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잠시 남의 꿈에 편승할 때
“엄마, 왜 색종이는 다 네모 모양이야? 동그라미 모양은 없어?”
요즘 다시 색종이 접기에 심취한 아들이 색종이 꾸러미에서 마음에 드는 색종이를 찾으며 묻는다.
“글쎄. 동그란 색종이로는 접을 수 있는 게 많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닐까?”
아이들의 의구심은 어른은 범접할 수 없는 영역까지 닿아있는 것 같다.
“힝, 나는 동그란 색종이로 접어보고 싶은데.”
나는 시우가 꺼내 들은 색종이를 받아 반을 접고, 또다시 반을 접은 후 연필로 왼쪽 위 꼭짓점에서 오른쪽 아래 꼭짓점으로 이어지는 곡선을 그렸다.
“자르는 건 내가 자를래! 엄마, 최고.”
아들은 금세 자신의 가위를 가져와 곡선을 따라 자른 색종이를 펼치더니 신난 표정으로 말한다. 나는 옆에 가만히 앉아 아들이 동그란 색종이로 무엇을 접을지 기다려 본다.
또 다시 백수가 되었지만, 스물다섯의 그때와는 달랐다. 흠뻑은 아니었지만, 어슴푸레 믿는 구석이 있었다.
“민아야, 내가 나오라고 하면 언제든지 나와서 나한테 와줘. 내가 더 좋은 조건으로 너 일하는 회사 차릴게.”
사수와 나는 전 직장에서 단 두 달을 같이 일했다. 그리고 해가 바뀌면서 회사를 나간 사수는 이따금 가산디지털 투다리에서 나와 대리석을 만났다. 그는 창업을 준비했고, 사업자등록을 마치면 나와 대리석에게 출판부 일을 맡길 생각이었다. 어쩌면 나는 믿는 구석이 있었기에 그렇게 맹랑하게 굴었는지 모르겠다.
전 직장을 전원 퇴사한 출판부 삼인방은 발산역 옥탑방에 작은 기획사를 차렸다. 대표는 사수 혼자였지만, 발산역 부동산을 전전하는 것부터 함께 하였다. 부동산 문을 열고 소파에 앉아 건강음료를 마시며 발산역 지도를 봤다. 낯선 동네 지도와 서랍에서 꺼내온 열쇠, 임대차계약서 이 모든 것들이 신기했다. 대학 시절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의 자취방을 처음 놀러 갔을 때의 기시감이 들었다. 나는 경험해보지 못한 ‘집’의 세계에 이미 도장을 찍고, 계약해본 그들은 온실 속 화초처럼 부모님 보살핌을 벗어나 보지 못한 나보다 한 발짝 어른의 세계에 다가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사수를 따라 임대차계약서에 도장 찍을 때도 옆에서 인주통을 잡았고, 중고사무 집기 상점에서 내가 쓸 책상과 의자, 옷걸이, 진열장, 정수기와 선풍기, 난로 등도 함께 골랐다. 나는 투자금 하나 없이 회사가 차려지는 과정을 옆에서 함께 하였다.
“회사 이름으로 ‘드림포트(Dream Port)’ 어때? 포트가 컴퓨터 중앙과 주변 기기를 접속하는 뜻도 되고, 항구란 의미도 있잖아. 그러니까 꿈이 주변으로 퍼져 나가는 의미도 되고, 꿈이 정박하는 의미도 되고. 강 기자 의견은 어때?”
사수는 이미 모든 것을 계획해 놓았다. 조금씩 어설프고 부족해 보였던 사무실과 그 안을 채우는 물건들을 보며 이 회사가 정말 잘 굴러갈까 걱정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회사 이름을 말하는 그의 표정에서 나는 무한한 신뢰를 느꼈다.
“명함 파면 너는 수석기자라고 써줄게. 대신 네가 앞으로 매달 발행할 음식 잡지 이름을 생각해 봐. 이건 네 미션이야.”
그리하여 우리의 책 이름은 ‘하니브로(hanibro)’로 정해졌다. 당연히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고, 사수와 매일 술상을 가운데 두고 고심하여 만든 이름이었다. ‘한입으로’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한 순우리말로, 수많은 조리사가 서로 다른 분야의 요리를 만드나 요리를 향한 열정과 사랑은 한마음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뜻으로 잡지명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니 뭔가 그럴싸해 보였다.
옥탑방 사무실은 생각보다 기후 조건에 취약했다. 회사를 막 차렸던 여름에는 선풍기로 해결할 수 없는 무더움에 그 건물 일층 커피숍에서 작업했다. 그리고 겨울에는 손끝 발끝이 너무 시려 조끼에 목도리를 두르고 담요를 뒤집어쓴 채 등산 장갑을 끼고 기사를 썼다. 사수는 창업 초기 내게 이전 회사보다 두 배 높은 월급과 잡지 내 마음껏 쓸 수 있는 지면을 약속했다. 그 구두약속을 철석같이 믿고 함께 다서 달을 일했다. 그러나 사수는 내게 후자는 지켜줬지만, 전자를 마저 지켜주지 못하고 잠적했다. 복도에 애써 만든 잡지가 드높이 쌓였고, 정기구독자에게 사과의 전화를 돌렸다. 그렇게 꿈을 가득 실은 배는 더 넓은 곳으로의 항해를 이루지 못하고 처참히 가라앉았다.
