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선농인문학서당 #3
공자가 말했다. “진나라와 채나라에서 내가 곤경을 당했을 때 따랐던 자들 중 지금 내 문하생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11-2)
공자의 제자들을 재능을 보이는 분야에 따라 나눠보면 다음과 같다.
덕행: 안연, 민자건, 염백우, 중궁.
언어: 재아, 자공.
정치•행정: 염유, 자로.
문학: 자유, 자하.(11-3)
<군자를 버린 논어>
공자孔子, 그의 본래 이름은 공구孔丘입니다. 그러나 훗날 크게 영향을 끼쳤던 까닭에 이름보다는 ‘공자’라는 호칭으로 더 많이 불립니다. 여기서 ‘자子’는 존경의 의미를 담은 표현인데, 선생님 정도로 풀이할 수 있겠습니다. ‘공자’를 우리 말로 옮기면 ‘공 선생님’ 정도가 됩니다.
공자의 영어 이름은 Confucius. 이렇게 불리게 된 데는 조금 재미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선생님을 의미하는 한자 단어 가운데 ‘부자夫子’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를 ‘공부자孔夫子’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이 ‘공부자’를 중국어 발음으로 옮기면 ‘kǒngfūzǐ’가 됩니다. 여기서 Confucius라는 표현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발음만 옮겼다면 ‘Confus’정도가 되어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왜 ‘-cius’라는 표현이 덧붙여진 걸까요? 이는 공자를 서구에 처음 소개한 것이 예수회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라틴어를 주로 사용했고, 서구인에게 공자를 친숙한 인물로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치 라틴계 인물의 이름처럼 바꾸어 전한 것이지요.
이 이외에도 공자에게는 여러 별명이 있습니다. 지성至聖, 최고의 성인이라 불리기도 합니다. 그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던 까닭입니다. 황제들도 공자의 고향 곡부에 가서 공자 사당에서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곡부의 공묘孔廟는 문묘文廟라고도 불리는데 엄청난 크기를 자랑합니다. 황제는 수없이 바뀌었지만 공자에 대한 제사는 늘 지켜졌답니다. 공묘에 공자를 모신 대성전大成殿 앞에는 용을 조각한 기둥이 있습니다. 본디 용은 황제를 상징하는 동물인데 공자의 사당에 있는 것은 그만큼 공자의 위상이 높았다는 증거입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황제가 참배할 때에는 천으로 가려놓았답니다. 황제가 마음을 불편해할까 하는 이유에서.
개인적으로 4월 중국 여행에서 곡부를 들리기 전에 태산泰山에 올랐습니다. 태산은 대대로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산이었어요. 직접 올라보니 만만치 않은 높이이더군요. 재미있는 것은 산 정상 부근에 숙소가 있었는데, 숙소와 식당들이 있는 곳을 천가天街라 불렀다는 점입니다. 옛사람들은 태산 정상을 바로 하늘이라 생각했던 것이지요. 숙소에서 조금 더 오르면 태산의 정상, 옥황정玉皇頂에 이를 수 있습니다. 바로 옥황상제가 머무는 곳이지요. 그런데 그에 조금 못 미쳐 공자 사당이 있습니다. 태산 정상이 신의 세계인데, 신 바로 아래 공자가 있는 것은 사람들 가운데 공자가 최고라는 뜻이지요.
후대에 공자에 붙은 시호 가운데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시호가 가장 유명합니다. 공자의 묘에 가보면 비석에 세로로 적혀 있습니다. 풀이하면 ‘커다란 업적을 세운, 지극한 성인이며, 가르침을 널리 펼친 왕’이라 할 수 있어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왕’이라는 칭호를 얻을 만큼 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 바로 공자입니다.
그러나 저는 공자를 그런 대단한 인물로 소개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사 속에서 공자가 크게 존숭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인간 공자가 그렇게 대단한 인물인가는 모르겠습니다. 훌륭한 인물이기는 하되, 거의 신처럼 추앙받을 만한 인물인지 그렇게 공자를 이해하는 게 좋은 접근인지 의문을 던져봅니다. 그런 역사와 전설을 지우고 <논어>를 읽어보면 매우 소박하고 생생한 공자의 모습을 만날 수 있습니다.
