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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3. 2018

허망한 길을 가며

들풀 #4

<들풀>에 실린 <길손>은 낯선 형태의 글이다. 희곡 형식으로 단 세 명의 등장 인물이 있다. 길손 그리고 늙은이와 여자아이. 장소도 매우 간단하다.  


동쪽의 몇 그루 잡목과 기와 조각. 서쪽은 퇴락한 무덤들, 그 사이로 길 같은 것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 쪽으로 단칸 흙집의 문이 열려 있다. 문 옆에 나무 그루터기가 하나 있다. 


인용하지 않았으나 배경이 되는 시간은 ‘황혼 무렵’이다. 황혼 무렵, 그리고 서쪽을 향하는 길손. 그리고 서쪽의 퇴락한 무덤들까지.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비유는 매우 단순하다. 해가 서쪽으로 저물 듯, 그리고 서쪽에 무덤이 있듯 죽음으로 나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당연히 이 삶은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간다.  


길손: (...) 기억을 할 수 있을 때부터, 저는 이렇게 걷고 있었습니다, 어디론가 가려고. 그곳은 앞입니다. 먼 길을 걸었다는 것만 생각납니다. 지금 이곳에 와 있지요. 저는 인차 저쪽 (서쪽을 가리키며) 앞쪽! 으로, 계속 걸어, 갈 것입니다.
(...)
늙은이: 앞? 앞쪽은, 무덤이오. 


길손은 서쪽, 무덤을 향해 걷는다. 앞서 루쉰은 <무덤>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자신 앞에 놓인 것은 무덤일 뿐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어쩌면 그는 앞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 무덤, 즉 죽음 뿐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서 서쪽을 향해 걷는 길손이란 루쉰 자신을 이야기한다.


죽음이 루쉰에게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누구나 죽는다는 자명한 진리 앞에 예외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루쉰만, 이 이야기 속의 길손만 서쪽을 향해 걷는 것은 아니다. 다만 루쉰은 끊임없이 자신의 길이 서쪽을 향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길 같은 것의 흔적’이라는 말은 너무 작위적이기까지 하다. 누차 언급한 <고향>의 그 표현을 기억하는지. 길이란 본시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람들이 다녀서 길이 된다는 그 표현처럼 루쉰은 이 숙명과도 같은 서쪽, 무덤, 즉 죽음을 향한 길을 '분명한 미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어째서일까? <고향>에서 길이 희망을 의미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죽음을 희망’한다는 건 뭔가 좀 낯설지 않는가? 죽음이란 자명한 미래이지만 분명한 길, 희망할만한 건 아니다. 그럼에도 길손은 서쪽으로 발을 옮긴다. 왜 어째서?  

 

늙은이; 나는 남쪽, 북쪽, 그리고 동쪽 — 당신이 이곳을 향해 출발한 곳만 알 뿐이오. 거기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곳이지. 아마 당신네에게 가장 좋은 곳일 거요. 내가 말이 많다고 탓하지 마시오. 내 보아하니, 당신은 너무 지쳐 있소. 되돌아가는 편이 낫겠소. 나아간대도 끝까지 갈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길손: 끝까지 가리라는 보장이 없다고요? ...... (생각에 잠겼다가, 깜짝 놀란다.) 안 됩니다! 가야 합니다. 되돌아가 봤자 거기에는, 명분 없는 곳이 없고, 지주가 없는 곳이 없으며, 추방과 감옥이 없는 곳이 없고, 겉에 바른 웃음이 없는 곳이 없고, 눈시울에 눈물 없는 곳이 없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증오합니다.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늙은이는 길손과 상반되는 인물이다. 그는 길손처럼 서쪽을 향해 걷다가 중간에 눌러 앉은 사람이다. 그는 말한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출발한 곳, 떠나 온 곳이라고. 저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무덤뿐이라는 자명한 사실 이상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설사 그것을 안다 하더라도 끝까지 갈 수 없을 수도 있다고. 


그렇다. 정작 우리 앞에 죽음이 놓여 있다고 한들, 제 손으로, 제 발로 죽음에 까지 순연히 닿을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죽음이란 중간에 거꾸러지는 것이다. 스스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어느 날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날이 오겠지. 그러니 돌아가는 게 어떨까? 어차피 걷다가 멈추게 된다면 그냥 발걸음을 멈추는 게 어떨까?  


늙은이의 이 제안에 길손은 손사래를 친다. 아니,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돌아갈 곳이란 모두 내가 증오하는 것으로 넘치니 말이다. 그곳은 명분과 지주, 추방과 감옥이 있는 곳이다. 떠나야만 한다. 여기에 더하여 길손은 어떤 ‘소리’를 듣는다.

