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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루쉰읽기

글쓰기와 싸움의 기술

루쉰, 전사의 글쓰기 #6

by 기픈옹달

루쉰은 생전 수많은 글을 남겼다. 그의 전집을 읽어보면 매달, 매년마다 꾸준히 글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주 적막을 말했지만 실상 그는 꽤나 시끄러운 사람이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그의 글에서 '적막'이 묻어 나오는 것은 그가 결코 가볍게 글을 쓰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는 술술 글을 써내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쥐어짠다'는 말로 자신의 글쓰기를 설명했다.


쥐어짜기란 기꺼운 일은 아니다. 기묘한 취미가 있지 않는 한, 자신의 몸을 쥐어짜며, 가슴을, 머리를, 생의 일부를 쥐어짤 리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가 쥐어짜내며 글을 썼던 것은 바로 그것이 그의 밥벌이였기 때문이다. 그에게 글쓰기란 생업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생을 유지하는 한 그칠 수 없는 일이었다.


집요하고도 꾸준한 글쓰기. 루쉰의 글쓰기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바로 이점이다. 따라서 뭐라도 써야 한다. 꾸준히 꾸역꾸역, 꾹꾹 눌러 무엇이라도 쥐어 짜내 볼 일이다. 문제는 그렇게 쥐어짜 보았자 동전 한 푼도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 문제는 아무래도 쉬이 해결 볼 수준의 것은 아닌 듯싶다. 그저 요즘 사람의 말로 '미래를 위한 투자'라고 퉁쳐버리자.


그렇지만 현재는 가깝고 미래는 아득하다. 미래를 위한 투자라 해보았자 그것이 언제 내 손에 화폐가 되어 굴러들어 올 지 알 수 없다. '존버' 끝에 그 날이 올 지도 모르나 그전에 쥐어짜고 말라비틀어지기 십상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쓰기에 눈을 돌려야 하는 것은 그의 글쓰기가 바로 지금, 발에 채이는 문제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 가운데 대다수는 미래의 독자를 위해 쓰이지 않았다. 현재의 원수, 적을 저격하고자 쓴 글이 대부분이다.


잡감雜感이라는 글 무더기는 대부분 투쟁의 산물이다. 그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상대했다. 특징이 있다면 매우 개별적으로 싸움에 임했다는 점이다. 어떤 학파를 구성하지도 않았고, 어떤 개념이나 대의명분을 걸치지도 않았다. 그때마다 손에 쥐는 무기로 적을 상대했을 뿐이다. 때문에 그의 글은 조리가 없고, 형식이 자유분방하며, 주제가 일정치 않다.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그의 글을 보면 그는 세계를 하나의 투쟁의 전장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싸움이란 특정한 상황의 특별한 사건이 아니다. 싸움이란 현실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전투'라 부를만한 것이 벌어졌다면 그것은 현실의 진면목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 예외적인 사건이 아니라, 현실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순간이 '전장'이다.


싸움이 일상이며 현실이라 하더라도 싸움의 양상은 늘 다르다. 마찬가지로 싸움에 대처하는 방식도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루쉰은 글쓰기라는 방식으로 이 싸움에 임했다. 따라서 루쉰을 전사라 한다면 이는 그의 평범하고도 억척스런 일상을, 그의 집요하면서도 꾸준한 글쓰기를 다르게 말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까닭에 그의 글은 호젓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 삶의 안녕 속에 적당히 부드럽게 삼킬만한 글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향을 음미하며, 여유를 즐기며 읽을 글은 아니다. 그렇다고 너무 진지하게 접근할 필요는 없다. 그런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전장의 황량함과 거칠음의 본질을 아는 사람이라면, 싸움이 일상인 사람이라면 그 제자리에서 그의 글을 읽으면 될 뿐이다.


그럼에도 망각이란 힘이 쎈 것이어서 자신이 전장에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곤 한다. 아니, 어쩌면 피곤하고 지친 탓에 일부러 무시하거나 고개를 돌려 애써 보지 않으려는 것일 수도 있다. 나에게도 그런 것이 적잖이 있다. 몇몇 관계며, 감당해야 하는 일, 청산하지 못한 책무들 까지.


헌데 인간사란 진솔한 것이어서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다. 기어코 그 문제를 눈앞에 들이밀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건물주와의 언쟁이 그런 상황이었다. 언제든 일어날 일이었고, 언젠가는 일어나야 할 일이었으며,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어쨌든 사건은 늘 갑작스러우며 대응은 미숙하기 마련이다.


철저히 대비하고, 준비했다면 미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얼마간 미숙함을 줄일 수 있겠지만 완전히 미숙함을 없앨 수는 없었을 것이다. 싸움이란 얼마간의 상처를 남기기 마련 아닌가. 결국 나에게 당혹스런 것은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 되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모든 싸움에는 상처가 있기 마련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문득 생각하기를, 죽음도 그렇지 않을까. 죽음도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고, 언젠가는 일어나야 할 일이지만, 사건은 늘 순식간이고 그 막막한 이후를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버겁다.


돌아와, 건물주와의 언쟁은 세입자라는 나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명확하게 직시하는 사건에 불과했다. 그러고 보니 세입자의 자리에서 벗어난 순간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망각하고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망각과 무시, 태만함과 상관없이 본질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다.