뒤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여느 사람처럼 공자도 시대를 잘 만나지 못해 적잖은 고민을 한 인물이었답니다. 자신의 능력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하는 아쉬움에 가슴을 치기도 했습니다. 당대의 영향력만 두고 본다면 공자는 별로 역사에 남을 만한 위업을 달성한 것도 없답니다. 그런데 어째서 공자가 그렇게 높이 추앙받는 인물이 된 것일까요. 이는 그가 제자들을 길러내었기 때문입니다. 펑유란이라는 학자의 말을 빌리면 공자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선생이었답니다. 물론 그 이전에서 자신의 지식을 누군가에게 전하는 사람이 있었지요. 그러나 그들이 귀족 가문에 속해서, 관직을 얻어 그런 일을 수행했다면 공자는 사적으로 제자를 모았다는 점에서 크게 다릅니다.
주나라 왕실이 힘을 잃자 당시의 사회는 매우 어지러워졌습니다. 신분제도가 흔들렸고 그에 따라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공자는 제자를 모아 전통적인 지식을 가르치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마천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문하에는 제자들이 삼천 명이나 있었다고 해요. 그 가운데 이름을 떨친 제자도 70명이 넘었습니다. 그 가운데 공자가 직접 이름을 언급한 제자가 바로 <11-3>에 나오는 10명입니다. 후대에는 이들의 이름을 묶어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 부릅니다. 공자 제자 가운데 빼어난 10명이라는 뜻입니다.
이 제자들을 통해 공자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공자를 선생님으로 모시고 배운 것처럼 그들은 또 다른 제자들을 만들어 선생에게 배운 것을 전했습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를수록 그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공자로부터 출발한 생각도 체계적으로 틀을 갖추어 갈 수 있었지요. 이렇게 커다란 무리가 만들어지는데 이를 ‘유가儒家’라 부릅니다. 그런 면에서 공자는 최소의 ‘선생’이나 유가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先生'이라는 말이 어떤 인상을 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금 좋지 않은 의미로 쓰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예를 들어 ‘선생질’이라는 표현이 그렇습니다. 그저 남을 가르치려 하고, 사사건건 간섭하는 사람의 행동을 비꼬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본디 글자를 보면 가르친다는 뜻이 없습니다. ‘선생先生’이란 ‘먼저 살아간 사람’이라 풀이할 수 있어요. 먼저 태어나 산 것이 뭐 대수냐 하겠지만 과거 전통적인 농경 사회에서는 꽤 중요한 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경험한 것이 많은 만큼 아는 것도 많았을 거예요. 따라서 ‘선생’에는 본디 ‘배울만한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저는 종종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오늘날 교사는 많지만 선생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교사’란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을 말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교원자격증을 취득하면 교사 일을 할 수 있어요. 그러나 교사가 된다고 해서 선생이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가르칠 자격이 있다는 말이 곧 배울만한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무엇인가를 열심히 가르치지만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논어>를 열면 나오는 글자가 바로 ‘학學’입니다. 배움을 뜻하는 이 글자를 주희는 ‘본받음(效)’이라 불렀어요. 앞서 행동하는 것을 따라 한다는 것이지요. 선생이란 배울만한 삶과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뒤 사람이 그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운다면 더 좋은 길을 갈 수 있겠지요. 따라서 ‘선생’의 반대는 ‘후학後學’, 혹은 ‘학생學生'입니다. 뒤이어 배우는 사람이라는 뜻이예요.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공자는 살구나무 혹은 은행나무 아래에서 후학, 즉 제자들을 가르쳤다 합니다. 이를 ‘행단杏壇’이라 부릅니다. 행단을 오늘날 말로 옮기면 교실, 혹은 학교라고 할 수 있어요. 배움이 일어나는 장소 그곳이 바로 교실이고 학교이지요. 저 옛날 공자가 열었던 교실은, 그와 제자들의 학교는 비록 번듯한 건물은 없었지만 엄청난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보는 공자의 명성이 이를 말해줍니다.