 

길손: 그렇습니다. 저는 갈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앞에서 저를 재촉하는 소리, 부르는 소리가 있습니다. 저를 멈추지 못하게 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제 발이 망가진 게 원망스럽습니다. 여러 군데를 다쳤고,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한쪽 발을 들어 늙은이에게 보인다.) 그래서 저는, 피가 부족합니다. 피를 좀 마셔야 해요. 그렇지만 피가 어디 있습니까? 설령 누군가의 피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누가 되었건 저는 그 사람의 피를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앞에서 부르는 소리는 무엇일까? 루쉰을 읽으며 이야기한 수많은 질문처럼 이것도 질문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다만 루쉰의 글 여러 곳에서 환영처럼 들리는 소리가 있다는 사실을 짚어두자. 그는 꿈에서 여러 소리를 듣는다. 그는 그 소리로부터 도망치려 버둥대지만 결코 도망가지 못한다. 떼어 낼 수 없는 어떤 목소리를 그를 늘 괴롭힌다. <개의 힐난>에서 개의 존재가 그렇다. 


나는 달아 났다.
“잠깐! 우리 얘기 좀 하지 ......” 개가 뒤에서 큰소리로 붙들었다.
나는 냅다 달아났다. 힘을 다해 달렸다. 꿈결에서 벗어날 때까지 나는,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개의 힐난> 


힘을 다해 달렸으나 침대 위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결코 달아날 수 없는 모순적인 상황. 개의 목소리는 꿈에서 달려들어 그를 좇는다. 그는 꿈에서 그 소리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끝내 제대로 도망치지는 못한다. 어쩌면 그렇게 달라붙는 것, 도망치고 도망치지만 결코 떼어 낼 수 없는 무엇이 바로 <길손>에서 말하는 그를 부르는 소리가 아닐까? <개의 힐난>에서는 그 소리로부터 달아나고, <길손>에서는 그 소리를 좇아 가지만 무엇인가 그에게 달라 붙어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나는 그것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 혹은 끊임없이 건드린 어두 컴컴한 무엇이 아닐까 싶다. 늘 아른거리는 그림자, 결코 떼어내지지 않는 본질적인 존재의 음산함. 물론 여기서 벗어나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늙은이는 그 방법을 이야기한다. ‘모른체하기’ 늙은이도 무엇인가 들었지만 몇 차례 모른체하였더니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한다.  


루쉰도 그것이 새로운 출구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무시하기. 내 귀에 울리는 소리를 듣지 않기. 그러나 길손은 그 방법을 따르지 않는다. 글은 어째서 그런지 알려주지 않는다. 어째서 루쉰은 자신에게 울리는 어떤 소리들을 무시하지 않았던 것일까? 그러지 못한 것은 어째서일까?  


루쉰에게 그 대답을 명확하게 찾지는 못하겠다. 다만 모든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자기 인식, 자신에게 있는 또 다른 울림을 그 역시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질문해볼 따름이다. 무시하기, 그것이 영 쓸모 없는 태도라고는 할 수 없다. 늙은이의 말을 따르면 무시하기로 그 환영에서 벗어날 수 있을테니까. 그러나 만약 그랬다면 루쉰이라는 인물을 이렇게 기억할 필요는 없었을 거다. 게다가 <들풀>이라는 작품이 세상에 빛을 볼 일도. 


길손: 두 분, 고맙습니다. 평안하시기를. (서성이며 생각에 빠졌다가 깜짝 놀라) 하지만 안돼! 나는 가야 해. 아무래도 가는 게 옳아...... (즉시 고개를 들고, 힘차게 서족으로 걸어간다.)
(여자아이가 노인을 부축하여 흙집으로 들어서고, 바로 문이 닫힌다. 길손이 들판을 향해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밤빛이 그의 뒤를 따른다.) 


 여기서 그의 뒤를 따르는 ‘밤빛’이란 대체 무엇일까? 어쩌면 곧 어둔 밤에 삼켜질 그의 얄궂은 운명을 이야기하는 게 아닐지.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끊임없이 외치던 그 환영같은 소리의 본 모습을 이야기하는 수도. 루쉰, 그는 어둠에 젖은 인물이었다. 

 

누군가에게 꿈이 ‘욕망’을 발견하는 자리였다면, 루쉰에게 꿈은 어둠을 맛보는 공간이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하는 꿈은 마치 악몽처럼 그려진다. 그는 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결코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죽음은 그의 꿈 속에서 문득 얼굴을 비친다. <빗돌글>과 <죽은 뒤>는 죽음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 보야준다. 


<빗돌글>의 원제는 ‘묘갈문墓碣文’이다. 당연히 과연 그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할테지만, 루쉰의 글을 읽는 우리에게 그 대답은 매우 간단하다. 바로 자신을 말한 것이겠지. 죽음을 대하는 오늘날의 태도와 과거의 태도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과거 문인들 가운데는 스스로 묘비명을 쓰곤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죽음을 스스로 예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새롭게 구성하고자 했던 모양이다.  


