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너의 시간에 인생영화가 켜켜이 스며들 때
“시우야, 우리 집에 영화관 생겼다. 보여줄까?”
오랜만에 이웃집에 놀러 갔더니 시우의 동갑내기 친구가 안방 영화관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방방 뛰며 말했다. 신이 나서 우르르 몰려가는 아이의 뒤를 따라 아이 엄마는 팝콘과 주스를 받친 쟁반을 들고 안방에 따라 들어갔다. 나는 그들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너희 영화 한 편 같이 봐 볼래? 오늘의 영화는 바로 아기코끼리 <덤보>야. 어때? 시우랑 나경이 영화 보는 거 괜찮아?”
“시우랑 나경인 여태 한 번도 극장판 만화영화 본 적 없는데 괜찮을까요? 한 시간 반 못 버틸 것 같은데.”
만화영화는 아직 무리일 것이라는 나의 노파심은 보기 좋게 틀렸다. 그날을 시작으로 우리 집 아이들은 덤보를 사랑하게 되었고, 이십 분짜리 에피소드보다 상영시간 구십 분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을 더 즐겨 보게 되었다.
“잭! 잭!”
조각처럼 아름다운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차디찬 얼음물 속으로 사라진다. 판자에 누워 심연 깊은 곳으로 사라지는 잭을 보며 외치는 케이트 윈슬렛에 감정을 담아 펑펑 울던 나는 열두 살이었다. 15세 관람가였던 그 영화를 엄마는 꼭 영화관에서 봐야 한다며 상영작 포스터를 그림 간판으로 올리는 오래된 극장에 데리고 갔다. 엄마는 옳았다. 비록 허름한 극장일지라도 영화관에서 볼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웅장함이 타이타닉과 결합하여 내게는 인상적인 첫 인생영화가 되었다. <타이타닉>을 본 나는 그 달 용돈을 모아 음반 가게에 가서 생전 처음으로 영화 OST 음반을 샀다. 그 음반은 정말 신세계였다. 처음에는 잭과 로즈가 타이타닉 뱃머리에서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에서 흐르는 셀린 디온의 [My Heart Will Go On]만 들었다. 백 번쯤 들었을까. 그제야 나는 스물여덟 개의 트랙에는 어떤 음악이 들었을지 비로소 궁금해졌다. 나는 전축 가까이에 있던 거실 서랍장을 열어 귀마개처럼 생긴 검정 헤드셋을 찾아 엄마의 고급스러운 오디오 전축에 꽂았다. 지금도 그 푹신한 헤드셋에서 흘러나온 타이타닉 OST 1번 트랙의 몽환적인 선율을 잊지 못한다. 나는 이전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음악 감상법에 귀가 번쩍 뜨였다. 워크맨이나 아하프리의 파란색 스피커로 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음악은 내 양 귀를 폭 감싼 채 귓속으로 조금도 새는 것 없이 콸콸 들어왔다. 나는 거실에 벌러덩 누워 처음으로 음반을 다 들었다. 노인이 된 로즈의 푸른 눈 속으로 빠져들어 침몰한 타이타닉을 추억하는 장면, 처녀항을 앞둔 항구의 설레는 풍경, 잭이 로즈의 그림을 그려주는 장면, 함께 3등실 아이리쉬 파티를 즐기는 장면, 빙산에 부딪힌 이후로 타이타닉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급박히 움직이는 사람들 모습, 선상에서 마지막 연주를 하는 오케스트라. 영화의 장면 장면이 노래를 듣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지금이야 클릭 한 번, 드래그 몇 번으로 보고 싶은 장면을 보고 또 보고 몇 번이고 할 수 있는 내 방 안의 영화관 시대가 열렸지만, 그때만 하여도 다시 보고 싶으면 영화관에 갈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종영이라도 하였다면 그마저도 불가능한 영화관 시대였다. 그러나 그러한 갈증을 조금이라도 삭혀줄 수 있는 방편이 영화 음반이었다는 것을 난 타이타닉을 통해 배웠다. 그 이후로 나는 감명 깊게 본 영화를 만날 때면 영화관을 나와 음반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헤드셋을 끼고 전축 앞에 벌러덩 누워 눈을 감고 귀로 다시 영화를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엄마는 나의 고상한 취미를 소리 없이 부추겼던 것도 같다. 고등학생 때는 전축 옆에 근사한 CD 진열장을 사주어 내가 초등학교 때부터 하나둘 사 모은 음반을 보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나는 진열장을 한 줄을 영화 OST 음반에 내주었다. 그 줄에 음반이 하나씩 채워진다는 건 내 마음속 영화관에도 나만의 명화가 채워진다는 걸 뜻했다.
