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 전사의 글쓰기 #7
12월이면 세상이 시끄럽다. 화려한 불빛이며, 흥겨운 분위기까지. 언제부터일까? 12월이면 들뜨던 마음이 사라진 것은. 아마도 성탄을 다르게 기념하기 시작한 때가 아닐지. 어린 시절 성탄절은 한 해의 중요한 날 가운데 하나였다. 그날은, 어쨌든 그날은 행복했다. 아니 행복해야 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아기 예수 나신 밤.
교회의 친구들과 새벽에 교인들의 집을 찾아가 캐럴을 들려주던 일은 아득한 추억이 되었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노엘, 노엘, 노엘... 그날은 겨울밤 새벽 공기도 전혀 춥지 않았다.
그와는 전혀 다른 스산하고도 냉기가 뼈에 스치는 성탄을 기억하기도 한다. 아마 2009년이었을 것이다. 몇 달 전 사람이 불타 죽었던, 참혹하고도 참혹한 사건이 벌어진 그곳, 용산역 앞 좁은 골목이었다.
별 기억이 남아 있지는 않다. 추위에 오돌오돌 떨면서도 그곳에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날만은 그곳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슬프기 그지없던 성탄이었다. 어느 날인가 그 거리에서 펑펑 울었다.
12월 25일이 예수의 생일이라는 것은 거짓이다. 훗날 로마 황제의 공인을 받은 뒤, 태양신의 기념일을 예수의 생일로 삼았다. 1/356의 확률이 없는 건 아니지만, 예수는 그날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어느 날 태어났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조차 성서는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그가 죽은 곳은 분명하다. 그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죽었다. 십자가 형을 받았다. 십자가 형은 로마의 잔혹한 공개 처형 방식이었다. 죄인을 십자가에 매달아 공포를 심어주었으며, 죽임 당하는 자들에게는 치욕을 안겨주었다. 명예로운 죽음도 깨끗한 죽음도 아니었다.
성서는 예수의 곁에 둘이 더 십자가 형을 받았다고 전한다. 흔히 '강도 robber'로 번역되는데, 혹자는 이를 '도적 bandit'이라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도란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다. 예나 지금이나 강도는, 도둑은 어디에나 있다. 헌데 잡범을 뭣하러 수고롭게 십자가를 세워 매달았을까?
'도적盜賊'이란 강도와 다르다. 이들도 남의 것을 빼앗는다. 그러나 도적은 소매치기를 하지 않는다. 담을 넘지 않는다. 도리어 이들은 지주를, 관아를 노린다. 그래서 '적賊'에는 '해롭다'는 뜻이 있다. '도盜'에는 '무리'라는 의미도 함께 들어 있다. '해로운 무리'가 도적이다. 허나 다시 질문해야 하는 것은 누구에게 무슨 해를 끼치는가 하는 점이다.
예수는 위인이 아니다. 그는 결코 찬양을 받을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십자가 위의 예수가 보여주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너희도 이처럼 될 수 있다'는 엄포. 공포와 치욕을 심어주기 위한 도구. 왜? 그가 '해로운 무리', 도적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수괴首魁!
루쉰은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말한다. 대다수의 사람이 '종', 노예의 자리에 놓여 있다. 적어도 그는 모든 사람이 하하호호 노래하는 그런 평등하고 고른 세상에 살지 않았다. 인간 세상이란 모래바람이 불어오는 사막과도 같다. 사막이라니 고요하고, 호젓하며, 장쾌한 멋이 있겠다 생각할지 모르겠다. 허나 그가 말하는 사막이란 '혼돈스럽고, 음침하고, 요상'한 공간이다. 모래바람이 불어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모래바람이 얼굴은 물론 속살로 파고들어 할퀴는, 도리어 까마득한 절망의 대지로 압박하는 공간이다.
그 속에서 인간은 할퀴어 상처 입을 수밖에 없다. 그래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신선 놀음하는 이들이 있다. '진기한 꽃이 활짝 핀 뜰에서 젊고 아리따운 여인이 한가로이 거닐고, 두루미 길게 울음 울고, 흰 구름 피어나고' 운운하는 이들. 루쉰은 이들을 총명한 사람이라 일컫는다. 행적을 보면 총명하다는 말은 그래도 상당 부분 이들의 미덕을 덜어낸 말이다. 그들은 총명한 동시에 동정과 위로를 가진 선량한 인물이기도 하다. 종, 노예의 탄식을 들은 총명한 사람을 보라.
"허..." 총명한 사람이 탄식을 하는데, 눈언저리가 발그레한 게, 금시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았다.
"선생님! 저는 이렇게는 살 수 없습니다. 달리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하지만 그 길이 무엇일지?..."
"내 생각엔, 언젠가는 나아질 거네..."
