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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5. 2018

투창을 들어라

들풀 #5

나는 가위눌렸다. 손을 가슴에 올려놓았기 때문인 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무겁디무거운 손을 치우려고 하였다. 
<무너지는 선의 떨림>


루쉰은 <들풀> 곳곳에서 꿈을 끌어들여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꿈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꿈이란 섬뜩한 존재들을 만나는 시간이다. 뭔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좇아오는 개의 모습을 보기도 하고, ‘죽은 불’이란 기묘한 존재를 대하기도 한다. 이런 기묘한 존재로부터 루쉰은 달아나려 하지만 쉬이 벗어날 수 없다. 


그렇기에 루쉰은 가위에 눌렸다고 이야기한다. 가위에 눌린 경험이 있는지. 스스로 일어날 수 없는, 온몸에 힘이 빠지고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는 순간을 만나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에게 꿈꾸는 시간이란 이처럼 가위눌린 시간과도 같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무겁디 무거운, 그의 가슴에 놓인 손은 그밖에 알지 못하는 것일 테다. 여기서 고독이 묻어난다. 그 손의 무거움은 대체 무엇일까. 도무지 남에게 이 손의 무거움을 설명할 수도, 이해시킬 수도 없다.  


이런 고립 속에도 그는 망설인다. 마치 <길손>에서 보이는 것처럼. <‘들풀’ 영역본 머리말>에 따르면 “<마른 잎>은 나를 사랑하는 이가 나를 보존하고자 하기에 지었다”고 한다.(역주) 여기서 마른 잎은 그저 말라비틀어진 흔한 낙엽을 일컫는 게 아니다. 소중하면서도 무언가 안타까움을 지니고 있는 존재를 가리킨다. 


빨강, 노랑, 초록이 섞인 잎사귀에서 까맣게 테를 두른 작은 구멍이 눈알처럼 사람을 응시하였다. 속으로 생각했다. 병든 잎이다! 그래 그 잎을 따, 방금 사온 <안문집> 갈피에 끼워 두었었다. 아마, 곧 지고 말, 이 벌레 먹고 알록달록한 잎의 색깔을, 잠시라도 보존해 두고 싶어서였을 거다. 뭇 이파리들에 묻혀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마른잎>


그래서 ‘병든 잎’이지만 이를 보존할 마음이 생긴다. ‘큰 키 나무가 되지 못한 들풀’마냥. 아마 <들풀>에 실린 글은 ‘들풀’인 동시에 ‘병든 잎’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병들었다는 표현처럼 여기에는 어떤 해로움이 묻어있다. <들풀>의 글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음지로 눈을 향하게 만든다. 햇볕이 내리쬐는 밝은 곳 대신 암흑과 허무, 컴컴하면서도 괴기한 공간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를 따라 모래 바람 가득한 사막을 노닐게 하고, 광막한 들판에 헤매게 만든다. 깊고도 깊은 그림자를, 서늘한 빛을 내뿜는 달을 응시하게 만든다. 그의 글을 제대로 읽었다면 더 이상 '희망'을 '희망'으로 말하는 법을 까먹을 수밖에 없다. 질주하며 내달리는 허망에 어지러움을 느낄 수밖에… 


나아가 ‘죽음’이라는 꺼림칙한 주제까지 우리에게 들이 민다. 그래, <들풀>이란 결코 휴가지에서 심심풀이로 읽을 책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영혼의 양식 따위는 되지 못하는 책이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그가 죽음을 이야기할 때 그는 죽음 속에 꿈틀거리는 무엇을 함께 이야기한다. 그는 추상적인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는 황폐한 무덤을 우리 눈앞에 들이밀고, 나아가 파헤쳐진 시체를 보여준다. 심장도 간도 없는. 그러나 무덤과 시체를 펼쳐내며, 무덤 속을 들여다보고 시체를 해부하는 그의 글에서는 전혀 부패한 남새가 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그는 ‘살아 있는 죽음’을 말한다.  


<죽은 뒤(死後)>란 흥미로운 글이다. <들풀>의 글 가운데 꽤 긴 축에 속한다. 무언가 할 말이 많았던 게다. ‘꿈을 꾸고 있는 꿈’이라는 표현만큼 이 글의 시작도 기이하다. ‘나는 내가 길거리에서 죽어 있는 꿈을 꾸었다.’ 지금까지 꾼 꿈을 세어보면 수천 번이 넘을 테다. 허나 루쉰이 말하는 것과 같은 ‘죽어 있는 꿈’은 꾸어보지 못했고, 그런 꿈을 꿀 일도 없을 것이다.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꿈이다.


