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네가 웨딩드레스를 입을 때
“엄마, 나는 누구랑 결혼해?”
아들이 대뜸 내게 묻는다.
“결혼?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해야지. 이다음에 시우가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랑.”
“그래? 그럼 어른 되어서 엄마랑 결혼할래. 엄마 나랑 결혼하자.”
아이의 순수한 고백에 나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팔불출이 분명하다.
“그러면 좋겠지만, 엄마는 시우의 엄마라서 결혼을 할 수가 없어. 그리고 엄마는 이미 아빠랑 결혼했는걸. 결혼해서 너와 나경의 엄마, 아빠가 되었잖아.”
남편도 하지 않은 프러포즈를 일곱 살 아들이 해준다.
“엄마, 나는 상준오빠랑 결혼할래. 나는 상준오빠 좋아하니까.”
뜬금없는 딸의 고백에 나는 흠칫한다.
“그래, 그 마음이 어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으면 생각해 보자. 상준오빠네 일단 사돈은 합격이야!”
“그럼 나도 아진이랑 결혼할래. 아진이가 나 좋아하잖아!”
나는 시우의 절친한 친구네 가족과 겹사돈이 되는 상상을 하니 웃음이 나왔다.
예카테린부르크를 다녀온 후 내가 러시아를 잊고 사 년을 이러저러한 글과 사투를 벌이는 동안 나의 오군은 더욱 깊게 러시아를 공부하였다. 그는 귀국하여 일 년 후 바로 대학을 졸업하여 러시아 CIS 학과 석사 과정을 밟았다. 그는 나처럼 무모한 도전이나 계획에 없는 변수에 몸을 던지는 타입이 아니었다. 그는 정해진 커리큘럼에 자신을 넣어 착실히 이수하였고, 자신의 미래를 향해 내실을 다져 점점 선명해지는 그림에 자신의 모습을 덧칠했다.
“나는 내 전공을 살려서 취업하고 싶어. 민아야, 만약 내가 러시아에 취업하면 같이 갈래?”
그때는 몰랐다. 이게 프러포즈의 멋대가리 없는 변형 문장이라는 것을. 그것도 좁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햄버거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때 나는 문학 치료 석사과정과 교육대학원에 대해 고민하던 시기였다. 만약 내가 또 다른 학업을 이어 간다면, 그와의 동행을 위해 나는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할 뿐더러 그 학업을 마치고 내가 펼치고자 하는 삶은 러시아에서 실현할 수 없기에 고민했다. 오군을 통해 러시아에 다시 간다면 그건 그뿐만 아니라 내게도 주어지는 새로운 길이었다. 그는 이미 모스크바에서의 직장생활을 마음에 굳힌 상태였다. 나는 나의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아니라 그로 인해 결정되어지는 인생길이 썩 유쾌하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일 년을 먼저 모스크바에 가서 신입사원 생활을 보낸 후 결혼식을 올리고 나를 데려간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일 년의 장거리 연애와 결혼 후 타국살이가 예정된 것이었다.
“우리 잠시 시간을 갖자. 헤어지잔 게 아니고 나도 생각이 필요해.”
나는 우리 동네 주차장에서 그에게 야멸차게 말한 후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오군과 러시아는 내게 같은 이름이었다. 그를 몰랐던 나는 뭐라고 콕 집어서 설명할 수 있는 이유도 찾지 못한 채 고집스럽게 러시아를 갈망했고, 그 한 번의 알 수 없는 끌림으로 가게 된 러시아에서 오군을 만났다. 친구들은 우스갯소리로 사랑을 공부하러 러시아에 갔느냐고들 말했고, 돌아와서도 ‘러시아’라는 단어를 만나면 나는 설렜고, 그곳에 두고 온 무언가를 그리워했다. 그와 단절된 시간 속에서 나는 생각보다 더 그에게 익숙해졌고, 많은 것을 의지했으며, 함께하는 모든 것이 가족처럼 당연한 사이가 이미 되어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가 홀로 러시아로 떠나 나와 평생 안 보고 살 사람이 되는 건 내가 그와 모든 것을 이곳에 내려두고 러시아로 떠나는 것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오군 때문에 러시아에 가게 되었어.’라는 말 대신 ‘오군 덕분에 러시아에 다시 가게 되었어.’라는 말을 하며 함께 웃으며 떠나기로 나의 마음을 고쳐먹었다.
결혼준비와 함께 한국과의 이별을 준비했다. 디자이너가 된 단짝 친구와 며칠에 걸쳐 청첩장을 함께 만들었다. 한복을 입은 마트료시카를 생각하고 그려낸 건 모두 친구의 능력이었다. 나는 친구에게 딱 한 가지, 청첩장 한 면을 편지지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들어준 청첩장은 정말이지 내 마음에 꼭 들었고, 우리는 직접 칼집을 내어 그 사이에 흰 공단 끈을 넣어 리본을 묶었다. 나는 결혼식 전까지 매일 나의 하객에게 편지를 썼다. 나는 아름다운 그날을 고대하는 새신부보다 기약을 알 수 없는 유학길에 오르는 스물일곱 늦깎이 학생이 자신의 뻑쩍지근한 환송회에 모든 친구를 초대하는 느낌으로 결혼을 준비했다. 결혼식 주례는 오군의 은사님이었다. 결혼 전에 오군과 함께 그의 은사님께 인사를 드렸다. 은사님은 신랑, 신부 소개와 둘의 결혼 이야기를 간략히 적어 자신의 이메일로 보내라는 숙제를 내주셨다.
