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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라는 이름의 소설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 자서전 : 시와 진실>

by 찡따맨
괴테.jpg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괴테 자서전 : 시와 진실>, 전영애, 최민숙(옮긴이), <민음사, 2009>



괴테 자서전 : 시와 진실이란 책을 읽은 이유는 단순합니다. "괴테? 그 사람 대단한 사람이잖아!?" 정도의 짧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별 생각 없이 책장을 넘겼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넘기려고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쉽게 넘기기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받아 적을 만한 문장들이 자주 나오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한 꺼풀 벗겨지지 않은 인간은 교육되지 않는다.", "그 시절 프랑크푸르트는 두 겹의 성벽을 가진 도시였으며, 성문 사이의 공간은 새로운 존재가 자라나기 좋은 흙과도 같았다." 등등이 대표적입니다. 물론 어느 할아버지의 감상적인 어투에 지나지 않겠지만, 대단한 사람의 말이라고 하니 나름 그럴싸해 보이는 것도 사실입니다.


서평


1749년 8월 28일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세상에 나온 아이는 "반은 역사, 반은 시"로 빚어 보이겠다고 다짐합니다. 괴테가 어여든을 바라보던 나이에 착수하여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 퇴고한 <괴테 자서전 : 시와 진실>은 그 다짐의 완성본이자 자서전 장르의 지평을 새롭게 밀어 올린 실험이기도 합니다. 독자는 작가의 탄생 설화를 시작으로 하여, 프랑크푸르트의 미로 같은 목조가옥, 로마 동판화가 걸렸던 거실, 그리고 작센하우젠으로 건너가던 돌다리를 따라가며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 위에 쌓인 기억, 상상, 해석의 결정을 목격하게 됩니다. 총 20개 장, 네 부로 나뉜 이 책은 26세에 바이마르로 떠나는 순간까지의 삶을 서술합니다. 이 책의 매력은 단순 회고에 그치기 위함이 아닙니다. 자신의 성장 과정과 방향을 문학 형식으로 번역했다는 데 있습니다.


"한 꺼풀 벗겨지지 않은 인간은 교육되지 않는다." 메난드로스의 경구로 이 책이 시작합니다. 작가는 껍질을 벗기듯이 과거를 해부합니다. 하지만 그대로 내보이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 도자기 장난감을 거리로 던져 깨뜨리는 장면은 생생한 체험담에 가깝우나, 바로 뒤를 잇는 프랑크푸르트 도시 구조 묘사는 중첩되는 성문과 성채 사이에 그의 상상력이 가세한 스케치에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실제와 재현을 유연하게 점목시킨 기법에 대하여 괴테는 "우연적 사실이 아니라 본질적 진실을 위한 배치"리고 구라를 나름 그럴싸 하게 설명합니다.


그렇게 이 책을 읽을 때의 마음가짐은 "괴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가 아니라, "왜 그렇게 썼냐?"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이 책의 페이지가 무겁게 넘어가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책은 규범적인 자서전과 완전히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연대기적 배열이나 환경결정론적 해석으로 접근하지 않습니다. 자신 또한 변화무쌍한 정신적, 정서적 성장과 변형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사건보다 결과와 의미를 우선 배치하였고, 기억의 빈틈은 예술적 상상으로 채웠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질풍노도의 집단적 청춘 실험을 개인 서사의 심장부에 삽입하였습니다. 슈트라스부르크의 대학 시절, 프리데리케와의 만남, 독일 문학의 혁명을 꿈꾸던 동료들과의 논쟁은 2부에서 3부로 넘어가는 경계에서 압축적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이 장면들은 사실 이상의 밀도를 위하여 시간 순서를 재편하였고, 외부 작품 인용을 서사 안으로 끌어들여와 하나의 거대한 문학적 자화상을 완성시켰습니다. 다음, 노년기의 화자는 "젊은 날의 소망이 만년의 수확으로 돌아왔다."는 속담을 새기며, 나이 든 관찰자가 젊은 작중인물을 해석하는 이중 화법을 고안합니다. 회상 속 청년 괴테는 늘 미완의 가능성이었찌만, 노년의 해설자는 그 가능성을 문학적으로 수확하며, 날씨를 예보하듯이 과거를 들여다 봅니다.


흐미로운 대목은 4부의 돌연한 중단입니다. 60세까지 갈 예쩡이던 서술은 26세에서 멈추게 됩니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 쉴러와 어머니의 연이은 죽음, 이탈리아 기행, 프랑스 종군기 등 다른 자전적 프로젝트의 분산을 이유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텍스트 내부의 논리를 들여다 보면, 괴테는 "발전의 시기가 끝나면 내면의 갈등은 예술로 승화될 때만 의미가 있다." 라고 판단합니다. 그렇게 자서전의 좌표를 청춘기에 고정시켜, 교욱된 자아의 탄생을 선언하고 이후의 갈등들은 작품으로 대체하겠다는 미학적인 결단을 남깁니다.


고로, 이 책은 개인 서사에 갇힌 수필이라 볼 수 없습니다. 로마 그림, 알자스 풍경, 슈트라스부르크 대성당 첨탑 같은 미술사적인 상징, 7년전쟁과 프랑스혁명이라는 시대의 큰 흐름이 끊임없이 밀려들어 인간 형성의 외부 조건을 증폭시킵니다. 이는 "10년만 일찍 태어나도 전혀 다른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는 괴테의 확신을 입증해주기도 합니다.


이 책의 매력은 자기개발서가 말하지 못하는 자기 형성의 실제 과정을 보여준다는 데 있습니다. 위기를 삭제하지 않고 서사에 녹여 예술로 전환하는 방식을 통하여 독자는 과절의 기록을 성장의 촉매로 읽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과거를 재편집하여 진실을 재구성하는 괴테의 방식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기억 관리 방법과도 유사합니다. SNS 타임라인 위에 쌓여진 이미지들이 언젠가 우리에게 "고백일까, 연출일까"를 묻는 날, 이 책은 하나의 답을 제시할 것입니다. "기록을 예술적으로 다듬을 때, 개인사는 설득력을 얻고, 설득력은 또 다른 진실을 낳는다." 라는 데 있습니다.


물론 어려운 점도 있습니다. 이 책은 1,000페이지를 훌쩍 넘긴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고유명사와 라틴어 인용, 고전 교양으로 피로도를 증폭시킵니다. 하지만 그 피로도가 '교육되지 않은 껍질'을 벗기려는 서문의 요청과 호응한다는 점에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수업을 듣는 모범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듭니다. 방대한 텍스트를 헤집고 나올 때 독자는 괴테가 말한 "우리 소망은 우리 능력의 예감"이라는 문장을 간접적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고로, 이 책은 '과거 회고 = 사실 기록' 이라는 통념을 무너트리고, 기억을 의미로 조작할 때 비로소 인간 형성이 완성된다는 명제를 제시한 책입니다. 그래서 이 책은 자서전이자 장편소설이며, 역사서이자 문학서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한 인간이 시대와 맞서 자신을 발명한 맥박이 고스란히 뛰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고로 나를 제대로 이야기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 즈음은 읽을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고로, 이 책은 단순 고전으로 여길 게 아니라, 지금 자서전을 써보고 싶은 분들에게 의미 있는 책이라 생각합니다.




20250518_170112.png 5월 16일 알라딘 회원 중고가

중고가가 왜 이리 비싼지 모르겠네요. 아마 두꺼워서 그런거겠죠.

짧게 요약할까 했지만, 이 책이 품은 메시지를 담기가 어려워서 생략하려고 합니다. ㅠㅠ

( 귀찮아서 그런거 맞음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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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