"그런가요? 그리 되기만 바랄 뿐입니다. 그럴 수만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선생님께 하소연할 수 있었고, 선생님도 저를 불쌍히 여겨 위로해 주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한결 가뿐합니다. 하늘이 무심치 않으셔라..."
<총명한 사람, 바보, 종>
총명하고 선량한 사람 덕택에 종은, 노예는 다시 하루를 더 살아갈 수 있었다. '언젠가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서. 그러나 희망은 멀고 고통은 가까운 법. 종은 다시 하소연할 상대를 찾기 마련이다. 동정을! 위로를!
종과 총명한 사람이 있다면 마지막으로 바보가 있다. 바보는 못된 인간이다. 그는 종의 하소연을 끝까지 듣지도 않는다. 그것뿐인가? 동정과 위로는커녕 도리어 이렇게 반문한다.
"주인한테, 창문 하나 내 달란 말 못하는가?"
<총명한 사람, 바보, 종>
동정도 위로도 없는 이 인간은 앞장서 못된 짓을 저지르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단숨에 종이 사는 집을 찾아가 '냅다 흙벽을 부수'어버렸다. 오늘날 우리는 그의 부덕을 수 없이 찾아낼 수 있다. 거듭 말하지만 그는 동정도, 위로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다. 게다가 남의 재산을 함부로 훼손하기까지 했다. 무단침입, 재산손괴 등등의 죄목이 그에게 달라붙을 것이다.
"선생님! 무슨 짓이세요?" 깜짝 놀란 종이 말했다.
"창구멍을 하나 내주려고 그런다."
"안 됩니다! 마님께 혼납니다!"
"그따위 게 무슨 상관이야!" 바보가 계속 부수었다.
"게 누구 없소? 강도가 우리 집을 부수고 있소! 빨리들 오시오! 집에 구멍이 뻥 뚫릴 판이오!..." 종이 울면서 소리쳤다. 떼굴떼굴 땅바닥에 뒹굴렀다.
<총명한 사람, 바보, 종>
그래! 바보는 강도나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다행히 루쉰의 글 속에서 강도는 종'들'에게 내쫓김을 당할 뿐이었다. 돌팔매질을 당하지도,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욕보임을 당하지도 않았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종이 "잘했다"는 주인의 칭찬을 받는 것으로 끝난다. 참, 종이 총명한 사람을 다시 만나 감사 인사를 드리는 내용도 빠뜨릴 수 없다. 총명한 사람이 말한 사정이 나아지는 것이란 바로 이런 상황을 말한 것이었다. 바보, 아니 강도를, 도적 같은 놈을 내쫓았기에 주인에게 칭찬을 받아 의기양양할 수 있다는 것.
루쉰은 이 셋의 이후를 말하지 않는다. 다만 제 버릇 남 못주는 게 인간의 본성이니 비슷한 일이 또 벌어지리라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종은 며칠 안 되어 또 하소연을 하며 돌아다닐 테고, 총명한 사람은 그 선량함으로 종을 위로하고는 그 일터로 돌려보낼 테다. 바보는? 다시 어느 집 담을 허물겠지.
루쉰의 강도란 담을 넘는 자가 아니라 담을 허무는 자이다. 앞의 말을 빌리면 도적이라 해야겠다. 차이가 있다면 그 바보가 혼자였다는 점이다. 루쉰이 바보떼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아마도 그가 맞은 시대의 참혹한 어둠 때문이리라. 그는 무리대 무리의 전투보다는 '참호전'을 주장했다.
루쉰은 당대에 많은 욕을 먹었다. 그 가운데는 '학비學匪'라는 손가락질도 있었다. 학계의 비적匪賊이라는 뜻이다. 먹물을 먹어 글을 쓰는데, 세상에 못된 짓이나 한다는 말이다. 당시에는 세상이 어지러워 지역마다 일어난 비적떼가 있었다. 이를 토비土匪라 부른다. 그것뿐인가? 루쉰 말년에는 이 못된 놈들이 세력을 만들었다. 이들을 홍비紅匪, 붉은 비적(Red Bandit)이라 불렀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는 공비共匪가 있다.
역사는 비정한 것이어서 총명한 사람의 지혜도, 그의 선량함도 집어삼키기 마련이다. 붉은 도적떼가 커다란 대륙을 붉게 물들였다. 루쉰은 붉은 비적들이, 무식한 바보들이 떼가 되어 우르르 몰려들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모르겠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훗날 이 붉은 비적떼가 루쉰의 글을 손에 쥐고 있었다는 점이다.