허나 공자와 같은 훌륭한 선생도 늘 성공하는 건 아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 가운데는 공자에게 실망을 준 사람도 있고, 공자의 뜻과 어긋나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건 공자의 부족함이라기보다는 그도 그의 제자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공자의 제자들이 모두 공자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면 그건 학교가 아니었을 거예요. 공장이지.
<논어>에는 공자와 제자들이 나눈 다양한 대화가 실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투닥거리는 내용도 있고, 선생을 흐뭇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제자의 성격마다 대화의 내용도 조금씩 다르고, 공자의 태도도 바뀝니다. <논어>가 잘 편집된 책이 아니기에 이를 상세히 알기는 좀 힘들지만 제자들 각각의 모습에 주목해 읽어보면 적잖은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생생한 공자 학당의 현장을 문득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 가운데 몇을 소개합니다. 여러 제자 가운데 제가 손꼽아 주목하는 이들입니다.
우선 자로.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협객 출신이었다고 해요. 그는 공자가 유명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공자를 골려 주려 찾아옵니다. 그러나 공자의 말에 감화를 받고 그의 제자가 되기로 하지요. 공자보다 9살 어렸다고 하는데, 여러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협객 출신인 만큼 싸움도 잘해서 그가 공자의 제자가 된 이후 공자를 비방하는 소리가 사라졌다고 해요. 자로가 가서 혼쭐을 내주었던 까닭입니다.
공자의 제자가 되었지만 자로의 성격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그를 두고 ‘용맹을 좋아한다’ 표현하기도 했어요. 물론 좋은 표현은 아닙니다.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며, 앞뒤 안 가리고 달려는 통에 공자는 늘 자로에게 잔소리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로는 자로 대로 솔직한 성격인 탓에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공자 선생에게 따지기도 했습니다. 공자 면전에서 성을 내는 인물이지요. 버릇없는 제자라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지만 저는 그런 자로와 공자의 관계가 좋습니다. 자유롭고 활발한 공자 학당의 모습을 엿볼 수 있으니까요.
안연도 공자의 가까운 제자였습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해서 변변치 않은 음식만 먹었답니다. 그래도 열심히 공부했다 해요. 훗날 ‘안빈낙도’의 삶의 모델이 된 인물입니다. 그는 공자의 사랑을 크게 받았어요. <논어>에서 늘 공자의 이쁨을 받는 제자입니다. 공자보다 일찍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공자가 크게 슬퍼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공자 학당의 가장 우등생이라고 할 수 있어요.
자공은 안연과 달리 부자였다고 해요. 그는 공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다른 제자들과 함께 3년상을 치렀고, 다른 제자들이 모두 떠난 뒤에도 다시 3년 상을 치렀다고 해요. 훗날 여러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오르는데 사마천은 그 덕분에 공자의 명성이 크게 떨쳐진 건 아닐까 질문하기도 합니다. 말을 잘하는 제자로 손꼽히는데, <논어>에서도 훌륭한 말재주는 빛을 발합니다.
염유는 공자와 트러블이 많았어요. 허나 공자의 방랑을 끝내도록 도와준 인물이기도 합니다. 염유 덕분에 공자는 십수 년의 방랑을 끝내고 고향 노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어요. 다만 당시 계씨 가문에서 일하고 있던 염유와 공자는 생각이 달라 문제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공자는 염유를 파문한다며 성내기도 했어요.
그 밖에도 여러 제자들이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직접 책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공자의 제자 이야기가 더 궁금하다면 <사기열전>에서 <중니제자열전>을 꼽아 읽으면 됩니다. 도서관 등에서 제가 쓴 <공자와 제자들의 유쾌한 교실>을 한번 읽어보는 것도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