 없었다. 아버지는 급히 공항 내 상점에서 노란 손목시계를 사 오셨다. 그것을 내게 채워 주며 아일랜드에 도착하면 그곳 시각으로 시간을 다시 맞춰야 하니 시간 맞추는 방법을 알려주셨다. 방법을 일러주시는 아버지는 설명 도중 계속 코를 훌쩍거리셨다. 그제야 나는 아버지의 눈시울이 붉게 젖어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남편은 슬픈 얼굴을 하며 담배를 피워 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서야 500 유로화로 맞춰주지 못한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일어섰다. 빗방울이 후두둑 거리며 차창을 두들겼다. 어디쯤 가고 있을까? 미쳐 챙겨 넣지 못한 것들은 없을까. 작은 책가방 하나 더 넣어줄걸……. 며칠 전부터 괜히 야단친 것은 아닐까? 가기 전에 피자며 쿠키 등 좋아하는 것들 좀 맛나게 만들어 먹일 걸……. 그래. 고추장이랑 김, 컵라면도 챙겨줄걸……. 무엇보다 남편 말대로 돈이나 충분히 넣어줄걸…….
공항에서 공장을 들려 집에 오니 저녁때가 되었다. 민혁이 방에서 시계를 집어와 아일랜드 시각에 맞추어 놓았다. 적어도 12시 정도에는 전화가 오리라 기대하며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했지만 전화는 없었다.
공항에서 출국할 때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들과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딸아이 모습. 시계를 사러 가서는 한참 뒤늦게 화장실에서 달려온 남편은 눈시울이 벌게졌지만, 민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신나고 즐겁게 부푼 모습으로 웃고 있었다.
내가 공항에서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사이, 12시간 동안 시간을 역행하는 사이, 아일랜드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한밤중이어서 콜렉트 콜을 할 수 없는 사이, 나의 어머니는 섭섭함을 볼펜 끝에 묻혀 일기를 썼다. 아일랜드의 상징처럼 초록색 네 잎 클로버가 그려진 연두색 엄마의 일기장 첫 장은 딸과 처음 이별한 밤에 써진 것이었다.
나경아, 성년의 날 엄마는 집 근처 ‘칭기즈칸’이라는 양고기 집에서 가족과 함께 저녁을 먹었지. 향수 대신 양고기 특유의 지린내가 온몸에 베였고, 우아한 와인 한 잔 대신 칭다오 맥주와 고량주가 우리의 잔을 채운 그날 밤, 빨간색 장미 꽃다발 대신 초록색 네 잎 클로버가 그려진 엄마의 일기장을 선물로 받았어. 집으로 돌아와 읽어본 엄마의 일기장에는 오 년 동안 성글게 적힌 엄마의 진한 마음이 녹아 있었어. 즐거운 날보다는 내가 보고 싶거나 나를 많이 혼냈거나 당신이 슬펐던 날에 쓴 일기가 많았지.
아가야, 엄마의 일기를 읽으며 나도 훗날 엄마가 된다면 아이에게 나의 일기를 주고 싶단 생각을 했어. 그리고 ‘엄마’의 일기는 너희가 내게 온 순간부터 시작되었지. 엄마의 빨간색 책상 서랍 첫째 칸에는 두 권의 일기장이 가지런히 누워 있단다. 빠짐없이 쓰려고 했지만, 그렇지 못했던 너와 시우의 태교 일기장이지. 나도 결국 기계의 편리성에 편승하여 그 일기장에 손글씨로 적어본 지가 꽤 되었구나. 나는 태교 일기장을 너와 네가 아빠와 엄마가 되는 날 줄 생각인데 그전까지 이따금 끼적여봐야겠다.
너를 낳고 한국에서 반년 생활하던 해 엄마는 할머니에게 처음으로 일기장을 선물했어. 엄마가 집을 비웠을 때 몰래 엄마의 일기를 엿봤는데 이번에는 할머니 기일에 사무치게 그리운 당신의 엄마를 그리며 쓰셨더구나. 아무래도 나의 엄마는 슬픈 날에만 일기를 쓰는 고약한 글쓰기 성향이 있는 것 같아. 내 딸은 어떠한 마음으로 일기를 쓸지, 네 일기의 첫 장은 어떤 날일지 궁금하다. 엄마는 중학생 때부터 일기를 잘 썼던 것 같아. 네가 십이월이면 엄마와 함께 다음 해에 쓸 일기장을 함께 고르는 나이가 되면 이 노래를 들어줘. 그런데 네가 자물쇠 달린 일기장을 고르면 어떡하지? 네가 학교 갔을 때 네 일기장을 몰래 엿보고 싶은데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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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 09.
왁스(Wax) [엄마의 일기] 작사 김진아 작곡 최준영
너그럽게 웃으시는 당신에게서 따뜻한 사랑을 배웠죠
철이 없는 나를 항상 지켜주시는 하늘처럼 커보인 당신
우연히 서랍 속에 숨겨둔 당신의 일기를 봤어요
나이가 먹을수록 사는 게 자꾸 힘에 겨워진다고
술에 취한 아버지와 다투시던 날 잠드신 줄 알았었는데
불이 꺼진 부엌에서 나는 봤어요 혼자 울고 계신 당신을
알아요 내 앞에선 뭐든지 할 수 있는 강한 분인걸
느껴요 하지만 당신도 마음 약한 여자라는걸
알아요 내 앞에선 뭐든지 할수 있는 강한 분인걸
느껴요 하지만 당신도 마음 약한 여자라는걸
나나나나나나~~~~~~
알아요 당신 맘을 모두 다 이해해요
믿어요 아름다운 당신을 사랑해요
이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당신
당신 모습 닮아 갈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