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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n 07. 2018

떨어진 꽃을 주울 수 있을까?

조화석습 #1

그리고 1926년 가을이 되었다. 나는 혼자 샤먼의 석조 건물에 살았다. 바다를 바라보며 고서를 뒤적이노라면 사방에 인기척이라고는 없고 마음은 텅 빈 듯 허허로웠다. 그때 베이징의 웨이밍사에서 잡지에 실릴 원고 독촉 편지가 계속 날아왔다. 나는 그 당시 현재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마음속 저 밑에 침전된 것을 회상하여 <아침 꽃 저녁에 줍다> 열 편을 썼고, 고대의 전설 같은 데서 소재를 따다가 한번에 이 <새로 쓴 옛날이야기> 여덟 편을 완성하고자 했다. 
<새로 쓴 옛날 이야기: 서언> 


1926년은 루쉰에게 적잖은 변화를 안겨주었다. 3월 18일 이른바 ‘3.18참사’라 불리는 사건으로 베이징여사대 학생들이 몇 숨을 거두었다. 루쉰은 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숨어 지내야 했다. 결국 그해 여름 샤먼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 결과 본의 아니게 오랜 베이징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루쉰은 샤먼에서 오래 머물지 않았다. 한 학기를 지내고 광저우로 옮긴다.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상하이로 옮기고, 이후 생을 달리할 때까지 상하이에 머문다.

  

루쉰이 살아간 시대는 분명 부침이 많았던 시대였을 테다. 정치적으로도 시끄러웠으며, 문학운동의 방향과 역량을 두고 적지 않은 다툼이 있었다. 루쉰은 논란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때로 그의 글을 보면 논적들과 상대하며 고양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는 ‘비애’가 뚝뚝 묻어나지만, 논적들과의 싸움 가운데는 비애의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다. 어찌 보면 과장인 것 같은 모습마저 보인다. 추호의 타협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을 보면 물러설 곳 없는 벼랑에서 분투하는 한 인간의 모습이 그려진다. 


나는 어찌되었든 동서남북 위아래로 찾아 나서서 가장 지독하고 지독하고 지독한 저주의 글을 얻어 가지고 먼저 백화문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인간들부터 저주하려고 한다. 설사 사람이 죽은 뒤에도 정말 영혼이 있어 이 극악한 마음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진다고 해도, 나는 결코 이 마음을 고쳐먹거나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어쨌든 먼저 백화문을 반대하거나 방해하는 모든 인간들에게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아침꽃 저녁에 줍다 : 24효도> 


좋다. 타협도 없고 패배도 없다. 오직 멸망이 있을 뿐이다. ‘백화문을 해치는 자들은 다 멸망해야 한다!’ 문어文語를 버리고 구어口語를, 백화문을 쓰자. 옛 뿌리를 자르고 낡은 정신을 청산하자.  


좋다. 그런데 대관절 그는 왜 추억을 꺼내는 걸까? 옛이야기로 눈을 돌리는 건가? 이른바 ‘미래 소설’ 혹은 앞으로 있어야 할 이야기, 그것도 아니라면 앞으로 있을 법한 이야기 따위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미래에 대해 그가 품은 회의는 다른 곳에서도 쉬이 발견할 수 있다. 그는 ‘미래의 황금세계’ 따위에 눈을 두지 않는다. 미래란 허망할 뿐이며, 희망조차도 역시 허망할 뿐이다. 그렇기에 그의 글은 미래로 뻗어나가지 못하고, 깃발을 들어 사람들을 지휘하는 그런 용사는 되지 못했다. 그의 투창은 오직 현재를 노린다. 


그 분투의 현장에서 그는 왜 과거로 눈을 돌리는 건가? 루쉰 개인의 과거는 물론(조화석습), 중국의 낡은 이야기(고사신편)까지 꺼내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나의 실험일까? 다양한 문체와 주제를 실험해보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혹은 지쳐서 일까? 모두에 그의 말을 소개한 것처럼 ‘현재의 문제’로부터 관심을 끊고 싶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걸까? 오랜 베이징 생활을 정리하고 변화가 필요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면 그저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어 예봉이 꺾인 문인이 얼마나 많은가. 그는 이미 마흔 중반을 넘었다. 지금이야 아직 청춘인 나이지만 당시에는 청춘과는 거리가 먼 나이였다. 옛 공자의 말을 빌리면 ‘지천명’이 코앞이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글에는 글쓴이의 말에 담기지 않는 게 늘 있기 때문이다. 저자조차 자신의 글에 대해 일부만을 알 뿐이다. 의도나 목적이 늘 성공하지 않는 것처럼. 어떤 단절과 여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흥미로운 점은 그가 옛 추억을 들먹이는 순간에도 논적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거다. 그의 글은 논변이기도 하고 추억이기도 하다. 논적들은 그의 모호한 태도에 성을 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옛이야기를 들먹이는 이는 상대란 얼마나 껄끄러운가. 게다가 얼마간은 마치 조롱처럼 느껴졌을 수도 있다. 자신을 상대하는 척하다 슬쩍 이야기가 빗나나고 마니.  


