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에는 뭐 이런 곳이 있나 싶었다. 좁고 굽이진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왔다. ‘근대화수퍼’와 ‘현대부동산’ 게다가 ‘인류평화연구소’가 공존하는 기묘한 동네였다. 지금은 사라진 옛 정일학원의 커다란 건물은 이 낡은 동네와 기묘하게 어울리면서도 이질적이었다.
마음에 드는 것은 집값이었다. 대학로 이화동에서는 고작 방 2개짜리에 살 수 있었던 돈으로 이곳에서는 2층 자리 집을 구할 수 있었다. 싼 데는 이유가 있는 법, 버려진 집이었다. 집안에 가득 찬 쓰레기들을 치우고 나서야 살만하게 바뀌었다. 주인은 이 집에서 나고 자랐지만 강남으로 떠났단다. 그렇게 버리고 가는 동네였다.
10년 전, 이곳에 이사올 때에는 이렇게나 오래 살 지 몰랐다. 딱히 뿌리를 박고 살 동네라고 고른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질문에 답하기 곤란하다. 왜 이곳에 살고 계세요? 집 값이 싸서요. 남산은 물론 도심이 가까워서, 옛스런 분위기에, 힙한 문화 등등 따위는 살다 보니 체득된 장점들이다.
신흥시장은 컴컴하고 으슥한 곳이었다. 친구들과는 영화 찍기 딱 좋은 곳이라 했다. 뭔가 범죄의 온상 같은 기묘한 소굴. 실제로 굴과 같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하는 푹 꺼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무슨 담력 때문인지 한 밤에도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자곤 했다. 역시 별 이유 없었다. 더워서.
이곳 토박이는 ‘선의의 무관심’이 이 동네의 특징이란다. 뭐가 들어와도, 낯선 사람이 보여도 그리 간섭하지 않는단다. 실제로 거리에서 마주친 숱한 노인들은 별로 간섭하는 일이 없다. 어디서 왔느냐, 뭐하느냐,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이리해라 등등 별 말이 없다. 본이 뿌리 없는 이들이 와서 겨우겨우 뿌리를 내린 터전이라 그렇지 않을까.
평생 아파트 단지에서 살았다는 한 친구는 동네의 굽이진 골목들이 무섭단다. 거미줄처럼 엉킨 골목을 비집고 가면 근본 없이 만들어 놓았다는 점을 대번 알 수 있다. 어디로도 이어지지 않은 ‘막다른 골목’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큰 짐을 옮길 수 없는 골목도 있다. 골목을 걷다 보면 저 집엔 세탁기나 냉장고를 어찌 들여놓았을까 궁금한 집이 한둘이 아니다.
한 사업가가 다녀간 뒤로 동네가 시끄럽다. 그를 맞기 위함이었는지 굴처럼 시장을 어둡게 만들었던 슬라브 지붕이 사라져 버렸다. 동네에서는 ‘시장 상인의 숙원 사업’이라 했는데 정작 시장 상인이 누구인지 궁금하다. 왜냐면 이름은 시장이되 시장 노릇을 하는 가게는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그는 골목식당을 돌아다닌단다. TV를 잘 모지 않아서 인터넷 기사를 통해 동네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린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직도 인기는 식지 않았는데, 촬영하기 위해 열었다던 보라색 식당을 철거하고 있더라. 정작 골목 식당은 사라지고 거기엔 또 뭐가 들어올지 궁금하다. 좋은 터라고 쉬이 아무거나 들어오지는 못할 테다.
사람들은 방송을 보며 누군가를 칭찬하고 누군가를 비난한다. 허나 그들이 자리 잡은 지 고작 몇 달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도무지 알 수 없다. 테이블 하나를 놓은 좁은 공간은 창고였고, 뜨거운 불로 화려한 곳은 도시 재생 사무실이었던 곳이다. 뭐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바뀌면서 기억도 지워지고 동네도 사라지는 법이니.
TV에는 여러 식당으로 사람들의 구미를 당기는 모양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동네 사람들은 밥 먹을 곳이 없다며 투덜거린다. 한때 경리단의 부상을 두고 설왕설래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누구는 상권이 여기까지 올라올 거라 하고 누구는 턱도 없다 했다. 어느 신문기사에는 직장인이 없는 이 동네에 상권이 형성되기 힘들다며 투자를 재고하라 충고하기도 했다.
허나 돈의 흐름은 뭇사람의 생각보다 앞서가나 보다. 한 연예인은 건물을 통째로 책방을 차렸고, 한 연예인은 건물을 통째로 카페를 열었다. 그 시장통에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는가 싶었는데, 이제는 그들의 혜안에 감복할 뿐이다. 덕분에 부동산은 싱글벙글 웃음꽃이 피지 않을까 싶다.
‘고바우수퍼’라는 정든 이름의 가게가 사라지고 편의점이 되었다. 꼽아보니 이제 ‘새마을 슈퍼’만 남았다. 신흥新興, 새로운 부흥을 꿈꾸던 이 사람들의 꿈이 이루어진 것인가. 새마을처럼 단아하게 동네가 바뀌고 있다. 덕분에 멋진 이름의 부동산도 눈에 띈다. ‘대박 부동산’이라던가 ‘믿음 부동산’이라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