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zi Oct 20. 2023

21.01.08 오늘의 풀무질

오늘 좀 느리게 걸었다해서 내일 뛴답시고 허둥대지 말자.

장사에서 가장 필요한건 체력이다. 장사는 매일의 약속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약속으로 빼곡하게 채워진 일상을 버티려면 꾸준한 체력이 필수다. 아무리 수완과 감각이 뛰어나도 '일상성'이 빠지면 한 순간을 넘기가 힘들다. 길게 보고 멀리까지 존재할 때 비로소 장사의 의미가 생긴다. 장사란게 판매하는 품목의 습성을 따라가는 면이 있다. 까페에서 커피 향이 나고, 음식점에서 그 음식의 향이 나듯 책방에선 책향이 나야한다. 어수선하고 축축한 데서는 아무도 책읽을 마음이 나지 않는다. 책을 읽기 좋은 공간을 꾸준히 유지한다는 건 아무도 안보는 곳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여야 한다는 뜻이다. 물론 아직 그게 미숙해서 시끄럽게 쿵쾅대는 중이다.


사람 마음이란게 그렇게 항상성을 유지하기가 참 어렵다. 어제 부산을 떨었으면 오늘은 차분하게 다시 마음을 잡아야 하는데, 어디 한 켠이 텁텁하다. 힘을 너무 빼서 그런지 축 처진다. 120퍼센트가 아닌 모습을 보여드리는 건 손님께도 죄송하고 장사에도 악영향이다. 하물며 평소에도 90퍼센트는 될까 싶은데, 오늘같은 날은 말해 무엇하나. 특히 삶의 시간에는 일 말고도 다른 시간들이 존재한다. 아무리 많은 시간이 일에 할애돼도, 결정적인 순간에 일에 영향을 끼치는 건 오히려 다른 시간들일 때가 많다. 어느 일에나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하루하루 벌어나가는 장사에서는 '오늘 하루 쯤'이라는 생각이 가장 치명적이다. 이런 저런 일들로 흔들리는 나를 보자니, 오늘 손님이 많이 찾지 않으신 게 다행이라고 느껴질 정도다.


마음이 혼란하고 생각이 정리가 안될 때는 더욱 일을 잡으면 안된다. 그냥 매장을 멍하게 보면서 아무 생각 안하는 게 도움이 된다. 무슨 일이 있건 책들은 자기 자리에 가만히 꽂혀있다. 책을 진열하다보면, 주변에 어떤 책이 꽂혀있느냐에 따라 해당 책이 죽을지 살지가 결정된다. 책 제목, 책등 색깔, 높이, 튀어나오는 정도까지 세세하게 모두 영향을 받는다. 재밌는게, 밑에 있어도 무난하게 살아남는 책들이 있고, 가운데 꽂혀있어도 잘못 꽂혀있으면 죽어버린다. 그래서 책을 자주 섞는데, 일하시는 지기님들도 말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하시는 경우들도 종종 있다. 이런게 우리에게 필요한 항상성이지 싶다. 눈치채지 못할 만큼 부지런하고 미세한 조율들로 새로움과 익숙함의 경계를 잘 타야 한다. 계속 내달리지도, 아예 멈추지도 않는 끝없는 산책길.


책방으로 도서계의 거상을 꿈꾸고 그런건 없다. 풀무질 들어온 계기도 그냥 이게 없어지지 않길 바랬던 거고, 지금도 마을 한 켠에 자리잡고 오래 가고 싶은 마음이 제일 크다. 책의 흐름이, 책을 통해 이어지는 사람 사이의 흐름이 끊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월이 갈수록 가늘어지는 건 부정할 수 없지만, 아직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다는 걸 안다. 그런 분들이 있기에 나도 계속 걷는다. 먼 길을 걷겠지만 같이 걸으면 덜 힘들다.


오늘 좀 느리게 걸었다해서 내일 뛴답시고 허둥대지 말자. 어쨌든 걷고 있다는 게 중요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21.01.11 오늘의 풀무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