그 기묘한 꿈속에 그는 시체로 남아 있다. 그것도 지각이 남아 있는 시체로. 대체 그게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그래도 그의 말을 따라 가보자. 


거기가 어딘지, 내가 어떻게 거기로 갔는지, 어쩌다가 죽게 되었는지, 이런 것들을 나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요컨대 내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무렵, 나는 거기에 죽어 있었던 것이다. 
<죽은 뒤>


시체로 나를 만나기. 죽어 버려 눈을 뜰 수도 없다. 대충 들리는 소리, 불빛의 변화로 상황을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지각은 남아 있다. 개미나 파리 따위가 성가시다. ‘버러지 놈들!’ 주석을 통해서도 쉽게 짐작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말하는 파리 따위는 그가 논적으로 삼은 이들을 비유한 것이다. 윙윙 거리며 사람을 시끄럽게 만드는 존재! 루쉰을 상대했던 이들은 이 글을 읽고 어떤 기분이었을까? 


전사戰士가 전사戰死했을 때, 파리들이 제일 먼저 발견하는 것은 그의 결점과 상처 자국이다. 파리들은 빨고 앵앵거리면서 의기양양하며, 죽은 전사보다 더욱 영웅적이라 여긴다. 그러나 전사는 이미 전사하여, 더 이상 그들을 휘저어 내쫓지 못한다. 그리하여 파리들은 더욱 앵앵거리면서, 불후不朽의 소리라고 스스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들의 완전함은 전사보다 훨씬 더 위에 있기 때문이다.  
확실히 어느 누구도 파리들의 결점과 상처를 발견한 적이 없다. 그러나 결점을 지닌 전사는 어쨌든 전사이고, 완미完美한 파리 역시 어쨌든 파리에 지나지 않는다. 
 꺼져라, 파리들이여! 비록 날개가 자라나 앵앵거릴 수 있지만, 끝내 전사를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너희 이 벌레들아! 
 <화개집: 전사와 파리>  


위의 글은 1925년 3월 21일에 쓰였다. 한편 <죽은 뒤>는 그해 7월 12일에 쓰인 글이다. 몇 달 사이의 차이는 있지만 그는 동일한 주제를 이야기한다. 


전사는 말 그대로 싸우는 존재를 말한다. 파리는 그저 주변을 돌며 앵앵거리기만 한다. 거기에 나아가 그들은 전사의 결점, 즉 상처를 발견하고는 이를 빨아대기에 바쁘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손에 피를 묻히고 싸움에 뛰어들지는 않으면서 남의 결점과 상처만을 빨아먹는 작자들. 그렇기 때문에 파리 같은 작자들은 깨끗하다. 그들에게는 흠이 보이지 않는다. 상처도 보이지 않는다. 흠결이 없으나 고결함이나 고귀함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파리에게는 결점이나 상처 따위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글에는 '원수'라는 표현이 여럿 보인다. 그가 얼마나 그의 논적들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참고로 이 글이 쓰인 1925년에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 쑨원이 세상을 떠났다. 한편 이듬해에는 3.18 사건이라 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특히 어린 학생들이 여럿 총구에 목숨을 잃었다. 이 사건으로 루쉰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베이징을 떠나야 했다. 


이쯤 되면 좀 날카로움이 무뎌지기도 할법하나 루쉰은 여전히 비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는다. 루쉰이 죽기 약 한 달 전에 쓴 글을 보자. 여기에는 그의 서슬 퍼런 정신이 여전히 남아 있다. 생명의 불은 꺼져 가지만 그의 예리함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서양인은 임종시에 타인의 용서를 빌고 자기도 타인을 용서하는 의식 같은 것을 행한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나는 적이 많은 편이다. 만일 신식을 자처하는 사람이 묻는다면 뭐라 답할까. 나는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결정하였다. 멋대로 원망하도록 하라. 나 역시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겠다. 
<죽음(死)> : <루쉰>, 다케우치 요시미, 156쪽에서 재인용 
때로는 나도 관용을 미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금방 또 그런 것은 비겁자가 생각해낸 것이다. 그에게는 보복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또는 그것은 비겁한 악인이 만들어낸 것으로서 자기는 남에게 위해를 가하면서도 남의 보복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관용이라는 미명으로 기만하는 것이다,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잡다한 기억> : 같은 책. 