세입자란, 말 그대로 세를 내고 몸을 붙여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문제는 몸 붙여 사는 삶이란 계약서대로, 그렇게 단순히 말끔하게 떼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삶은 늘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기 마련이고, 이를 옮기는 것은 늘 얼마간의 아픔과 수고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계약이란 매섭게 날카롭지만 삶의 자국이란 그 날카로움으로도 말끔하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세입자는 제 뿌리를 조금이라도 덜 덜어내고자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고 건물주는 어떻게든 말끔하게 떼어내고자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 적대 속에 있지 않다. 늘 같은 비극이, 승패가 이미 정해졌다는 데 있다. 뿌리가 아무리 질긴 들 날카로운 칼로 쓰윽 베면 그만이다.


싸움이 기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쪽은 지지 않기 위해 싸우고, 한쪽은 빨리 싸움을 마무리하기 위해 싸운다. 싸움의 승패는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승자와 패자는 이미 정해져 있다. 다만 이 불합리한 전장을 어떻게 맞을지가 중요하다.


다시 루쉰의 말로 돌아오자.


"이러한 전사가 있어야 한다. —
그는 반짝이는 모젤 총을 멘 아프리카 토인처럼 몽매한 존재가 아니고, 목갑총을 찬 중국 녹영병처럼 무기력한 존재는 더욱 아니다. 그는 소가죽과 폐철로 만든 갑주 따위의 도움은 받지 않는다. 그는 맨몸으로, 야만인이 쓰는 투창만 들고 있다."
<들풀 : 이러한 전사>


그렇다. 야만인이 필요하다. 문명인의 무기는 전장에, 특히 불합리한 전장에 아무런 쓸모가 없다. 건물주와의 언쟁 끝에 내가 발견한 당혹스런 사실은 '권리'를 부여잡고 상대할수록 내 자신이 약자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는 점이었다. '권리'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꺼내 드는 방패와도 같지만, 방패를 갑주를 몸에 두를수록 뒷걸음치게 된다. 그러니 야만인이 될 것. 맨 몸으로 대할 것. 그래야 뒷걸음치지 않고 당당한 가슴으로 상대할 수 있을 테니.


그렇다고 맨주먹 맨손으로 상대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무엇이 되었든 그때마다 적당한 무기를 찾도록 하자. 투창 같은 것이면 좋다. 상대의 심장을 노릴만한 것.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인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착하지 말 것. 예의를 차리지 말 것. 상대를 배려하며, 측은지심과 배려심을 발휘하지 말 것. 왜? 인사는, 예의 차림은 용맹함을 꺾는 것은 물론, 상대의 비수를 보지 못하게 한다. 인사하며 고개를 숙일 시간에 상대를 똑똑히 지켜볼 일이다.


"그가 무물의 진으로 들어서자 마주치는 사람마다 한 본새로 인사를 한다. 그는 이런 인사가 적의 무기라는 것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람을 죽이는 무기라는 것을 안다. 수많은 전사가 그것 때문에 멸망하였다. 그것은 포탄처럼, 용맹한 전사들을 맥 못 추게 하였다."
<이러한 전사>


거듭 강조하지만 야만인이 될 것. 야만인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 실상을 본다. 게 중에는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다며 그 중간 어딘가를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다. 허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중간은 없다는 점이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전장이란 없다.


노파심에 말하면 심장이 중간에 있다고 자처하는 자들이야 말로 더 악독한 자들이다. 그들은 전장의 피냄새를 거부하며, 이를 우애와 화합으로 덮으려 한다. 그 우애와 화합으로도, 사랑과 용서로도 그 핏자국은 씻기지 않는다. 그들은 종종 핏자국은 남겨둔 채, 피를 철철 흘리는 이는 그대로 버려두는 것을 사랑과 용서라고 말한다.


제 스스로 심판관의 자리에 오르려 하는 자들. 어쩌면 그들은 원수보다 더 원수 같은 자라 해야 한다. 적어도 원수는, 적은 설령 가면을 쓰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전장의 현실을 감추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목소리로 맹세하며 말한다. 자기들 심장은 가슴 한가운데 있어서, 심장이 한쪽에 치우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
그러나 그는 투창을 들었다.
그는 엷게 웃으면서 한쪽으로 치우치게 창을 던졌고, 창은 심장에 명중하였다."
<이러한 전사>


투창을 던져라. 설령 승리를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얼마간의 상처는 입히고 볼 일이다. 인정이란 합리적이어서 싸움 뒤에는 서로의 상처를 계수하기 마련이다. 적자 인생이라지만 전장의 상처마저 적자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동점을 만들 수는 없을지언정 얼마간의 불편함과 상처, 모욕감을 선물해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양생술을 익혀둘 것. 삶을 보살피는 법을 미리 배워두어야 한다. 상처를 싸매는 법, 고통을 내비치지 않는 법, 적당히 쉬고 체력을 비축하는 법, 때로는 우군을 불러오고, 지형과 지물을 이용하는 법 등등.


싸움의 기술이란 이 밖에도 한참이나 많을 것이다. 애써 다 헤아리지 못하는 것은 이제 반쯤 비켜 나와 좀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늘 똑같은 싸움은 없으며, 마찬가지로 똑같은 전장이 없을 테니 이를 일일이 거론한들 유익을 보장할 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한 번쯤 보아 두고 가늠해두면 적잖이 유익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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