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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Mar 06. 2019

구체적 행동을 요함

<마오쩌둥 주요 문선>에서 <실천론>, <모순론>

<레드마오 세미나> 발제문 
http://experimentor.net/seminar?vid=26


촘촘한 일정이 흐트러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난징에 도착하자마자 숙소에 짐을 풀고 중산릉으로 향했다. 그런데 웬걸, 월요일이라 쉰단다. 아뿔싸! 남경南京, 현대 중국의 또 다른 수도에 애써 들린 이유가 사라졌다. 이미 시간은 많이 흘렀고,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다 관광지도에 나와있는 한 곳을 목표로 삼았다. 대보은탑. 청말 태평천국 운동으로 파괴된 절터에 현대 기술을 접목시켜 근사한 탑을 만들어 놓았다. 그 탑이 자아내는 야경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현대 기술로 자아낸 선경仙境이었다. 그곳에서 극락을 체험하고, 부처의 보리수 아래 깨달음을 엿보았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대보은탑을 나서며 이렇게 정리했다. 미래불未來佛을 보았노라고.


이튿날 상하이 와이탄의 야경도 혼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다. 돌아와 생각하면 대체 무엇에 그렇게 사로잡혔나 의문이 든다. 여행에 들떴기 때문일까? 아니면 적당히 비도 내려 분위기를 돋았기 때문일까. 그것은 상하이라는 공간이 빚어내는 또 다른 중국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일 테다. 화려한 불빛, 멋들어진 건물들도 눈을 사로잡는 요소겠지만 또 다른 시공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19세기의 향취, 20세기의 흔적, 그리고 한 발 혹은 반 발짝 앞서 있는 21세기의 모습까지. 


전통과 현재가 포개어진, 그리고 미래적 향취가 물씬 풍기는 두 공간을 경험하며 다시 중국은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가 되었다. 대관절 중국은 어디에 있는가? 그나마 이 기묘한 형상을 표현할 말이 있다면 '기묘한 혼종'이라 해야겠다. 과학과 종교, 동양과 서양, 과거와 미래 등등 뒤섞임 자체가 끊임없이 물음표를 만들어낸다. 


마오 역시 이 곤혹스러움의 연장에 있다. <실천론>과 <모순론>에서 그가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은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말이다. 이 말을 달리 옮기면 자신의 이론이야 말로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이라는 주장이다. 과연 마오가 그의 주장처럼 마르크스와 앵겔스 그리고 레닌과 스탈린을 잇는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논하기 힘들다. 이는 글쓴이의 역량을 벗어나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이론가로 크게 주목받지는 않는다는 점을 짚어두자. 여느 사람들에게는 이 다섯, 마르크스 - 엥겔스 - 레닌 - 스탈린 - 마오가 함께 묶인 초상이 그저 하나의 순진한 선전물로 보일 테다. 


사실 오늘날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말은 결코 매력적인 주제가 아니다. 세계의 모순과 대립, 운동과 통일, 변혁과 발전을 이야기하는 이 이론은 이미 낡은 이야기가 되었다. 마오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변증법적 유물론이야 말로 유일한 참된 이론인가는 잘 모르겠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그렇듯, 나에게도 이는 큰 관심사가 아니다. 이는 역사의 발전과 사회의 변혁이라는 주제에 별 관심이 없는 까닭이기도 하다. 그 역시 낡은 이야기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실천론>과 <모순론>을 읽으며 낡은 글을 뒤적이는 냄새를 지울 수는 없었다. 허나 그의 <실천론>의 부제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论认识和实践的关系—知和行的关系' 인식과 실천의 관계, 곧 이것은 앎(知)과 행동(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의 글에서 이 개념, 지행知行이 전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도리어 지식知识 혹은 행동行动이나 실행实行이라는 표현이 더 쉬이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의 매듭 말, '这就是辩证唯物论的全部认识论,这就是辩证唯物论的知行统一观。: 이것이 바로 변증법적 유물론의 인식론 전체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의 앎과 함의 통일론이다.(이등연 역)'라고 했을 때 이것이 중국의 오랜 문제,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주제를 끌어당기는 것이라 생각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실천론>은 1937년 7월, 그러니까 시안사변이 일어나고 두 번째 국공합작 즈음에 쓰였다. 이 글은 예안의 '항일군사정치대학'의 강연록을 바탕으로 한다는데, 당시 상황은 중요한 분기점을 목전에 두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마오는 우익기회주의와 극좌공론주의 혹은 모험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전자는 인식의 부족이며, 후자는 실천의 과잉이다. <모순론>의 내용을 참고하면 전자는 천두슈의 노선을, 후자는 국민당의 공세에 대응하여 진지전을 주장한 입장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각각 27년과 34년의 사건을 겨냥하고 있다. 거꾸로 이는 마오의 방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장정이라는 하나의 거대한 모험(마오가 비판하는 것과는 다른 표현으로서의 모험) 이전에 이러한 이론적 탐구가 있었을까? 아니면 대장정의 경험이 <실천론>과 <모순론>과 같은 이론적 저술로 이어진 것일까? 어쨌든 중요한 것은 마오가 두 글에서 끊임없이 자기 이론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인식과 실천을 이야기할 때의 인식과 실천이란 보편적 철학적 태도로서의 인식과 실천을 말하는 동시에, 그것은 중국의 독특한 인식과 실천이며 1937년 현재의 구체적 상황 위에서의 인식과 실천이기도 하다. 