영화관이 친구와의 데이트이자 가족의 휴가, 학교 소풍이던 시절이었다. 전철 비를 지급해서라도 굳이 인천 문화회관 역에 내려 대형 영화관이었던 CGV를 찾아 조금 더 큰 스크린으로 <반지의 제왕>을 봤다. 호감이 있던 남자 친구와 교복을 입고 <엽기적인 그녀>를 봤고, 반창회를 하던 어느 날에는 열댓 명이 우르르 몰려 가 <조폭마누라>와 <신라의 달밤>을 보며 깔깔대며 웃었고, 여름에는 <주온>을 보고 오금이 저렸다. 나는 팬시점에서 티켓북을 샀다. 티켓북은 매주 채워지는 영화표 옆에 함께 보았던 이의 이름을 쓰고, 나만의 별점을 매기는 나의 또 다른 일기장이나 다름없었다.
***
나경아, 곰곰이 생각해보면 엄마와 오빠 손을 잡고 거의 울다시피 하며 보았던 <영구와 땡칠이의 홍콩할매 귀신>이었던 것 같아. 하지만 그건 결코 인생영화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없는 날카롭고 강렬한 기억을 준 영상물에 불과하지만. 마음에 남는 영화나 드라마를 만나면 그것을 외장 하드에 하나둘 모아놓거나 DVD로 소장할 수 있는 시대라니 참 놀라워. 엄마가 어렸을 적에 토요일 밤이면 지나간 영화 중 엄선하여 방영해주는 ‘토요명화’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 ‘토요명화’에서 키다리 할머니가 학창 시절 감명 깊게 본 영화가 나오는 날이면 할머니는 예외 없이 텔레비전 앞에서 그 시절 소녀의 표정으로 입을 헤 벌리고 영화를 보셨더랬지. 그런데 얼마 전 네 오빠와 <타이타닉>을 보는 엄마가 그 모습을 하고 있지 뭐니. 좋은 영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세상을 담고 있으며, 그 영화를 보았던 나의 이야기도 함께 간직하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 같아.
엄마는 한국의 남자 배우 중 조승우를 참 좋아해.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미소는 소년 같은 구석이 있어. 엄마가 그 배우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클래식>이란 영화인데 지금 보아도 참 설레고 가슴이 아프더구나. 그날도 마찬가지로 엄마는 영화관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음반 가게에 들러 영화 음반을 샀지. 노란색 우산을 쓴 여주인공의 해사한 미소가 어찌나 사랑스럽고 설렜는지 포스터를 받지 못해 애석할 따름이었어. 이 영화의 주제가인 자전거 탄 풍경의 [너에게 난 나에게 넌]도 물론 정말 좋지만, 엄마는 그보다 이 노래가 어쩐지 더 기억에 남더라. 마치 좋아하는 가수의 앨범에서도 타이틀곡보다 더 마음에 드는 곡이 따로 있을 때처럼.
Track 11.
한성민 [사랑하면 할수록]
노을 지는 언덕 너머 그대 날 바라보고 있죠
차마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을 이미 알고 있었나요
왠지 모르게 우리는 우연처럼 지내왔지만
무지개문 지나 천국에 가도 나의 마음 변함없죠
사랑하면 할수록 그대 그리워 가슴 아파도
이것만을 믿어요 끝이 아니란 걸
이제야 난 깨달았죠 사랑은 숨길 수 없음을
우연처럼 쉽게 다가온 그대 이젠 운명이 된 거죠
사랑하면 할수록 멀어짐이 두렵기만 해도
이것만을 믿어요 끝이 아니란 걸
끝이 아니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