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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쿠, 게임, 라이트노벨의 세계ㄷ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by 찡따맨
게임.jpg 아즈마 히로키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장이지(옮긴이) <현실문화, 2012>



게임이란 무엇인가? 그저 현실의 권태로움을 잠시 잊게 해주는, 다시 말해 손가락 몇 개 만으로 용맹한 전사 또는 우주선 조종사가 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였다. 게임을 통해 때로는 만화, 영화 속 주인공이 되어 새로운 세계에서 살아가는 듯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게임이 단순 즐길거리가 아닌 스포츠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웹툰이나 웹소설, 애니메이션에서는 게임을 단순 놀이가 아니라 존재론적 질문의 무대로 나아갔다. 갑옷을 입고 칼을 휘두르며 중세 판타지를 살아가는 캐릭터들이 게임 속에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거니와, 어떨 때에는 스포츠 경기처럼 규칙을 따지고 승부에 목숨을 걸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의 탄생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어, <게임적 리얼리즘의 탄생> 이라는 책을 읽게 되었다. 물론 내가 책 제목은 내가 상상한 내용과 달랐지만;;;;;;;;;;;;;;;;



서평



저자는 서장에서 "이야기를 떠받치던 거대한 질서가 삐걱대는 순간, 캐릭터가 독자적 생명력을 얻어 데이터베이스 속을 부유하기 시작했다." 라고 진단합니다. 이 대목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입니다. 독자는 더 이상 플롯의 완결성에 만족하지 않고 캐릭터가 지닌 속성, 뉘앙스 조합에서 흥미를 수집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소비방식을 '데이터베이스 소비'라고 부릅니다. 그 결과 등장인물은 하나의 작품 안에서만 사는 게 아니라, 미디어 믹스를 통해 끝없이 변주된다고 설명합니다. 중요한 지점은 저자가 '데이터를 소비한다.' 라는 표현 뒤에는 실존적 질문까지 추적한다는 데 있습니다. 여기서 '무수한 파편들을 편집하며 사는 삶이 인간에게 어떤 현실감을 섬사하는가?' 라는 질문이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장 이론은 전통적 사실주의와 만화, 애니메이션적 사실주의를 넘어서는 세 번째 좌표를 제시합니다. 여기서 '게임적'이라는 형용사는 화려한 CG 그래픽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플레이어가 세이브, 로드를 반복하고 규칙의 틀 안에서 세계를 실험한다는 감각. 다시 말해, 경험의 형식이 현실감을 빚어낸다는 생각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저자가 중시하는 것은 내용이 아닌, 규칙 체험의 설계입니다. 이것이 곧 플레이어 시점의 리얼리티를 이룬다고 말합니다. 가령 어드벤처 게임에서 주인공이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설정은 무심한 장치가 아니라, 한번 뿐인 삶이 사실은 여러번일 수 있다는 역설을 체험하게 만드는 철학적인 도구입니다. 플레이어는 루프를 경험할 수록 '결국 이 길은 한 번 뿐이구나.' 라는 자각을 더욱 날카롭게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2장 작품론은 <에버17>, <쓰르나리 울 적에>, <로도스도 전기> 등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봅니다. 그리고 앞서 제시한 개념을 이 작품들에 적용합니다. <에버17>의 "두 세계 뒤집기"라는 트릭은 플레이어와 캐릭터 사이에 존재하는 벽을 자각시키는 동시에 다시 봉합하는 절차를 밟습니다. 이를 통해 플레이어는 이야기 속에 완전히 들어갈 수 없다는 인식의 서늘함을 드러냅니다. <쓰라나미 울 적에>는 선택지가 없는 동인 게임이면서도 독자가 진정한 엔딩을 찾아 헤매도록 설계된 텍스트입니다. 저자는 이 작품을 게임 같은 소설 같은 게임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커뮤니케이션 지향 미디어콘텐츠 지향 미디어**의 경게를 왕복하는 고리로 해석합니다. 이러한 예시는 줄거리 요약만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규칙 체험이 빚어내는 감정 구조를 체험적으로 설명합니다.

(* 커뮤니케이션 지향 미디어란, 하나의 책, 영화, 방송편성 등에 단일한 이야기나 메시지를 담아 완성된 형태로 (위에서 아래로)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커뮤니케이션 지향 미디어란, 이야기보다 참여자를 먼저 조직하게 됩니다. 대형 온라인 게임이나 SNS처럼 플랫폼을 제공하고 그 안에서 이용자들끼리 주고받는 대화, 행동의 부산물로 복수의 작은 서사가 끊임없이 생겨납니다. 이 서사는 특정 저자나 단일 형태로 귀속되지 않으므로 유동적이며, 외부로 상품화되지 않는 한 불안정한 상태로 남습니다.)