루쉰의 이런 기묘한 태도는 그의 풍자적 문체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자신을 인식하는 방식과도 연결되어 있을 테다. 그에게는 현재적 문제가 늘 확실하나 거꾸로 현재적 문제를 대하는 그 자신은 늘 불투명하다. 루쉰, 노둔하고도(魯) 신속하다(迅)는 그의 이름처럼 그는 모순적인 인간이다. 자신에 대한 불신과 회의, 자기 존재에 대한 근본적 부정은 다른 글에서 끊임없이 발견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생을 누적한 인간으로서의 존재는 지울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 역시 기억과 추억을 지닌 인간이라는 평범한 발견을 만나는 것이다. 


더불어 이것은 <24효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오롯이 현재적 문제인 것은 아니다. 곽거의 이야기에서 볼 수 있듯, 자신의 어릴 적 경험에서 발견할 수 있듯, 이 문제는 과거로부터 누적되어 왔다. 그렇기에 간단치 않다. 그가 ‘황금빛 미래’의 예언자였다면 달랐을지 모른다. 과거를 뿌리 뽑고, 현재를 부정하며 이방의 것, 즉 미래를 그대로 심어 놓으면 된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말이란, 언어란 아무리 현재의 말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일부를 끌어오지 않을 수 없다. 누적된 역사와 흔적을 도무지 지울 수 없다. 다른 말로 완벽하게 바꾸는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이는 거꾸로 존재를 부정하는 동시에 존재를 인정하는 꼴이다.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그 자리에 들여놓으면 회의와 비애 따위는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존재를 회의하는 자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진정한 회의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늘 남아 있다. 


我常想在紛擾中尋出一點閑靜來,然而委實不容易。 目前是這麼離奇,心裡是這麼蕪雜。 一個人做到只剩了回憶的時候,生涯大概總要算是無聊了罷, 但有時竟會連回憶也沒有。 
나는 혼란 속에서 한가롭고 조용한 틈을 찾아보려고 늘 생각하지만 그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눈앞의 현실은 이렇듯 괴이하기만 하고 마음 속은 이렇듯 난잡하기만 하다. 사람이 해야 할 일 중에 오로지 추억만 남아 있다면 아마도 그 생애는 무료해졌다고 해야 할 것이나, 하지만 때로는 추억마저도 없을 때가 있다.
 <아침 꽃 저녁에 줍다 : 머리말>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아침 꽃 저녁에 줍다朝華夕拾’라고 했다. 아침에 핀 꽃을 저녁에나 되어서 주워보았자 이미 시들어버린 뒤일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당면한 것은 도무지 아침이란, 아침꽃이란 닿을 수 없게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상황이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루쉰이 <고향>에서 옛 친구를 만나고 거리감만을 느꼈던 것처럼 과거는 현재가 될 수 없다. 아니, 과거가 현재가 되어 얼굴을 들이미는 순간 추억마저 배신할 뿐이다. 다만 돌아볼 뿐이다. 

帶露折花,色香自然要好得多,但是我不能夠。 便是現在心目中的離奇和蕪雜, 我也還不能使他即刻幻化,轉成離奇和蕪雜的文章。 或者,他日仰看流雲時,會在我的眼前一閃爍罷。 
물론 아침 이슬을 함초롬이 머금은 꽃을 꺾는다면 색깔도 향기도 훨씬 더 좋을 터이나,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지금 내 마음속의 괴이하고 난잡한 생각조차 당장에 변화시켜 괴이하고 난잡한 글로 재현할 수도 없다. 혹시 훗날에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노라면 내 눈앞에 잠깐 번뜩일지는 모를 일이지만.
 <같은글> 


번뜩이며 눈앞에 나타나는 건 무엇일까? 지금으로서는 자세히 헤아릴 수 없다. 다만 그의 말을 곱씹어 볼 때, 아침도 저녁도 꽃도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다만 ‘줍는다拾’라는 행위에 눈이 간다. 모아두는 것, 무료하고도 쓸모없는 글쓰기를 통해 그는 자신을 대면하고 위태로운 존재를 대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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