반역의 맹사가 인간 세상에 출현한다. 그는 우뚝 서서, 이미 달라졌거나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폐허와 무덤을 뚫어본다. 깊고 넓은, 오래된 고통 일체를 기억하고, 겹겹이 쟁여지고 응어리진 피를 직시한다. 죽은 것, 태어나고 있는 것, 태어나려는 것, 태어나지 않은 것 일체를 속속들이 안다. 그는 조물주의 농간을 간파하고 있다. 그가 떨쳐 일어나, 인류를, 소생시키거나 소멸되게 할 것이다. 이들 조물주의 착한 백성들을.
조물주, 비겁자가 부끄러워 숨는다. 하늘과 땅이 맹사의 눈앞에서 색을 바꾼다.
<빛바랜 핏자국 속에서>
총명한 사람, 바보, 종. 셋 가운데 예수는 누구에 가까울까? 아무래도 바보에 가깝지 않을까. 그는 호소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즉각' 해결해주었다. 성서는 앉은뱅이가 걷고, 눈먼 자가 눈을 뜨며, 귀머거리가 듣게 되었다 말한다. 그것뿐인가? 굶주린 자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는 '언젠가는' 배부를 것이라 말하지 않았다.
훗날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기억하던 그는 당대의 강도, 도적, 비적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그러니 십자가에 못 박자. 땅. 땅. 땅. 그러나 역사는 이런 '해로운 무리'는 들풀보다 질기다는 점을 증거 한다. 짓밟고 베었으나 다시 또 다른 들풀을 낳았다.
들풀은 뿌리가 깊지 않고 꽃도 잎도 아름답지 않다. 그렇지만 이슬과 물, 오래된 주검의 피와 살을 빨아들여 제각기 자신의 삶을 쟁취한다. 살아있는 동안에도 짓밟히고 베일 것이다. 죽어서 썩을 때까지.
<들풀: 제목에 부쳐>
그러나 사람들은 예수를 '샤론의 꽃'으로 기억한다. 샤론이란 정체불명의 꽃이다. 사람들은 이 꽃이 향기롭고 화려하며 아름답다 생각했다. 그 샤론의 꽃보다 예수가 더 향기롭고, 화려하며, 아릅답다고 아니 그래야만 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들풀은 들풀일 뿐이다. 그는 나사렛 출신의 촌뜨기에 무지렁이였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어디로 그물을 던질까 고심하는 소심쟁이 갈릴리 어부들이 그의 친구였다. 겨자씨의 비밀을 아는 농부들이 그의 친구였다.
그는 광야를 아는 인물이었다. 막막한 그곳이야 말로 지독히도 두터운 현실의 벽을 깨뜨릴 수 있는, 적어도 무엇인가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존재가 튀어나올 수 있는 공간이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었느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었느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럽게 사는 사람들은 왕궁에 있다. 그렇다면 너희는 무엇을 보러 나갔었느냐? 예언자냐? 그렇다. 그러나 사실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보았다."
<루가 7:24-26 (공동번역)>
왜 '훌륭한 사람'은, '예언자보다 더 훌륭한 사람'은 화려한 왕궁에 없을까? 안락함으로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혹여 필요한 것이 있다면 '영원'일 테다. 지금 있는 이 상태가 지속되기를, 변화도 변혁도 개혁도 혁명도 없기를. 천년만년 오늘만 같기를.
번쩍이는 화려함은 어둠을 몰아낸다. 그러나 어둠은, 그림자는 영영 사라지지 않는다. 번쩍이는 화려함으로 잠시 몰아내었을 뿐이다. 오늘 같은 내일을 꿈꾸는 자들은 어둠을 몰아내기 바쁘다. 세상은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행복으로 충만하다. 이것이 그들의 복음이다.
설사 오늘 그늘이 지더라도 내일을 기대하자.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내일이 구원해주리라는 믿음은 늘 현재를 유예한다. 그러므로 희망은 허망하다. 내일은 언제나 내일일 뿐이므로. 내일은 결코 오늘이 되지 않는다. 오늘이 내일이거나 내일이 내일이거나.
오늘을 오늘로 사는 법은 떼어낼 수 없는 현실의 지독한 문제를 직시하며 바라보는 것이다. 그림자를 떼어내는 방법은 없다. 중국의 옛 철학자는 한 어리석은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림자를 떼어내기 위해 죽도록 달리다 죽어버렸다는. 그러므로 '몸소 이 공허 속의 어둔 밤에 육박하는 수밖에 없다.'<희망>
루쉰이 그려내는 전망은 뭇사람들의 생각과 다르다. 그림자를 떼어내지 않고 그림자를 직시한다면, 그 어둠 속에 세계를 또렷이 볼 것이라고. 그러므로 성 안의 화려함에 취하지 말고, 성 밖의 황량함에 눈을 돌릴 것. 어두운 밤에, 그림자에, 캄캄한 세계의 밑바닥에...
"내가 암흑 속에 가라앉을 때에, 세계가 온전히 나 자신에 속할 것이오." <그림자의 고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