“… 호탕한 노래 열광 속에 추의를 먹고, 천상에서 심연을 보다. 모든 눈에서 무소유를 보고, 희망 없음에서 구원을 얻다...
 “… 떠도는 혼 하나가 긴 뱀으로 변하다. 독이빨로, 남을 물지 아니하고 제 몸을 물다. 마침내 죽다...
 “… 떠나라!…” 


그는 스스로 ‘자신을 해부하는 사람’이라고 했던 인물이었다. 빗돌글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샅샅이 해치고 그 이면을 엿보는지는 보여준다. 그는 역설 속에 자신의 삶을 그려낸다. 마치 죽어버린 불처럼, 그는 열광 속에 추위를 먹고 천상에서 심연을, 희망이 사라진 곳에서 구원을 얻는다. 이 추위와 심연, 구원이란 대체 무엇일까. 그도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다만 <길손>에서 보았듯 뭇 사람들의 말에 그가 결코 만족하지 못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추위와 심연이 설사 그에게 구원이 될지라도 그것이 마치 뱀과 같이 사나운 것임을 그는 자각하고 있다. 제 몸을 물어뜯는 뱀, 이를 모든 인간이 제 문제를 고민한다는 것으로 퉁치지는 말아야 한다. 그는 자기 부정의 힘, 자기 부정의 의지야 말로 어떤 새로운 것을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되리라 생각했던 듯하다. <서문>에서 나의 죽음을 크게 기뻐한다는 말을 기억하자. 천상에서 심연을 맛보았듯, 그는 죽음에서 고양을, 크낙한 환희를 맛보았을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이 뚜렷한 정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그는 그 죽음과 소외의 경험을 무엇으로 규정지어 이야기하지 않는다. 어쩌면 그것은 애락이 깃들지 않는, 덤덤하고도 담담한 상태라고만 해야한다. 본디 맛을 알 수 없으며, 따지고 보면 그 본디 맛이라는 것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실상 희노애락이라는 것 역시 모두가 하나의 허상, 일시적인 찰나의 무엇 아닌가.  


이제 루쉰에게 남는 것은 숙명처럼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억척스러움이다. 여기서 빗돌글 아래 써 있는, 그 어떤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던 우리에게 남는 하나의 명령, ‘떠나라’라는 말은 어떤 울림을 남겨준다. 마치 그 말은 <그림자의 고별>에서 보았던 ‘머무르지 않으려오’하는 어떤 의지를 떠오르게 만든다. ‘어떤 의지’라고 한 것은, 이것이 근원적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도 아니며, 어떤 대상으로부터 출발한 혹은 그것을 대상으로 삼는 욕망도 아니기 때문이다. 출발도 목적도 없는 의지라고 해야 할까? 


다케우치 요시미는 루쉰에게서 이러한 태도를 ‘쩡짜’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무식하면서도 억척스러운 태도. 그의 다른글 <노라는 집을 나간 뒤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무뢰배 지개꾼의 정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가까운 곳을 가자고 해도, 먼 곳을 가자고 해도, 짐이 가볍더라도 설사 무겁더라도 2원을 이야기하는 정신. 오늘날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무례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정신. 이를 꾸준함이라고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자신을 어떤 행위의 존재로 인식하기 때문이 아닐까?  


‘떠나라’라는 명령은 끊임없는 전진을 이야기한다. 설사 발자국만 남을 지라도, 또 발자국을 남기는 오롯이 움직이는 정신. <작은사건>의 인력거 꾼에게서 발견했던 것도 바로 이 정신이 아니었을까? 루쉰에게서 소외된 존재로서의 자각을 만나면서도 충일한 삶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무덤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이라 말했으면서도 무덤에서 조차 안락할 수 없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떠나라!.’ 머무르지 않으려는 의지. 여기서 <서문>의 맺음말 ‘가거라’라는 한 마디를 떠올리는 것은 무리일까? 


“내가 티끌로 될 때에, 그대는 나의 미소를 볼 것이다!” 


아마도 그 미소는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볼 수 있는 미소는 아닐테다. 흔적과 상상으로 가능한 무엇이 아닐지.  


몇몇 벗들은 나의 안락을 빌었고, 몇몇 원수는 나의 멸망을 빌었다. 나는 그러나 안락하지도 멸망하지도 않고, 그작그작 살아왔다. 
<죽은 뒤> 


‘그작그작 살아왔다’는 말은 루쉰을 잘 보여준다. 그는 거인도, 영웅도 아니었지만, 문학가도 혁명가도 아니었지만 그의 삶은 어떤 울림을 남겨준다. 그작그작 살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고, 비난과 환호에도 제 길을 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어떻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도 그작그작 살아가기를. 열광도, 구원도, 원한도 없이, 그저 그작그작 살아가기를. (不上不下地生活下來) 


길은 아득하여 멀기만 하나, 나는 오르락 내리락 하며 찾아보련다.
 路漫漫其修遠兮 吾將上下而求索
 <이소> 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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