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포르투나

2018 선농인문학서당 #4

by 기픈옹달
은둔한 현자인 장저와 걸닉이 함께 밭을 갈고 있는데 공자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다. 공자는 마침 강을 건너려고 나루를 찾던 터라 밭에 있는 그들에게 자로를 보내 물어보고 오게 했다. 자로가 그들에게 다가가니 장저가 물었다.
자로가 말했다.
“공구라는 사람입니다.”
“그 노나라 공구?”
“예. 그분 맞습니다.”
“췌! 그렇게 뭐든 잘 아는 공구라면 나루터 정도는 알고도 남을거 아이가!”
장저에게서 답 듣기는 틀렸다는 걸 안 자로는 이번에는 걸닉에게 물었다. 걸닉이 자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뉘시오?”
“예? 저요? 중유라고 합니다.”
“엥? 그럼 노나라 공구네 사람?”
“예, 맞습니다.”
“온 세상이 엉망진창으로 흘러가는디 뉘라서 이 흐름을 뒤집어엎겄는가? 글고 나쁜 사람만 피하는 사람보다는 혼탁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지그랴?”
그러더니 씨앗 북돋는 일만 계속할 뿐이었다.(그럼 나루터는......?) 자로가 돌아와 두 사람 말을 공자에게 전했다. 공자는 잠시 실망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탄식하며 말했다.
“어차피 우리가 짐승이랑 어울려 살 수는 없는 것이네. 내가 여기 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고 누구와 함께 살아가겠는가? 세상이 바른 길을 가고 있었다면 뭐하러 내가 세상에 들어가 애써 고치려 하겠나......”
<군자를 버린 논어>, 임자헌, 18-6


주나라가 힘을 잃자 각국의 제후들은 세를 불리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찾습니다. 군주들은 저마다 인재를 모아 힘을 키우고자 합니다. 부국강병, 약육강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지요. <사기>를 읽어보면 당시 활약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답니다.


오자서는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향 초나라를 떠나 오나라에 몸을 의탁합니다. 오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초나라 수도를 함락시킨 뒤 아버지를 죽인 초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채찍질하기까지 합니다. 그런가 하면 손빈은 뛰어난 재주 때문에 친구에게 버림받습니다. 친구의 모함으로 죄를 뒤집어쓰고는 불구의 몸이 되어 이웃 제나라로 도망치지요. 그 역시 군대를 이끌고 돌아와 옛 친구, 방연의 목숨을 빼앗습니다. 한편 상앙은 어떤가요. 그는 출세를 위해 서쪽 진나라에 몸을 의탁합니다. 진나라를 그 어떤 나라보다 부강하게 만들었지만 결국 시기를 받아 거열형, 몸이 찢기는 형벌을 받아 목숨을 잃습니다. 이런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다 공자를 보면 영 밋밋하기만 합니다.


<사기>를 읽어보면 밑바닥에서 시작해서 천하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도 여럿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관중이 있어요. 그는 본디 죄인으로 사형을 받을 처지였지만 친구 포숙아의 도움으로 제나라의 재상 자리에 오릅니다. 그리고 제나라는 단숨에 다른 나라를 위협하는 강대국으로 발돋움합니다. 훗날 진시황 곁에서 천하를 꿈꾼 이사 이야기를 봅시다. 이사는 화장실 쥐와 창고 쥐의 모습을 모고는 출세를 꿈꾸었다 해요. 화장실 쥐는 사람만 보면 잽싸게 도망치는데 창고 쥐는 느긋하게 지내며 알곡을 배불리 먹더라는 것이지요. 어떤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것. 이사는 진나라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로 합니다. 이후 결국 진나라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지요. 그러나 공자는 뭐, 크게 한 일도 없는 인물입니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고향 노나라에 돌아와 죽음을 맞습니다.


오늘날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거의 잊힌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면 틀린 이야기일 거예요. 여전히 <사기>를 비롯한 역사책에서 생생하게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공자에 비할 바는 못됩니다. 공자에 견주어보면 상대가 되지 못할 정도이지요. 그들은 생전에 공자, 노나라의 공구라는 인물이 있는지도 몰랐을 텐데 말입니다.


공자가 과연 관직에 올랐는가 여부는 논란거리이기는 합니다. 전통적으로 공자는 중도의 읍재를 거쳐 노나라의 ’대사구’라는 자리까지 올랐다고 전해집니다. 요즘으로 치면 도지사를 역임하고, 법무부장관을 했다고 할 수 있어요. 이 역시 <사기>라는 글에 실려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일전에 이야기했듯 이 내용을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공자가 그런 높은 관직에까지 올랐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읽는 <논어>에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공자가 관직과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말단 관리에 불과했거나 아무런 자리를 얻지 못했을 수도 있어요.


