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팔자를 뛰어넘는 힘은? 낭만주의적 사고와 독서
며칠 전, 엄마가 내 사주팔자를 보고 오셨는지, 전화를 걸었다.
"사주를 봤는데, 너를 처음 보자마자 '첫째보다 얘가 효자네.'라고 하시더라?"
"그런데 형이 나보다 더 자주 찾아가잖아. 나보다 형이 더 효자야."
"아니야~ 네가 선물을 더 많이 하잖아. 그리고 머리는 좋은데, 교수가 될 정도는 아니래. 그런데 45살에 우두머리가 될 거래."
"어느 우두머리인데?"
"몰라, 그걸 못 물어봤어. 내가 말을 조리 있게 못 하잖아."
중요한 부분을 놓쳐버리시다니, 아들의 장밋빛 미래에만 심취하셔서 그러신 것 같다.
"뭐.. 틀린 말은 아니지. 내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지. 그리고 45살에 우두머리가 된다면, 한 가정의 우두머리 정도에 가깝겠네."
뒤이어 나는 과거에 인터넷을 통해 봤던 사주팔자를 살펴보게 되었다. 이는 다소 부족하게 다가와 챗GPT에게 내 사주팔자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과거 고산 엄창용 철학관에서 무료로 본 사주
챗GPT가 답해준 사주
사주팔자를 외면하고 싶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불편할 정도로 정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이 꽤 있기 때문이다.
고산 엄창용 철학관이 말한,
"성격이 너무 완벽하려고 해서, 본인 자신은 고달프다 하겠다.", "겉보기에는 덜렁대는 것 같은데, 의외로 독불장군 격이고 고집이 세서 득 보다 실이 많은 편이며,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남에게 물어볼 것은 다 물어보고 알 것은 다 알고 있으면서도 표현을 잘 안 한다."
뜨끔;;
그리고 챗GPT가 말한 ,
"감정표현이 부족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려는 태도 때문에 상대가 서운함을 느낄 수 있다."
이 부분에서도 움찔했다. 과거 엄마가 내게 하신 말씀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형이 네가 무시한다고 느끼는 것 같더라. 형 좀 존중해 줘."
나는 그럴 때마다 같은 답을 반복한다.
"내가 형을 무시할 일이 없지. 내가 책을 많이 볼뿐이지, 형이 나보다 머리가 좋은 건 부정할 수 없거든. 근데 어쩔 수 없어. 우린 성향이나 관심사가 완전히 달라. 형네 집 책장을 봐.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보드게임, 전자기기로 가득 차 있잖아. 그런데 우리 집 책장은 어때? 완전히 다르지? 무시하는 게 아니야. 공유할 영역이 부족할 뿐이야. 형 생각해서 조카한테 선물도 계속 보내는데, 그렇게 보면 서운하지."
난 여기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지금의 나, 다시 말해 사주팔자가 말하고 있는 나를 그대로 수용해야 할까 아니면 이를 극복하려 노력해야 할까!?!?!?
운명,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낭만주의, 또 하나는 사실주의다. 낭만주의는 지금 이 순간보다 미래에 초점을 맞추고 공상을 통하여 새로운 가능성을 그린다. 하지만 사실주의는 부조리한 현실과 모순적인 인간, 갈등에 집중하며 삶을 날 것 그대로 묘사한다. 문학에서도 이 두 흐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낭만주의 문학은 온갖 아름다운 상상과 긍정적인 미래를 노래하며 "세상은 이렇게 될 수 있어."라고 속삭인다. 반면 사실주의 문학은 현실의 잔혹함과 인간의 한계를 직시하며 "세상은 워래 이런 거야."라 선언한다. 그리고 고 사실주의의 아류라 할 수 있는 자연주의 문학은 한 발 더 나아가 인간을 환경과 본능의 노예처럼 묘사하여 운명이 이미 정해진 것처럼 말한다. 물론 이 세상에는 수많은 작품들이 있으니 단순화할 수는 없다. 내가 문학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기에 모든 문학작품들이 이러한 프레임으로 세상을 말한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낭만주의는 인류의 진보를 이끈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세상은 원래 그런 거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인류는 현실을 그대로 수용하는 게 아닌,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통하여 정해진 운명을 벗어났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야기였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가 등장하기 전에 중국의 철학자 장자는 비유적 우화를 통하여 상대성 개념을 설명했다. 잠수함이 등장하기도 전에 '용궁 이야기'를 통하여 바닷속 세상을 이미 그려보았다. 우리가 오늘날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 중 상당수는 처음부터 논리적인 실험으로 태어난 게 아니다. 낭만주의적 상상력이 먼저 있었고, 그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노력이 뒤따른 것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인간의 상상력을 억누르는 요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운명과 사주팔자다. 물론 사주를 무시할 수 없다. 생각보다 정확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은 사주팔자에서 자신에게 들어맞는 부분만 골라내며, 그것을 필연적 운명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따로 있다. 사주가 현재의 나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운명을 극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단순 운명을 부정하라는 게 아니라, 나만의 삶과 운명을 창조하는 과정에 대한 것이다.
