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집밖을 나서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에 있어보고 싶었다.
미루고 미루었던 일을 시작했다. 한켠에 처박아둔 원고를 다시 꺼내어 손보고 있는 중이다. 늘 그렇지만 원고를 보는 시간은 때로는 환희의 시간이며 때로는 자괴의 시간이다. 좀 묵혀둔 글을 읽으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글은 타자의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글은 스스로 보아도 제법 그럴듯 하여 탄성을 자아내곤 한다. 허나 어떤 글은 들춰 보는 것만으로도 한숨을 부르곤 한다. 글쓰기란 제 자신에 대한 근거 없는 사랑이 없이는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허나 한편으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 많은 모멸의 이유를 감내하는 것이기도 하다.
꾸역꾸역 쓰다보니 제 문체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것 같은데 그리 반가운 대상은 아니다. 세련되지도 못하고, 유려하지도 못하다. 건조하며 뚝뚝 끊긴다. 그것도 멋이라면 멋일테지만 널리 사랑받기는 어려울테다. 요 며칠은 낡은 감수성과 낡은 문체에 괴로워하였다. 팔리는 글을 써야한다는 조바심과 무관한 낡고 서투른 글이라니.
어제 이욱연 선생의 책을 다 읽었다. 제목은 이렇다. <이욱연의 중국 수업>, 좀처럼 손에 잡지 않을 제목의 책이다. 순전히 우연이라고 해두자. 급히 살 책이 있어 서점을 들렸는데, 낱권 하나만 들고 오기 뭣해 한 권을 더 골랐다. 중국을 다녀왔으니 중국에 대한 책이면 좋겠다는 생각에 최근 나온 책으로 하나 골랐다. 저자에 대한 약간의 호감도 그 작은 이유가 되긴 하였다.
책은 재미있었다. 문장도 쉽고 내용도 수월하다. 무엇보다 적당히 다루는 솜씨가 좋다. 중국에 대한 몇가지 질문을 해결할 수 있었다. 중국에 대해 궁금하다면 한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말 그대로 보름 동안 대륙을 가로지르며 다시 중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커다란 의문을 짊어지고 왔다. 과연 어떤 눈으로 어떻게 중국이라는 나라를, 사회를, 문명을 이해해야 하는가. 당분간의 숙제로 가져가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