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석 달 만이다. 아기가 열이 난다. 두 돌 지나면 괜찮아요. 의사 말처럼 괜찮았던 아기다. 지난 1년간 입에 쏟아부은 항생제만 모아도 1리터는 되지 않을까. 좀 괜찮다고 방심했나. 새벽 4시 50분, 나를 따라 깬 아기가 뜨겁다. 38.5도. 엄마 엄마 하고 부르는 아기에게 챔프 빨간색을 쮸압 짜준다. 꼬옥 안아준다. 왜 하필 오늘일까. 왜 하필 지금일까. 6년 만에 떠나는 출장 날 새벽이었다.
머피의 법칙 오졌다고 되뇌며 부산역으로 향한다. 목적지는 일본 삿포로다. 그런데 왜 김해공항이 아닌 부산역인가. 주최 측은 무조건 인천 출발을 고집했다. 언성을 높여봐도 불가했다. 인천에서 출발하기 혹은 출장 불참하기. 지방민은 서럽다. 가덕 신공항이 정치 논리라며 핏대 세우지 마라. 가덕 신공항이 있었다면 인천출발을 강조했겠냐고. 이고 지고 타고 달려 오전 9시에 도착한 인천공항. 비행기 랜딩은 12시다. 4시간을 달려왔는데, 아직 출발까지 3시간이 남았고, 비행기를 타고 3시간을 더 가야 한다. 김해공항에서 2시간 10분이면 도착할 신치토세 공항, 나는 그렇게 10시간을 걸려 도착했다.
버스는 삿포로 시내 대신 노보리베츠로 향한다. 이번 출장은 나와 같은 직업을 가진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여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일정이다. 나눠준 타임라인에는 세미나, 조별미션, 개인미션 등이 빼곡하게 적혀있다. 그래. 결재도 올려야 하는데 무조건 논다고만 적을 순 없잖아. 가라로 적은 일정이겠지. 그렇게 도착해 급하게 저녁을 먹고 모인 44명. 통성명도 못 했는데 냅다 토론부터 이어진다. 오 두통. 저기요. 좀 쉽시다. AI가 내 밥줄 끊을 건 명명백백한 사실인데. 이걸 오늘 새벽에 나와 밤 9시까지 양말도 못 벗은 나에게 물어볼 일이요. 초면인 룸메에게 하소연한다. 혹시. 타이레놀? 그런데요. 이거요. 이럴 거면 그냥 광화문에서 모여서 토론해도 되는 거 아녜요?
둘째 날 아침 조식이 맛이 없다. 아, 잘못 왔네 이거. 출근 나흘 안 한다고 냅다 좋다고 왔는데 이거 보통 일 아니네. 양가 어머님 고생시키고 아기 열나고 나 혼자 뭐 한다고 여기와 있냐. 진짜 이건 순전히 조식이 맛이 없어서였다. 스크램블 에그 없는 조식이 말인가. 바싹 구운 베이컨 없는 조식이 빵구냐고. 나 조식 먹으면 그거 두 개 먹는 사람인데, 하. 오늘부터는 주최 측에서 맺어준 5명의 동료와 조별미션까지 수행해야 한다. 공짜란 없구나. 출근 안 하는 대가가 이리도 가혹하더냐. 진짜 이러려고 출장 왔나 자괴감이 들어.
그런데 슬금슬금 재미가 올라온다. 주최 측이 내어준 미션에 이토록 진심인 조원들. 나만 쓰레기인가. 대충 할 마음이었는데 이들은 아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1등은 먹어야지. 이렇게 열중해 무언가를 수행해 본 게 얼마만인가. 평균나이 40대의 직장인들이 모여 커다란 전지에 색연필로 팔빠지게 색칠을 하다니. 더 쌈빡한 아이디어를 내려고 머리를 맞대다니. 그저 월급루팡처럼 일했던 나와는 달리 숨 쉬는 매 순간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니. 나의 일, 사실은 내가 그토록 원했던 이 직업. 나는 그저 관성에 젖은 만 13년 차 직장인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3박 4일 동안 그게 아니라고, 열심히 하라고, 그래서 상도 받고 이름도 알리고 능력도 뽐내라고. 놀 궁리만 한 나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려 준다.
아기는 나흘 내내 나의 영상통화를 피했다. 엄마의 부재를 아는게지. 돌아가는 길은 더 고되다. 이 비행기에서 내리면 잽싸게 리무진을 타고 광명역에 내려 밤 9시 16분 KTX를 타야 한다. 그래야 밤 11시 45분에 부산에 도착한다. 가다가 할증이 붙는 택시를 타고 20여분을 더 가면 새액새액 아기는 잠들어있겠지. 제대로 된 자유시간도 없어 공항에서 쓸어 담은 호빵맨 굿즈들을 진열해 놔야지. 그리고 나흘 내내 목에 걸고 있던 나의 명찰도 전시해야지. 아기야. 나는 00맘이기도 하지만 소디쨩00이기도 하단다. 자주는 아니지만 한 번씩 이 엄마의 일탈을 눈감아주겠니. 호빵맨 굿즈는 원 없이 사줄게.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