사수가 지켜주지 못한 몇 달 치 월급은 내 인생 수업료라고 생각하니 크게 생각나지 않았다. 물론 내 노동의 대가였지만, 나는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창업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했다. 그때는 그의 나이는 마흔이었고, 세상 일에 정신을 빼앗겨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는 나이였기에 실패도 없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의 그가 실패하고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며 삶이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리고 마음이 아팠다. 회사가 망해서 슬펐고, 그가 무책임하게 독단적으로 끝을 맺어서 화가 났다. 그리고 월급을 주지 못한다는 미안함과 책임감에 연락을 두절한 부분에서는 크게 실망하였다.
“야, 넌 뭐가 그렇게 심각해. 내가 심각하지. 웃어, 짜샤.”
그러나 이 모든 괴로움을 겪을 때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사진을 찍는 대리석이 있어 고마웠다. 혼자만 배신당한 게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옥탑방 사무실은 그해 겨울 침몰하였다. 그리고 나는 두 번의 직장생활을 끝내고 잠시 프리랜서의 새끼작가로 일하며 윤문 작업에 참여했다. 기사와는 또 다른 책이 되는 글을 만지는 작업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회사와 일은 모두 과거가 되었지만, 세 일터에서 만난 인연 대부분과 지금도 연을 이어나가고 있다. 심지어 도망갔던 사수와도. 그의 제안이 아니었다면 내 인생에 ‘창업’이란 단어는 아마 평생 없거나 늘그막에 나오지 않을까 싶다. 그의 꿈에 편승하여 젊은 시절 자그마한 꿈의 항구를 품었다는 건 값진 경험이었고, 어린 나를 귀히 여겨 수석기자로 만들어준 건 내 사수가 처음이었기에.
나는 그가 밉지 않다.
***
나경아, 어린이의 눈에는 모든 나이 든 사람이 어른으로 보일 때가 있지. 그리고 어른이 하는 행동은 무조건 옳고 틀림이 없다고 무작정 믿고 따라야 하는 순간도 많고. 근데 엄마가 어른이 되고 보니 한 해 한 해 떠먹여 지는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더라. 그 한 숟가락에 얹어지는 시간 속에서 얼마나 치열히 자신의 삶을 고민했는지 여부가 중요하다는 것을 이십 대에도 엄마는 몰랐어. 그런데 각자의 영역에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 이들의 인터뷰를 거듭할수록 그냥 나이 먹은 사람과 어른이 구분되더구나. 그런 의미에서 엄마도 아직 어른이 덜되었다는 걸 고백할게. 그렇지만 이제 남에게 편승한다거나 누군가의 노력에 무임승차를 하기보다 나 스스로 나의 꿈을 향해 운전해보려고 해. 그러나 이만한 내공과 힘이 생기려면 어릴 때는 부지런히 나를 탐색하고, 남을 모방하고, 성공한 이들의 삶을 관찰하며 나의 꿈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만드는 시간을 오랫동안 가져야 할 것 같다. 그 시간이 한 숟갈, 두 숟갈 쌓이면 너는 어른이 되어있을 거야.
딸, 이 세상에 아까운 것은 하나도 없어. 특히나 너처럼 몸과 마음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시기에는 모든 경험이 어떻게든 내게 모두 흡수될 거야. 실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엄마도 마찬가지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겪고 있기에 마찬가지이고. 엄마가 창업한다고 사수를 따라나섰을 때 모두가 곱지 않은 시선으로 염려를 표했어. 아니나 다를까 월급도 못 받고 회사가 없어졌을 때는 다들 ‘그럼 그렇지’하는 생각이었지. 그러나 지금 곱씹어보면 첫 직장만큼이나 옥탑방 사무실이 나를 성장시켰다고 생각해. 네가 터무니없는 기류에 선뜻 편승하게 될 때 이 노래를 들어 봐. 네모난 것의 네 귀퉁이가 마모되면 결국 둥근 것이 되잖니!
Track 39.
W.H.I.T.E [네모의 꿈] 작사·작곡 유영석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 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 걸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네모난 아버지의 지갑엔 네모난 지폐
네모난 팸플릿에 그려진 네모난 학원
네모난 마루에 걸려 있는
네모난 액자와 네모난 명함의 이름들
네모난 스피커 위에 놓인 네모난 테이프
네모난 책장에 꽂혀 있는 네모난 사전
네모난 서랍 속에 쌓여 있는 네모난 편지
이젠 네모 같은 추억들
네모난 태극기 하늘 높이 펄럭이고
네모난 잡지에 그려진 이달의 운수는
희망 없는 나에게 그나마의 기쁨인가 봐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