매서운 추위가 몰아닥친 스물여덟의 일월. 나는 겨울 공주가 되었다. 그의 은사님은 주례사 첫마디에 청첩장을 펼쳐 팔백여 명의 하객 앞에서 내가 쓴 청첩장 문구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그는 이것만큼 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잘 풀어낸 게 없다고 칭찬하였다. 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축가는 나의 오래된 친구 둘이 불러줬다. 첫 곡은 중학생 때부터 성악가 조수미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던 여자친구가 불러준 Lea Salonga의 <Two words>였다. 레아 살롱가처럼 자신의 결혼식에 남편에게 불러주고 싶은 축가라며 그녀가 선곡한 축가는 참으로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곡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곡은 스무 살 한강에서 처음 함께 소주를 마시기 시작하여 늘 나의 깊은 술친구가 되어준 노래방 집 아들이 열창하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석현은 노래방에 가면 늘 임창정 노래를 빼먹지 않고 불렀다. 고백하건대 나는 열두 살 때부터 빠빠라기가 된 임창정 골수팬이다. 고로 두 번째 축가는 내가 소녀일 적부터 꿈꿨던 결혼식 축가였다.
나의 결혼식은 빠짐없이 감동이었고, 모든 눈물이었다.
러시아에서 소중한 인연을 시작한 저희 두 사람
함께 맞는 여섯 번째 겨울, 부부의 결실을 맺으려 합니다.
사랑, 건강, 행복, 존경, 미소, 기쁨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를 그러모아 다시금 러시아로 향합니다.
레핀처럼 서로의 얼굴을 마음속에 그리겠습니다.
차이콥스키처럼 삶의 아픔을 다독이는 감동의 선율을 연주하겠습니다.
푸시킨처럼 깊고 넓은 사랑의 시를 읊겠습니다.
톨스토이처럼 진중한 삶의 이야기를 함께 써내려 가겠습니다.
***
나경아, 너는 어떤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을까. 만약 엄마가 꼭 입어보고 싶었던 타입의 드레스를 네가 고른다면 엄마는 드레스를 입은 네가 커튼을 열고 나올 때까지 마치 분만실에서 너를 처음 만나던 순간처럼 네 모습을 궁금해할 것 같아. 엄마는 네가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산다면 바랄 게 없지만, 다만 네가 눈 파란 사람이 아닌 한국인과 함께 살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이 있어. 엄마는 안타깝게도 러시아어도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가엾은 중생이라서 사위와 원활한 소통을 하는 장모가 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품게 되었단다. 너는 나와 달리 이중언어자로 커 나갈 것이고, 너는 외국인 친구와 학창시절을 보내게 될 터이니 마음을 나누는 데 있어 국경이 사라지겠지. 그런 네게는 사랑도 꼭 한국인과의 감정으로 국한된 것이 아닐 것이라는 걸 생각하니 엄마는 우스갯소리가 아닌, 진심으로 저러한 소망을 마음 한 편 키우게 되었단다. 그러나 네가 외국인과 진정한 사랑의 서약을 하겠다면 나는 기꺼이 나의 소망을 꺾고 너의 앞날을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 줄거야.
딸아, 네 결혼식은 어떤 빛깔로 가슴에 새겨질까.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고, 햇살이 예쁘게 부서지는 평온한 계절에 모두의 축복을 받으며 사랑하는 남자와 꽃길을 걸어나가길 바랄게. 엄마는 그날 밤 네 아빠와 함께 침대에 누워 오래전 우리의 결혼식을 곱씹을 것 같구나. 그리고 이 노래를 불러 달라고 한 번 앙탈을 부려봐야겠어. 그러고 보니 프러포즈도 안 한 네 아빠가 또다시 괘씸하네?
딸! 사위한테 무조건 프러포즈는 받아내야 해, 알았지? 만약 프러포즈 없이 내 딸 가져가면 장모가 평생 잔소리할 거라고 전해줘.
Track 40.
임창정 [결혼해줘] 작사·작곡 김형석
그럴지도 몰라 널 만나기 위해
많은 날들을 아픔 속에서 내 눈물 속에서
보내야만 했었었는지
왜 웃기만 하니 뭐라고 말해봐
너도 나처럼 기다렸다고 날 사랑한다고
다시 슬픈 이별은 없다고
혼자이면 언제나 끝도 없는 그리움이 밀려와
무엇하나 시작할 수 없던 날들
내 곁에 머물러 주렴 내가 다시 꿈을 꿀 수 있게
그래도 가끔은 그 언젠가처럼
다시 이별이 찾아올까 봐 난 두렵기도 해
슬픈 내 눈빛 이해하겠니
이것만 기억해줘 너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걸
많은 시간 지나 모두 변한대도 지금 이 설레임들을
아름답게 간직하는 거야
사랑해 지금처럼 영원히 환한 네 미소 이제 내가 지켜줄게
혼자이면 언제나 끝도 없는 그리움이 밀려와
무엇하나 시작할 수 없던 날들
너를 만난 이후 다시 꿈꿀 수 있어
이것만 기억해줘
너의 마지막 사랑이라는 걸
많은 시간 지나 모두 변한데도 지금 이 설레임들을
아름답게 간직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