저자가 던지는 궁극적인 논점은 "게임적 리얼리즘이 탈현실적 도피인가, 아니면 새로운 실존의 방편인가?" 라는 질문에 닿습니다. 그는 게임 세계의 리셋, 루프가 현실 회피 장치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우연과 필연의 경계가 희미해진 시대에 살아 있음을 재확인하는 돌파구가 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미소녀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여러 경로를 탐색하지만 매번 선택 책임이 자신에게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마주합니다. 이 지점에서 게임적 체험은 오히려 실존적 무게를 회복시켜 주는 장치로 변모하게 됩니다. 저자가 "루프를 거듭할 수록 생은 단 한 번이라는 사실이 반짝인다." 라고 설명하는 대목은 그가 가벼움 속의 무거움을 포착하기 위하여 얼마나 진성 오타쿠로 살아왔는지를 체감하게 합니다.


물론 이 책에도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주로 관찰과 해석에만 의존하는 구간이 많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분석 대상은 일본 서브컬쳐에만 치우처져 있습니다. 그렇다보니 서구권 게임, 웹툰, 등의 변주까지 기대한 사람에게는 다소 부족하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부족함은 하나의 미덕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발화 장소를 분명히 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실제 사례를 깊이 파고들어 이론을 길어 올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로, 이 개념이 어디에서 태어났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캐릭터, 루프, 데이터베이스라는 단어만으로 포착되지 않는 규칙 체험의 사실성을 예리하게 드러냈습니다. 대중문화 비평가에게는 서브컬쳐 분석의 청사진을, 라이트 노벨 또는 게임 시나리오 작가에게는 규칙 설계 방식, 순문학 독자에게는 가벼운 장르 뒤에 숨겨져 있는 묵직한 존재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특히 오늘날 멀티버스 영화, 모바일 게임, SNS 밈이 일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어떻게 저장하고 불러오며 재배치할 것인지 고민하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논외로 이 책은 서장에서 문제의식을 제시하고, 1장에서는 이론적 틀을 세운 다음, 2장에서는 실증 분석으로 그 틀을 입증합니다. 그리고 부록에서는 추가 사례를 통하여 층위를 보강하는 구성입니다. 각 항목은 커다란 이야기, 서사의 쇠퇴라는 공통 키워드를 중심으로 오타쿠 서브 컬처가 어떻게 캐릭터, 플레이, 루프, 메타, 서사를 자양분 삼아 현실 감각을 조직하는지 단계별로 그려내었습니다. 저도 이런 방식으로 글을 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약 3초 정도 했습니다. 물론 귀찮아서 안 쓸듯;;





이 책을 통해 들여다 본 포켓몬스터


저는 아쉽게도 이 책에서 말하는 작품들을 단 하나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포켓몬스터를 떠올려보니, 이 책과 맞닿는 지점이 꽤 보였습니다. 저자는 이야기보다 캐릭터의 속성 묶음 자체가 소비 대상이 되는 현상을 '데이터베이스 소비'라 명명하였습니다. 포켓몬스터 초대작의 151종을 시작으로 하여 매 세대마다 백마리씩 업데이트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즐기는 것은 포켓몬스터 주인공인 지우가 포켓몬 마스터라는 결말로 향하는 하나의 서사가 아니라, '포켓몬 속성', '포켓몬 기술', '포켓몬 진화'에 가까운 셈입니다. 그렇게 새 시리즈가 나올 때마다 팬들은 스토리가 아닌, '신규 타입은?', '새로운 메가, 테라스타일은?' 같은 것들을 들여다 봅니다.


아즈마가 말한 게임적 리얼리즘은 플레이어가 룰을 탐색하며, 세이브, 로드, 루프 감각을 체험하는 순간에 현실감이 생긴다고 말합니다. 포켓몬스터도 이 지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탐험, 포획, 육성, 배틀이라는 규칙이 집합 그 자체입니다. 그렇게 포켓몬마스터를 향한 무한 도전은 결말 이후에도 세게가 다시 열리는 구조를 강화시킵니다. 루프물이 죽음과 우연을 재배치하여 존재론을 되묻는다고 하였듯이, 포켓몬스터 또한 패배-재도전이 필연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한 번뿐인 승리'를 더욱 선명하게 만들어줍니다.


포켓몬스터는 이야기보다는 포켓몬 도감, 엔딩보다는 루프라는 원칙으로 살았습니다. 이는 이 책이 그린 포스트모던 이후 서사의 생존 법칙과 합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포켓몬스터는 데이터베이스를 끊임없이 팽창시키며, 규칙 체험을 현실감으로 변화하고, 커뮤니케이션 지향 미디어와 콘텐츠 지향 미디어를 왕복하면서 끝나지 않는 콘텐츠를 실현한 결정체라 볼 수 있습니다.