따라서 루쉰을 설명하는 말 가운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바로 전사戰士라는 표현이다. 그는 사막과 광야를 헤매는 동시에 늘 전장에 있었다. 죽어서도 싸우는 인간이라 부를법하다. 그는 원수에게 자신의 죽음까지도 복수로 선물하고 싶었다. 아니, 적어도 자신의 전사戰死가 그들에게 기쁨이 되지는 않기를!


털끝만큼도 생각 못 했다. 사람 생각이 죽은 뒤에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문득, 어떤 힘이 내 마음의 평안을 깨뜨렸다. 동시에, 수많은 꿈들이 눈앞에서 꾸어졌다. 몇몇 벗들은 나의 안락을 빌었고, 몇몇 원수는 나의 멸망을 빌었다. 나는 그러나 안락하지도 멸망하지도 않고, 그작그작 살아왔다. 어느 한쪽의 기대에도 부응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림자처럼 죽었다. 원수들이 알지 못하게. 그들에게 공짜 기쁨은 조금도 선사하고 싶지 않다……
<죽은 뒤>


전사 루쉰, 그가 손에 쥔 무기는 투창이다. 총이 아닌 투창. 맨 몸으로 ‘야만인이 쓰는 투창만 들고 있다.’(<이러한 전사>) 이 거친 무기로 그는 전장에선다. ‘투창을 든 전사’라 부르자. 누군가는 글을 칼에 비유했다지만 루쉰은 칼 대신 투창에 비유할 것이다. 루쉰의 글은 투창처럼 날아 꽂힌다. 


루쉰은 원수의 심장에 투창을 던지려 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적들은 심장이 한가운데 있다 스스로 믿고 있다. 그러나 전사는 한쪽으로 치우치게 창을 던진다. 물론 이 창은 심장에 명중한다. 이는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걸까? 혹, 중앙에 서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을 노린 이야기가 아닐지. 지금도 그렇지만 스스로 중앙에 서 있다며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자신의 심장은 정 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그러나 전사는 잘 알고 있다. 저들의 심장이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를.


어느 역사가의 말처럼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진행되고 있는 사건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을 가져야 한다. 입장이 없을 수도 있는 게 아니냐고? 얼마 전 어느 저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입장이 없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사회적 존재로서 의미 없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렇다. 사건마다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제 자리는 어느새 사라져 버리고 만다. 물론 우리는 늘 말하지 못하는 사람들,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두어야 한다. 그러나 입을 닫고 있는, 침묵만을 미덕으로 삼는 자들을 위한 자리는 없다. 


<총명한 사람, 바보, 종>에서 보여주듯 총명한 사람은 하소연을 듣고 하는 게 없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다. "내 생각엔, 언젠가는 나아질 거네……" 그렇다고 총명한 사람을 비판하지는 말자. 종이 원하는 것은 그저 제 자신의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여 들을 사람을 찾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은 불쌍히 여김을 받고자 할 따름이고.


"그런가요? 그리 되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선생님께 하소연할 수 있었고, 선생님도 저를 불쌍히 여겨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가뿐합니다. 하늘이 무심치 않으셔라……."  
<총명한 사람, 바보, 종> 


바보는 다르다. 그는 종이 사는 집에 가서 흙벽을 부수는 사람이다. 부당한 것이 있으면 해결해야 할 것 아닌가? 그는 주인에게 혼날 것 따위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종은 안타깝게도 스스로 종이 되어 다른 종들을 부른다. 나아가 주인까지! 


이 글은 적지 않은 씁쓸함을 남긴다. ‘종’, 즉 노예의 모습이 정말 그렇기 때문이다. 구조가 낳은 노예도 있다. ‘고대 노예제 사회’나 ‘중세 봉건시대의 농노’ 들은 시대가 만들어낸 존재들이다. 그러나 루쉰은 말한다. 스스로 노예가 되는 존재도 있을 거라고. 바보가 흙벽을 부수었을 때 종은 종의 자리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었다. 그가 생각했던 부당함이 해결되는 날이 왔다. 그러나 정작 그 순간 종은 종의 자리로 돌아간다. 스스로 노예를 자처하는 인간. 