공자를 보면 그 삶이 순탄치는 못했던 것으로 보여요. 특히 <미자>를 보면 공자가 길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공자가 직접 만난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요. 보통 제자를 통해 간접적으로 만나 서로의 차이를 이야기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문장 역시 마찬가지예요. 제자 자로를 시켜 장저와 걸닉에게 나루터에 대해 묻습니다. 이야기는 자로와 장저, 걸닉 사이에 벌어지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공자입니다. 공자에 대한 이들의 평가, 공자의 삶에 대한 이들의 입장을 볼 수 있어요.


장저와 걸닉과 같은 사람을 보통 은자隱者, 숨어 사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세상일을 멀리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이예요. 춘추전국의 혼란 중에 이처럼 세상을 등지고 산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장저와 걸닉처럼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이들은 관직을 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이 엉망진창이 되어 어지럽게 되었다고 생각했던 까닭이에요. 관직을 얻는다 한들 제대로 일을 할 수도 없을뿐더러 자칫하다가는 혼란스러운 세상을 더 어지럽게 만들 거라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자로를 이렇게 꾑니다. ‘나쁜 사람만 피하는 사람보다는 혼탁한 세상을 피하는 사람을 따르지그랴?’


저는 나루터가 하나의 상징이라고 생각해요.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길목이라는 뜻의 나루터는, 다른 세계로 갈 수 있는 입구가 되기도 합니다. 어쩌면 공자는 답답한 이 세계를 벗어날 길을 찾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 지금의 현실에서 탈출구를 찾고 싶었던 열망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요. 장저와 걸닉과 같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그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이들의 대답은 영 시원치 않습니다. 이미 공자는 잘 알고 있을 거라 답합니다. 알면서 괜한 질문을 하는 거라는 말입니다.


이들의 해답은 이렇습니다. 자로에게 말한 것처럼, 자신들을 따라 관직을 얻어 세상을 바꾸겠다는 생각을 버리라는 것이지요. 여기서 이들이 말한 나쁜 사람을 피하는 일이란 뜻이 맞는 군주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다 다니는 공자의 삶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어디 간들 훌륭한 임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쓸데없는 짓을 그만하라 말합니다. 그러나 공자의 태도는 바뀌지 않아요. “어차피 우리가 짐승이랑 어울려 살 수는 없는 것이네. 내가 여기 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않고 누구와 함께 살아가겠는가? 세상이 바른 길을 가고 있었다면 뭐하러 내가 세상에 들어가 애써 고치려 하겠나......”


여러분은 운명(fortuna)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나요? 이와는 조금 다르지만, 옛사람들은 천명天命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선 천명이란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을 의미하기도 해요. 주나라가 무너지고, 춘추전국이라는 어지러운 세상이 벌어진 것도 천명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어요. 주나라에게 주어진 천명이 쇠하였기 때문에, 천명이 이미 끝났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생각했어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공자의 꿈은 허망한 꿈에 불과합니다. 한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천명은 다르게 보면 한 사람의 삶에 주어진 사명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각자 주어진 삶의 의무가 있다는 거죠. 공자는 옛 주나라의 문화를 보존하고 이를 후대에 전하는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논어>를 보면 목숨을 잃을 위험에 닥쳤을 때도 공자는 당당했답니다. 하늘이 준 사명이 남아 있는데, 쉽사리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런 면에서 보면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간 모습이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떤 사람은 공자를 두고 ‘안 되는 줄 알면서 하는 사람’이라 평가하기도 했어요. 세상의 방향은 정해졌는데 어리석게도 영 다른 방향으로 가려한다고 생각했던 까닭이예요. 과연 이런 공자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는 중요한 질문거리로 남습니다. 물론 어떤 선택이 더 좋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어요. 다만 이런 기회를 통해 각자의 가치관을 한번 따져보는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거예요. 공자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장저와 걸닉 같은 삶을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관중이나 이사 등의 삶을 추구하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그전에 앞서 이야기한 천명의 두 가지 의미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세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이 나라는, 우리 사회는 어떤 흐름으로 변화할까요. 옛사람들은 시대의 흐름을 거침없는 강의 흐름에 묘사하기도 했어요.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지 한번 따져봅시다. 한편 각자 하늘이 준 어떤 사명이라 할만한 것이 있을까요? 삶이 지닌 확고한 목적이나 방향이 있는지요. 만약 있다면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 어떤 결을 만들고 있나요. 흐름을 거스르는지, 아니면 흐름에 편승하는지, 아니면 흐름과 영 상관없이 꼿꼿하게 서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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