인간은 정해진 운명을 극복하는 존재
각 사람에게 정해진 사주팔자,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는 달에 사람을 보내고, 불치병을 해결하여 수명을 연장하고, 빛보다 빠른 통신망을 구축하지 않았나? 인간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을 넘어서는 존재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까지 고정적이고 불변하지 않을 것 같은 사주팔자가 말하는 운명을 궁금해한다. (난 여기서 내 운명을 궁금해하시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엄마는 내 끝을 볼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 본인이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도 아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궁금하실 수밖에 없겠지._
인간은 노력과 성취를 신용하지만,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조장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지 못한다. 신내림을 받은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이유도 이에 기인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실패를 합리화한다. 때로는 불확실한 미래를 조금이라도 예측하려는 욕심으로 운명에 의존하게 된다. 누군가는 이를 체념하듯 받아들이거나, 신비로운 힘에 의해 의지하여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삶을 항해로 비유하자면 사주팔자가 말하는 운명은 해류에 가깝다. 누군가는 그 해류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인다. 마치 배를 이끌고 있는 게 자신이 아닌 해류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바닷길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 방향키를 잡아 원하는 곳으로 나아갈 수 있지 않나.
물론 인간은 모든 것을 바꾸고 창조할 수는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와 조상의 유전적 특성과 성향 그리고 성장 과정에서의 가정환경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없는 커다란 해류에 가깝다. 하지만 후천적인 학습과 경험을 통해 습관과 사고방식을 재교정하여 새로운 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 나로 예를 들자면, 우리 형은 어렸을 때부터 책을 많이 읽었고, 집안에서는 똑똑하기로 소문이 자자했다. 그래서 형은 어른들에게 예쁨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그런 환경에서 자란 영향 때문일까? 형이 좋아하는 과목인 수학과 과학을 함께 즐기기 시작했고, 고등학교에서도 이과를 선택하고 대학교 전공도 형과 비슷한 방향으로 선택했다. 고등학교 때는 물리라는 과목을 좋아해 수능 과학탐구영역 선택과목도 물리 1, 물리 2를 선택했다. ( 지금 생각해 보면, 물리를 좋아해서 선택한 게 아니다. 나는 머리가 나쁘다. 물리는 화학, 생물, 지구과학에 비해 외울 게 덜하기 때문에 더 쉽다.)
하지만 성인이 되고 형과 떨어져 살다 보니 지금의 나는 어렸을 때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다. 내 책장에는 이공계열 책은 거의 없다. 그래서 수학, 과학 관련 서적은 없다. 굳이 꼽자면 수리철학이나, 과학철학 정도일 뿐이다. 물리 관련 서적도 없다. 리처드 파인만이 쓴 책은 있지만 물리가 좋아서 선택한 게 아닌, 리처드 파인만이라는 사람이 재미있어서 있을 뿐이다.
이처럼 유전인자, 가정환경, 사주팔자, 운명은 내가 컨트롤할 수 없는 해류라면, 삶은 해류라는 흐름 속에서 스스로 선택하고 개척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을 창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독서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형을 따라 하려던 나에서 달라진 내가 된 이유 또한 독서에 있다. 나만의 시간으로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을 갖다 보니 어린 시절 경험한 집안 분위기와 완전히 동 떨어진 사람이 된 것이다. 물론 누군가가 이 또한 정해진 내 운명이자 사주팔자라 말하면 할 말이 없겠지만.
모든 책이 운명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낭만주의적 세계관을 담고 있는 책이 좋다. 이런 책을 읽다 보면 은연중에 사고방식이 바뀌고 꿈이 커진다. 그 결과 우리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게 된다.
청소년 필독서의 상당수가 낭만주의적 세계관인 경우도 이러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사회는 청년들에게 "너희는 꿈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현실을 직시하라며 낭만주의적 세계관을 내려놓으라 한다. 그렇다면 현실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정해진 사주팔자를 따르면 삶이 나아지는가? 내 생각은 그렇지 않다. 정해진 사주팔자, 운명을 뛰어넘으려는 낭만주의적 사고방식이 필요하다.
