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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디짱 Jul 31. 2020

깨끝한 마음

"할아버지 편안하게 영면하셨다."


아빠아빠의 아빠 죽음을 알렸다. 간결한 카톡이었다. 할아버지의 나이는 91. 뇌출혈과 뇌졸중을 여러번 거치며  후유증으로  6년을 누워계셨다. 진주 경상대병원, 사천의 자연요양원, 김해 보훈병원, 시내의 빌딩식 요양원, 동아대병원  누워있는 삶과 병에도 경중이 있어 몇번이고 자의에 상관없이 이사를 다니셨다.


계란후라이를 먹여 키운 큰아들은 응당 짜기라도 한 듯 효자노릇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고, 그 옆에서 큰형의 반찬을 넘보다 숟가락으로 맞은 작은아들인 우리 아빠는 또 응당 둘째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아버지를 극진히 모셨다.


처음엔 왼쪽의 마비, 이후 전신마비, 표정도 움직일 수 없었던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보여지는 모습만 정적이셨지 뇌는 계속해 살아있었기때문에 자신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지난 6년이 내가 헤아릴 수 없을만큼 힘드셨을것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찾아뵌건 작년 시내의 요양원이었는데 나를 보고도 좋다 싫다 표정없이 허공을 바라보셨다. 그런 허공을 바라보는 할아버지가 그 방에만 8명 이었다. 심지어 그런 할아버지 8명을 진찰하는 의사조차 할아버지였다.


장례식은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밤, 2일차, 마지막날 새벽 발인으로 이어졌다. 생전에 할아버지가 끔찍해하시던

큰아들과 그의 아들인 이 집안의 장손과 큰며느리와 큰손녀딸과 그 집에 새로 시집 온 장손며느리는 서울에 산다는 핑계로 2일차 아침에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 가족 말고는 모두 서울에서 밤차를 타고 헐레벌떡 내려왔다.


죽어서는 큰아들 자신이 모시고 싶다해 대전 현충원이 아닌 서울 현충원에 할아버지를 모셨다. 서울 현충원은 비석묘도 꽉 차 유골함 납골당 형식으로 할아버지를 조그마한 도자기에 넣어 모셨다. 병원에 있을때조차 자신의 자식 5명이 한자리에 모인걸 본적이 없는 할아버지는 난생 처음으로, 아니 죽고 자신이 관에 누운 뒤에야 건사한 자식 5명을 불러모을 수 있었다. 죽어서는 자신이 모시고 싶다한 큰아들 덕분에, 혹은 때문에 고향 땅 함양 서상이 아닌 살면서도 몇번 가보지 못한 서울땅에 가셨다.  


화장장으로 들어가는 할아버지의 관을 붙잡고 우는 그 5명의 자식들을 보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는게 슬펐다. 아무도 정말 아무도 내 아빠 엄마를 돕지 않았다. 혼자 고군분투하며 아픈 할아버지를, 살아계신 할머니를 모시는 지금도 정말 아무도 돕지않았고, 않고 있다.


할아버지가 의지로 자신의 생을 살아가실때에 매년 새해 연하장을 손주들에게 보냈다. 나는 답장을 쓰기도, 전화로 대신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동생이 찾아본 그 연하장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깨끝한 마음으로 노력하여 성공하여라" 할하버지


나는 이제 할아버지가 보고싶을때마다 이 사진을 보려고 한다. 깨끝한 마음으로 손주들이 살아가길 바라신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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