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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Jul 31. 2020

할머니의 커피잔

대개 오래된 것들은 자신의 모습에서 연력을 내뿜는다. 투박하지만 단단하고 묵직해서 34년을 견딘 엄마의 혼수가구라던가, 낡고 헤진 모습에서도 밥맛은 기가 막히는 조지루시의 소형 밥솥이라던가. 늙고 꼬부라져도 언제나 나를 품어주는 나의 외할머니 류옥련 씨라던가. 


옥련씨는 10년 전 남편을 잃었다. 암이었다. 병수발을 들 새도 없이 3개월 만에 가버렸다. 갑자기 혼자가 된 엄마를 걱정하는 딸이 본인의 딸을 엄마에게 보냈다. 그 딸이 대학교 3학년이었던 나였다. 그렇게 난 옥련씨의 룸메이트가 됐다. 옥련씨는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내가 늦잠을 자도 더 자라고 했고 술을 먹고 들어와도 따뜻한 꿀물을 타주었다. 남자친구가 나를 뻥 차버린 날에는 엄마나 친구가 아니라 옥련씨의 품에서 울었다. 옥련씨는 무조건 내 편이었다. 엄마보다 더 좋았다. 


옥련씨는 깔끔한 성격이었는데 그 성정이 살림에 고대로 묻어났다. 언제 누구와 어떻게 가도 옥련씨의 집은 빤딱빤딱했다. 옥련씨는 종종 나에게 물었다. “내한테서 무슨 냄새 안 나나?” 그럼 나는 옥련씨의 몸에 코를 갖다대고 킁킁했다. “아무 냄새 안 나는데” 매일 샤워를 하고 로션을 바르고 양귀비 헤어 에센스로 머리를 정돈하는 옥련씨의 몸에서는 냄새가 날 틈이 없었다. 


졸업 후 첫 직장을 구해 옥련씨의 집을 떠나게 된 날, 옥련씨는 그릇 몇 개 를 챙겨주었다. 접시와 국그릇과 샐러드보올과 커피잔. 옥련씨의 조카가 미국 그릇 방판 일을 하면서 자의 반 타의 반 팔아주게 되었다는 파이렉스 블루밴드 그릇 세트였다. 찬장에만 고이 모셔두고 잔칫날에만 꺼내 손님을 대접했다는, 우윳빛 비치는 하얀색에 청명한 파란색 라인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예쁜 그릇이었다. “혼자 살아도 밥은 잘 챙겨묵어야 된다. 아무데서나 반찬통 그대로 먹으면 안 되고 깔끔하게 덜어 먹고. 커피도 잔받침에 받쳐서 먹고 그래야 된다.” 엄마도 1인용 그릇 세트를 새로 사주었지만 자취 생활 중 손이 가는 건 옥련씨가 준 오래된 그릇이었다. 


여하튼 그녀의 당부대로 밥은 잘 챙겨 먹었다. 깔끔하게 먹진 못했지만. 라면을 끓여 냄비째 먹었고 김치도 통에 담아놓은 채 몇 날 며칠을 먹었다. 그래도 꼭 하나 지킨 게 있다면 커피였다. 커피는 우아하게 마셨다. 출근 전 여유가 있는 아침이면 동그랗고 하얀 커피잔에 네스프레소를 한 잔 내리고 우유를 조금 부어 잔받침에 받쳐 홀짝홀짝 마셨다. 그런 날엔 추운 원룸촌을 나서는 아침 출근길이 따뜻했다. 그런 날만큼은 우당당탕 신입사원도 힘이 났다. 


얼마 전 아예 날을 잡고 옥련씨의 집으로 향했다. 남편까지 대동해 남아있는 그릇 세트를 몽땅 가져왔다. 옥련씨는 본인이 죽게 되면 어차피 다 버리게 될 텐데 내가 가져가 줘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고마운 사람은 정작 나인데 이거 치워주는 거라며 괜히 생색을 냈다. 남편은 내가 옥련씨에게 매번 받기만 해서 버릇이 드럽게 들었다고 했다. 신문지로 꽁꽁 싸매 캐리어 두 개를 꽉 채운 그릇들을 식탁에 펼쳐보았다. 커피잔 세트도 3개가 더 있었다. 30년 이 넘는 세월 동안 찬장에서 깨끗하게 보관된 이 커피잔이 옥련씨를 닮았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시 그때처럼 커피를 내려보았다. 못돼먹은 나는 오늘도 나 혼자 우아하게 옥련씨가 준 커피잔에 커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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