비관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경향의 문학작품을 읽는 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만든다. 낭만주의적 감성이 부족한 사람은 현실에 쉽게 안주하고, 자신의 환경을 바꿀 의지가 줄어든다. 그러므로 현실을 직시하는 사실주의 문학도 중요하지만 그것만 읽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낭만주의적 세계관이 깃든 책으로는 서유기가 있을 것이고,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가 있다. 서유기의 핵심 메시지는 '운명은 정해진 게 아닌 개척하는 것'이다. 그는 신들에게 도전하며, 자신을 속박하는 모든 틀을 깨려고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인간이 정해진 운명을 극복해 나가는 여정을 은유로 풀어낸 것이다. 제인에어 또한 여성의 사회적인 위치가 한정적이었던 시대에,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자 하는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는 감정과 신념을 따르고 운명을 순응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이를 단순 로맨스 소설로 볼 수 있겠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문장은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는 것.'이다.
사주팔자 어떻게 극복할까?
삶은 항해다. 그리고 운명이라는 해류를 극복하고 내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강한 의지가 필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일단 마음부터 들여다봐야 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마음은 관념적인 도덕적 수양을 통하여 정진하려는 강한 의지력을 뜻하는 게 아니다. 인간의 의지는 생각보다 약하다. 단순 결심만으로 해류를 극복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실패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겠지. 이처럼 의지력 하나만으로 해류를 극복하기는 어렵다. 고로 도덕적 수양 또한 타고난 사주팔자를 바꾸는 데에는 큰 도움이 안 될 것이다. 운명을 극복하는 것은 결국 자의식이다. 다시 말해, 나에 대한 솔직한 인정과 받아들임이다.
자의식은 크게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으로 나뉜다.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도덕, 이성, 사회적 가치 같은 것들이 표면의식이 지배하는 영역이다. 반대로 잠재의식은 감성적이면서도 본능적인 것이다. 운명을 바꾸고 싶다면 강한 의지만을 내세울 게 아니라 잠재의식을 표면의식 위로 끌어올릴 줄 알아야 한다.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하는 건 도덕적 수양에 집착하는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을 암송하고 인내와 절제를 반복하면 운명이 바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을 보자. 도덕적으로 완벽한 삶을 살았다고 하여 반드시 운이 따르나? 우주의 기운이 나를 향하는가? 운명을 극복하는 힘은 강한 윤리적 신념과 절제된 삶을 따를 때가 아닌, 나의 본능을 받아들이고 이를 활용할 때이다. 고로, 잠재의식을 표면의식 위로 끌어올리는 게 중요하다.
사주팔자는 태어날 대부터 결정된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유전자와 환경, 사회적 조건들도 마치 정교하게 짜인 운명의 설계도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 도면 위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가야 하는 존재인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운명이란 하나의 설계도가 아니라 초안을 거듭 수정하는 원고에 가깝다. 그 원고를 다시 써 내려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독서에 있다.
독서를 단순 지식 습득이라 볼 수 있지만,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을 조율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이 둘이 하나로 일치할 때에야 인간은 비로소 운명의 해류를 거스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 물론 이는 말처럼 쉽지 않다. 조금 오만한 말일 수 있겠지만 과거의 나는 표면의식과 잠재의식이 가깝게 어우러져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었고,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 조화는 현재 무너진 상태이며 불일치 속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고로 삶이란, 누군가가 이미 완성해 놓은 게 아닌, 끊임없이 다시 맞춰가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운명이란 신비로운 손길에 의해 미리 결정된 숙명이라 할 수 없다. 매일같이 반복하는 생각과 행동이 쌓여 만들어지는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물론 사주팔자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 나를 제대로 설명해 주는 흥미로운 도구이기 때문이다. 실제 사주에서 묘사한 나의 성향과 지금의 나는 닮은 구석이 꽤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내 인생을 결정하도록 방치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이미 정해진 해류에 몸을 맡기지 않는 것. 그러니 이 커다란 흐름을 어떻게 거스르고, 어떻게 방향을 틀어, 내가 원하는 곳에 도달할 것인가. 일단 지금 내가 하기 싫은 것부터 해야지. 그것은 무엇인가!?!?!? 바로 운동이다!
그럼 오늘도 운동을 해야겠다.
그것보다 아직도 화요일이잖아? 이번 주는 왜 이렇게 느리게 간다고 느껴지는 걸까?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건, 이번 주에 할 수 있는 게 더 많다는 거잖아?
이거 완전 럭키비키 풉키포키잖아!?!?!: ㅋ_ㅋ_ㅋ__ㅋ_ㅋ_ㅋ_ㅋ_ㅋ_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