20250517_133907.png 5월 17일 알라딘 회원 중고가 기준

이 책의 중고가가 꽤 비싸네요. 뭐 올리는 사람 마음이겠죠. 아래는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했습니다.



서장은 큰 서사가 사라진 포스트모던 국면을 배경으로 삼으며 시작합니다. 저자는 1995년 이후 젊은 오타쿠들이 줄거리보다는 '모에', '데이터베이스 소비'에 끌렸다는 현상을 포착합니다. 이를 일시적인 유행으로 보지 않고 거대 서사의 쇠퇴라는 구조적 변화임을 강조합니다. 이야기의 힘이 약해진 사회에서 오타쿠 서브컬쳐가 그 공백을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고 있으므로, 2000년대 이후 이야기적 상상력의 방향을 읽으려면 우선 이 현장을 정밀 관찰해야 한다는 선언을 합니다.


1장 이론


1장은 사회학, 문학, 미디어의 세 축이 차례대로 배치됩니다. 먼저 라이트노벨의 급부상을 통해 포스트모던 환경이 어떻게 캐릭터 중심 소비로 전환했는지를 분석합니다. 자연주의적 리얼리즘을 계승하던 순수문학과는 다르게, 라이트노벨은 만화, 애니메이션적인 리얼리즘을 기초로 하여 현실이 아닌 2차원 기호 공간을 사실성 기반으로 삼는다는 진단이 핵심입니다.


사소설* 이후 일본 문학이 지닌 자기 고백 전통과 만화 기호론**, 반투명 서술 기법***이 결합하면서 현실의 자리가 어떻게 흔들렸는지를 문제 차원에서 추적합니다. 마지막 게임 같은 소설 개념을 들여다 보며, 소설이라는 콘턴체 지향 매체가 플레이, 루프, 세이브 같은 커뮤니케이션 지향 경험을 번역할 때 발생하는 역설을 게임적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로 명명합니다.

(* 사소설은 작가 자신의 실제 체험과 내면을 가공 없이 고백하는 일본식 소설입니다.)

(** 기호론은 독자가 글 없이도 시각 기표를 통하여 의미를 형성하는 방식입니다. 예를 들어 '커다란 땀방울 - 당황', '십자 정맥 표시 - 분노', '아지랑이 그림 - 냄새'가 만화에서 자주 그려지는 기호론입니다)

(*** 반투명 서술 기법은, 현실을 완전히 재현하지도, 완전히 차단하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기호적 허구임을 드러내면서도, 독자가 현실처럼 정서적 몰입을 하게 만드는 방식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1인칭과 3인칭 사이를 오가는 방식, 지속적 메타 발화, 캐릭터 우위 등이 있습니다.)


2장 작품론


앞서 구축한 개념을 실제 텍스트에 적용하여 검증합니다. 첫번째 환경분석 단락은 캐릭터 소설이 처한 산업, 독자 생태를 들여다 봅니다. 그리고 순수문학과의 직접 비교가 무의미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이어서 사쿠라자키 히로시의 <올 유 니즈 이즈 킬>을 예로 삼아 루프, 리셋 구조가 확률적 죽음을 어떻게 재배열하는지를 들여다 봅니다. 그렇게 죽음의 이중성이라는 논점을 뽑아내었습니다. 세이료인 류스이의 미스터리를 다룬 부분에서는 불순함이 장르 규범을 내부에서 갉아먹는 메커니즘을 탐색합니다. 미소녀게임 파트로 넘어가면, <에어>가 플레이어의 무력감을 가학, 피학 구조로 드러내며, '우리는 불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능하다.' 라는 메시지를 건넨다는 해석이 제시됩니다. 메타 미소녀 게임 부분에서는 <에버 17>, <쓰라나미 울 적에 >가 다중 엔딩과 정보 층위를 통해 플레이어 시점을 흔들어 캐릭터 세계와 플레이어 세계 사이에 놓인 고독을 드러낸다는 점이 강조됩니다.


부록


부록은 본문의 논의를 보강하는 평론, 작품 해설로 꾸려져 있습니다. 세이료인 류스이와 <에어>에 대한 장문 에세이는 오타쿠 표현이 자기기만과 규범 해체를 어떻게 동시에 수행하는지 사례로 보여줍니다. 메타 미소녀게임 항목은 플레이어 욕망이 게임 시스템 내부에서 어떻게 반전, 전시되는지를 심층적으로 다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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