나아가 루쉰은 이 노예가 총명한 사람과 어떻게 결탁하는지를 폭로한다. 


그날 많은 사람이 주인을 위로하러 왔다. 거기에는 총명한 사람도 있었다.
"선생님. 이번에 제가 공을 세웠습니다. 마님께서 저를 칭찬하셨어요. 저번에 선생님께서 제 형편이 좋아질 거라고 하셨지요. 참으로 앞을, 훤히 내다보십니다……." 종이 큰 희망이라도 생긴 듯 기뻐하며 말했다.
"그러게 말이네……." 총명한 사람도 제 일인 양, 기쁜 듯 대꾸했다. 
<총명한 사람, 바보, 종> 


지나간 이야기를 떠올리자. 어쩌면 ‘희망’이란 총명한 사람의 말과 비슷한 것은 아닐까? 그저 ‘형편이 좋아질 거라’는 말처럼 언젠가 좋은 날이 오리라는 막연한 기대를 우리는 희망이라 부르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글을 읽어보면 이 희망이 얼마나 허망한지를 알 수 있다. 종이 꿈꾼 ‘좋은 날’이란 그저 주인에게 칭찬받는 것 따위였을까? ‘총명한 사람’을 통해 비치는 지혜도 비슷하다. 이토록 어리석은 것을 지혜라고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흔한지.  


이 글에서 오히려 궁금한 것은 쫓겨난 바보의 행방이다. 쫓겨난 바보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쫓겨난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모르긴 해도 사방 종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무언가 또 사건을 만들고 돌아다니겠지. 


바보, 그는 우직하게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이다. 늙고 죽고 설사 패배할 지라도. 그러므로, '그러나 그는 투창을 들었다!‘


그는 마침내 무물의 진 속에서 늙고, 죽었다. 그는 결국 전사가 못 되었다. 무물의 물이 승자였다.
이쯤 되면 아무도, 전투의 함성을 듣지 못한다. 
태평太平.
태평…….
그러나 그는 투창을 들었다! 
<이러한 전사>


루쉰의 다른 말을 빌리자. 투창을 든 전사, 반역의 맹사猛士는 조물주의 착한 백성을 소멸할 것이다. 


이게 다 조물주의 착한 백성이다. 그는 그걸 필요로 한다.
반역의 맹사猛士가 인간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우뚝 서서, 이미 달라졌거나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폐허와 무덤을 뚫어본다. 깊고 넓은, 오래된 고통 일체를 기억하고, 겹겹이 쟁여지고 응어리진 피를 직시한다. 죽은 것, 태어나고 있는 것, 태어나려는 것, 태어나지 않은 것 일체를 속속들이 안다. 그는 조물주의 농간을 간파하고 있다. 그가 떨쳐 일어나, 인류를, 소생시키거나 소멸되게 할 것이다. 이들 조물주의 착한 백성들을.
조물주, 비겁자가 부끄러워 숨는다. 하늘과 땅이 맹사의 눈앞에서 색을 바꾼다. 
<빛바란 핏자국 속에서>


한때 전사를 자처하였으나 끝내 전사戰士로 전사戰死하지 못하는 자가 얼마나 많은가. 전사는커녕 전장에 발을 내딛지도 않은 사람도 수두룩하다. 그러나 루쉰은 전장의 피비린내를 아는 사람이다. 손에 피를 묻히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자신의 소멸도 죽음도 꺼려하지 않는다. 그에게 변절이라는 말이 들어갈 수 없는 건 그가 전사였기 때문이다. 투창을 든 전사. 


그러나 그 손에 비치는 핏자국은 <외침>에서 만났던 찐빵에 적셔진 그 피와는 다르다. <외침>의 <약>에서 그는 혁명가의 죽음에 몰려드는 대중의 모습을 비판적으로 그려냈다. 피에 묻은 생기를 조금이라도 나누어가지기 위해 사람들은 앞 다투어 혁명가의 시체에 몰려든다. 혁명가의 목소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그의 생명, 이미 죽은 목숨에만 그들은 관심이 있다. 자신의 삶을 위해 남의 죽음을 도구로 삼는 인간들이다.


