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아기가 태어난 지 천 일이다. 천일. 울기만 하던 신생아가 이제 오만 때만 말을 다 한다. 오늘 아침에는 일어나자마자 미안하다고 한다. 왜 미안해? 어제 차에서 음악 계속 틀어달라고 떼써서 미안해~ 우와 우리 앙꼬 많이 컸네. 어제 일을 기억하고 사과까지 하고. 사과해 줘서 고마워. 다음부턴 떼쓰지 마. 응 알았어. 이런 귀염둥이를 데리고 어제는 호텔 뷔페에 갔다. 원래 우리 부부는 기념일에 초밥을 먹으러 가는데, 아기를 데리고 갈 수 있는 초밥집이 없다.
부산에는 특급호텔이 많고, 특급호텔은 모두 뷔페를 운영한다. 아기 낳기 직전에 웨스틴 조선에서 디너를 먹었었는데 만삭에다가 몸도 무거워서 조선호텔 김치만 냅다 먹고 온 기억이다. 참고로 김치 맛있다. 나는 김치를 안 먹는 편임에도 조선호텔 김치 시원해서 좋아한다. 이번에도 조선호텔을 갈까 하다가 이왕 가는 김에 제일 비싼 곳으로 가자 했다. 남편이. 성수기 피 만 원까지 붙어서 1인당 16만 원이다. 너무 비싼데? 괜찮아. 아기는 무료잖아. 1인당 10만 원 치이는 셈이지.
5시 요이땅. 제대로 된 외식을 거의 못 하다가 호사스러운 서비스와 산해진미에 기분이 좋다. 창밖으로는 피서가 절정인 해운대가 펼쳐진다. 아무리 광안리, 광안리 해도 클래식한 해운대가 최고지. 아기야. 여기서는 내가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어. 아이스크림 주세요. 음 아이스크림은 후식으로 먹고 일단 주스부터 먹어보자. 오렌지 자몽 석류주스가 있는데 제일 맘에 드는 색을 골라봐. 주황색 주세요. 볶음밥 먹을래? 네! 새우튀김 먹을래? 네! 엄마 케이크도 줘. 알았어. 과일은 멜론이랑 복숭아랑 수박 있는데 뭘 줄까? 수박 주세요. 그래. 아냐 아냐. 갖고 가는 길에 먹는 거 아냐. 자리에 앉아서 매너 있게 먹자.
그런데 정작 내가 매너가 없었다. 보기만 해도 다 먹고 싶었다. 침착해. 침착해. 차가운 음식부터 먹고 따뜻한 음식 넘어가고. 는 개뿔. 막 그냥 양갈비 먹고 스테이크 먹고 메밀마끼 먹고. 랍스터랑 새우랑 막 다 갖다 먹고. 남편은 말을 안 한다. 그저 먹는다. 누가 쫓아오니? ㅋㅋㅋㅋ 그렇게 전투적으로 먹는데 계속 외면했던 양송이스프가 눈에 아른거린다. 나는 원래 뷔페에 오면 무조건 양송이스프가 첫 그릇이다. 위를 연다. 그런데 여기는 다른걸 한 조각씩만 먹어도 16만 원 뽕을 뽑을까 말까인데 양송이스프에까지 줄 여유가 없다. 그렇다. 뽕을 뽑겠다는 의지가 양송이스프를 외면케 만들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딤섬을 가지러 갔다가 하. 안 되겠다. 맛이나 보자. 양송이스프 반의 반 국자를 그릇에 던다. 조심스레 맛본다. 휴. 미쳤네. 역시 호텔은 다르네. 양송이를 통째 갈아 크림과 적절히 배합한 뒤 트러플을 들이부은, 내가 지금까지 맛본 양송이스프와는 차원이 다른 어나더레벨. 다른걸 안 먹어도 이것만은 먹어야 하는, 먹는 순간 희열마저 느껴진 그런 양송이스프였던 것이다. 트러플을 많이 넣어도 과하고, 적게 넣으면 향만 나는데 어찌 이리 딱 맞게 넣었을꼬. 그렇게 다시 가 한 그릇, 또다시 가 한 그릇. 쌀국수와 차돌박이 짬뽕도 먹지 않고 그저 양송이스프만 세 그릇. 남편이 놀린다. 그걸 왜 계속 먹는데. 먹어봐라. 진짜. 이건 요리다.
누가 나에게 부산 시그니엘 더뷰에서 가장 맛있었던 음식을 꼽으라 한다면 주저 없이 양송이스프다. 해운대바다를 모티브로 한 쫀득한 찹쌀과 우유크림이 도라버린 케이크도 아니요, 쯔란을 찍지 않아도 피가 뚝뚝 흘러도 환상적인 굽기로 원시인처럼 먹게 되는 양갈비도 아니요, 죽순이며 전복이며 왕창 때려 넣어 불맛 가득 볶아낸 해산물중식볶음도 아니다. 그저 양송이스프다. 알고 보면 제품일까. 혹시나 그럴까. 아쉬운 한 숟갈에 입맛 쩝쩝 다시며 다음을 기약해 본다. 양송이스프. 알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