관념론과 기계적 유물론, 기회주의와 모험주의는 모두 주관과 객관의 분열, 인식과 실천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과학적 사회적 실천을 특징으로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인식론은 이러한 그릇된 사상을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마르크스 주의자는 세계의 절대적이고 총체적인 발전 과정 속에서 개개의 구체적인 과정의 발전은 모두 상대적이기 때문에, 절대적 진리의 큰 물줄기 속에서 각각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하나의 구체적 과정에 대한 인간의 인식도 상대적인 진리성밖에 갖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무수한 상대적 진리의 총화가 곧 절대적 진리이다. ... 마르크스•레닌주의에는 결코 진리의 종착점은 없으며, 그것은 부단한 실천을 통해 진리의 인식으로 가는 길을 개척해나간다. 우리의 결론은 주관과 객관, 이론과 실천, 그리고 앎과 함의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통일이며, 구체적 역사를 떠난 모든 '좌익' 또는 우익의 그릇된 사상에 반대하는 것이다. (<마오쩌둥 주요 문선: 실천론> 32~33쪽.)


따라서 그의 글이 어째서 '인식론'이 아니라 '실천론'이라는 제목을 얻게 되었는지도 명확해진다. 그가 당면한 문제는 인식이라는 보편의 주제기보다는 그가 강조한 '구체적 역사' 위에서의 구체적 실천이 무엇이냐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그가, 마오주의가 가지고 있는 구체적 실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그 구체성의 특징의 정체가 중요하다. 


그는 <모순론>에서 '모순의 특수성'이라는 주제를 통해 특수한 상황에 직면할 수밖에 없는 점을 역설한다. 모든 모순은 상이한 형태로 존재한다. 여기서 더 중요한 점은 상이한 모순은 상이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점. 그가 던진 질문을 참고하도록 하자. 


왜 러시아에서는 1917년 2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 같은 해 10월의 프롤레타리아사회주의혁명으로 직접 연결되었는데 프랑스의 부르주아혁명은 사회주의혁명으로 직접 연결되지 못한 채 1871년 파리 코뮌은 끝내 실패하고 말았는가? 또한 왜 몽고와 중앙아시아의 유목제도는 사회주의와 직접 연결되었을까? 왜 중국의 혁명은 자본주의의 길을 피해 사회주의로 직접 연결되었으며 서양 국가의 낡은 역사적인 과정으로 나아가거나 자산계급독재시기를 거칠 필요가 없었을까? 다름이 아니라 이것은 모두 당시 구체적인 조건 때문인 것이다. (<마오쩌둥 주요 문선: 모순론> 78~79쪽.)


구체적인 조건은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여기서 중국 혁명의 모습이 갖는 특이성을, 중국의 사회구조가 갖는 이질감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오는 현재 자신의 길이 모두의 길인 동시에,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거듭 역설하고 있다. 


이런 특징 위에서 그가 항일 투쟁을 강조한 이유도 발견할 수 있다. 모순에는 주요 모순과 부차 모순이 있는데 부차적인 모순들은 주요 모순에 종속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재 중국은 어떠한 모순에 직면해 있는가? 무산계급과 자산계급의 모순, 인민대중과 봉건제도의 모순, 식민지와 제국주의의 모순, 노동자계급과 농민계급 사이의 모순...(50쪽) 등등이 있다. 흥미로운 점은 마오가 현재 직면한 일본과의 갈등을 단순히 민족적, 문화적 문제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중적으로는 이 지점이 더욱 크게 영향을 끼쳤을 테지만, 소국이 대국을 침범하며 오랑캐가 주인행세한다는 것이 더욱 큰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겠지만, 마오는 그러한 점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제국주의의 침입을 받은 반(半)식민지국가라는 현실에서 출발한다.


제국주의가 이러한 나라에 침략전쟁을 일으켰을 때, 이러한 나라의 내부 각 계급은 일부 매국노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시적으로 단결하여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민족전쟁을 수행한다. 이때 제국주의와 이러한 나라 사이의 모순이 주요 모순이 되고, 이러한 나라의 내부 각 계급간의 모든 모순(봉건제도와 인민대중 간의 주요 모순을 포함하여)은 모두 일시적으로 부차적•종속적인 위치로 떨어지게 된다. 중국의 1840 아편전쟁, 1894년 청일전쟁, 1900년 의화단전쟁, 현재의 중일전쟁은 모두 이와 같은 상황이다. (<마오쩌둥 주요 문선: 모순론> 63~64쪽.)


따라서 그의 주장을 참고하면 국공합작은, 항일전선을 위한 연합은 정치적 행동이 아니다. 이는 변증법적 유물론의 또 다른 실천 가운데 하나이며, 현재의 주요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행동일 뿐이다. 과연 정말 그가 그렇게 생각했는지, 당시의 인민들이 그러한 관점을 가졌는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그의 이론가적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1937년 중국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공산당은 대장정을 마치고 겨우 살아남았으며, 국민당은 서북지역을 배경으로 또다시 초공작전을 펼칠 요량이었다. 장쉐량은 시안사변을 통해 병간兵諫을 시도했고 이 위태로운 시도는 결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연합을 이끌어낸다. 일본은 이듬해 난징을 함락시키고 '대학살'이라 일컬어지는 만행을 저지른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다지만 저 가운데 하나의 사건도 없었다면 중국의 미래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도 굵직한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는 바람에 만약이라는 가정조차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아 중국은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좀 다른 나라, 좀 다른 세계의 부상을 목도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어쩌면 중국을 대하고 느끼는 이러한 낯섦은 마오가 지적했던 인식과 실천의 괴리 속에서 튀어나오는 것은 아닐까. 중국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할지. 현재의 구체적인 행동은 여전히 빈칸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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