루쉰이 말하는 핏자국은 다르다. 그는 끊임없는 분투를 이야기했지만, 끝없이 싸워나갈 것을 이야기하지만 누구를 죽여 없애겠다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누군가를 세상에 지워내겠다는 건 그의 관심이 아니다. 그에게 전장이란 누구를 죽이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는 곳이 아니다. 도리어 그는 삶 자체를 전장으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마치 ‘길손’ 끊임없이 길을 가듯, 저 앞의 무덤을 바라보며 거침없이 발을 내딛듯 루쉰은 전장에서 손에 투창을 놓치지 않는다. 그가 싸우는 대상은 외부의 적인 동시에 내부의 적이다. 그렇기에 그는 승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싸움이 언제 끝날 것이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생이란 모순 덩어리이며, 삶이란 끊임없는 분투의 현장이다. 그러므로 루쉰이 전장을 이야기하는 것은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전사는 삶의 현장, 이 전장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는 사람을 가리킨다. 삶의 현장에 끊임없이 나아가는 꾸준한 발걸음. 물러서지 않는 당당함. 치밀하면서도 집요한 정신이 여기에 있다.   


… '죽음'이 덮쳐드는 것을 눈으로 보는 것 같았다. 동시에, '생'의 존재감도 깊어졌다.
(…)
모래바람에 할퀴어 거칠어진 영혼, 그것이 사람의 영혼이기에, 나는 사랑한다. 나는 형체 없고 색깔 없는, 선혈이 뚝뚝 듣는 이 거칠음에 입 맞추고 싶다. 진기한 꽃이 활짝 핀 뜰에서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한가로이 거닐고, 두루미 길게 울음 울고, 흰 구름이 피어나고……. 이런 것에 마음 끌리지 않는 바는 아니나, 그러나 나는, 내가 인간 세상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
그렇다. 젊은 영혼들이 내 눈앞에 우뚝 서 있다. 그들은 벌써 거칠어져 있거나, 거칠어지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들, 피 흘리면서 아픔을 견뎌내는 영혼을 사랑한다. 내가 인간 세상에 있음을,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다. 
<일각>


그렇다. 나 역시 '피 흘리면서 아픔을 견뎌내는 영혼을 사랑한다.' 인간 세상이란 그런 게 아니겠는가. 루쉰은 끊임없는 분투의 현장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세상에 아름다운 것도 많고, 아껴 즐겨야 할 것도 많은데 이렇게 험한 루쉰의 글을 읽어 무엇 하나 하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다. 어쩌면 루쉰이 말하는 전사니 전장이니 하는 것이 너무 멀게 느껴질 지도.


실제로 ‘전장’이라 하더라도 각자가 놓인 자리마다, 각 시대마다 그 싸움의 형상과 크기는 다르기 마련이다. 루쉰의 시대가 그리고 루쉰에게 그 자신의 삶이 싸움으로 인식되었다 한들, 우리가 전혀 다른 시대에 산다면 어찌 똑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러나 한 번쯤 의문을 던져볼 일이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사는 존재인가, 어떤 시대 속에 내던져졌는가 따위를. 만약 루쉰의 삶과 시대에 공명한다면 그의 글은 더없이 반가울테다. 거꾸로 그렇지 않다면 그의 글은 영 밍숭맹숭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잘 알고 있다 모든 글이 누구에게나 약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그러나 또 한 번 의문을 던져볼 일이다. 길고 긴 일생 가운데 루쉰이 당면했던 것과 같은, 오늘 이야기하는 그런 전장이 우리에게 한 번도 펼쳐지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을까? 매일 꽃길만 걷는, 늘 평화롭고 포근하기만 한 삶은 없지 않을까? 루쉰처럼 핏빛 전장에서 일생을 보낼 필요도 없지만 늘 안온하기만 한 삶도 없을 테니. 


언젠가 인생의 전장에서 전사로 서야 할 때 루쉰의 글을 기억하기를. 원수를 맞아 상대해야 할 때, 자신에게서 종의 모습을 발견할 때, 길이 끊어지고 막막한 그 어느 날, 함께 읽었던 이 글들을 기억하기를.


그러므로 멈춰있지 않기를!


인생의 전장에서 늘 분투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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