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포정과 문혜군, 그리고 양생
실력 있는 백정은 해마다 칼을 바꿉습죠
평범한 백정은 달마다 칼을 바꾼답니다.
저는 19년 동안 칼을 바꾸지도 않고 수천 마리 소를 잡았습니다.
그런데도 칼날이 숫돌에 간 듯 날카롭습니다.
틈에 두께 없는 칼날을 넣으니
널찍하여 칼을 맘껏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넉넉하니 십구 년이 지나도록 칼날이 날카로운 것이지요.
등장인물 둘. 하나는 문혜군이며 또 하나는 포정이다. 문혜군은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춘추전국의 임금들을 살펴보아도 문혜군이라는 이름을 찾아볼 수 없는 까닭이다. 혹자는 그를 위혜왕魏惠王, 즉 맹자에 나왔던 양혜왕梁惠王이라 보기도 하는데 그럭저럭 통하는 풀이이다. 문혜군과 위혜왕 모두 ‘혜惠’라는 시호를 쓰니 말이다.
장자도 위혜왕을 만났을까? 장자의 친구 혜시는 위혜왕 곁에서 벼슬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소요유>의 우화를 보면 위혜왕이 혜시에게 장자를 소개해 준처럼 보인다. 혜시가 이런 말을 하니 말이다. ‘위나라 임금이 나에게 박씨를 주었다네. 그런데 심어놓고 보니 너무 커서 쓸모가 없더라니까!’ 크고 괴상하며 이상한 인간. 혜시는 장자와의 만남을 매우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크고 괴상한 나무는 또 다른 쓸모를 가지고 있다. <소요유>의 마지막 우화는 목수의 도끼날을 피하는 나무의 생존 전략을 이야기한다. <장자>는 쓸모 있는 존재를 찾는 이를 목수에 비유한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된다는 것은 목수의 칼날에 내던져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자신의 생명을 갉아먹지 않으려면 다른 길이 필요하다. 기이하고 괴상한 존재, 쓸모없는 존재가 될 것.
<장자>에는 이렇게 소극적이며 탈세속적인 면만 있는 걸까? <양생주>는 성큼 궁궐 안으로 우리를 들인다.
문혜군이 벌인 잔치에 수많은 사람이 모였다. 떠들썩하니 즐거운 그 시간 한쪽에서는 요리가 한창이다. 잔치에는 고기가 빠질 수 없는 법! 커다란 칼을 써서 소를 해체하는 이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의 몸짓이 얼마나 대단한지 궁정 음악에도 어울리며, 무희들의 춤에도 어울린다. 문혜군이 앞에 나서 그의 빼어난 기술에 박수를 보낸다. ‘브라보!! 이렇게 멋진 기술이라니! 어떻게 이런 기술을 익혔는가?’
<장자>는 문혜군과 그 주변의 화려한 인물들에서 시선을 돌려 포정을 주목한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커다란 칼을 쓰는 그 거친 사내는 긴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여기 포정의 말에서 중국 철학사를 꿰뚫는 주요 개념, ‘도道’와 ‘천리天理’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개념보다는 맥락에 주목하자. 어째서 장자는 문혜군과 포정의 대화장을 만들었을까?
포정이란 푸줏간(庖) 사내(丁), 백정을 가리킨다. 일국의 임금과 백정. 지금이야 셰프니 하며 대접받지만 대체로 칼을 쓰는 이들은 별로 존중받지 못했다. 일국의 임금과 백정의 대화는 그 자체로 낯선 장면을 연출한다.
더 흥미로운 것은 포정의 장황한 말을 듣고 문혜군이 이렇게 답했다는 점이다. “내 포정에게서 양생養生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일국의 임금이 어찌 생명(生)에 대한 문제를 고심할 필요가 있었을까. 춘추전국의 임금들은 대체로 별 부족함이 없는 이들이었다. 부족함이 있다면 강력한 힘과 부유함에 대한 갈망뿐이었다. 실존적 고민을 하는 그런 위인이 아니었다는 말씀.
설령 삶에 대해 고민한다 하더라도 죽음 곁에 있는 백정에게 들을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누구보다 죽음에 가까운 인물 아닌가? 제 손의 칼로 수천 마리 소의 목숨을 빼았았다는, 피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그에게서 생명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역설이다. 어쩌면 장자는 좀 고약한 솜씨로 이야기를 비틀어 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백정에게 묻는 임금이 더 말이 안 되는가, 손에 피 묻힌 자에게 듣는 생명 이야기가 더 말이 안 되는가.
훗날 양생養生이라 하면 무작정 생명을 연장하는 것을 생각하곤 한다. 불로장생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유한한 생명을 유지하며 오래오래 늙지 않고 사는 것. 신선을 꿈꾸는 자들은 다양한 방안을 제시하곤 했다. 그러나 포정의 이야기는 그와 다르다. 그는 죽음을 멀리하지 않는다. 장자가 노자의 장례식 이야기를 끼워 넣은 것은 그가 말하는 양생이 신선을 꿈꾸는 게 아니라는 점을 반증한다.
이편의 제목이 되기도 하는 ‘양생’을 잘 이해하려면 포정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문혜군은 그의 재주(伎)에 탄복하며 질문을 던지나, 포정은 재주를 넘어선 무엇, 즉 ‘도道’를 이야기한다. 여기서 포정은 신神이라는 주요한 개념을 이야기하는데, 요약하면 신神이란 눈으로 보고 일러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즉, 포정은 소를 눈으로 보지 않고 해체한다. 이 신묘한 기술을 포괄하는 말이 ‘도’라 할 수 있다.
‘도’가 무엇인지, ‘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차후에 이야기하도록 하자. 다만 문혜왕이 양생, 생명을 가꾸는 법에 대해 들었다고 했을 때 과연 그것은 무엇인지를 따져보아야 한다. 포정에게 해체되는 소는 분명 아닐 것이다. 이 신묘한 기술을 익힌 포정도 그 주인공이라 보기 힘들다. 십구 년 동안 녹슬지 않은 칼, 번뜩이는 그 칼에 주목해야 한다.
평범한 백정은 한 달에 한번, 실력이 좋은 백정은 해마다 한번 칼을 바꾼다. 뼈를 끊고 살을 가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포정은 다르다. 그는 십구 년간 이 칼을 썼으며 지금도 막 숫돌에 간 듯 날카롭다. 포정의 칼이라고 뭐 특별한 것이 있었을까? 차이가 있다면 포정이 칼을 쓰는 방법에, 소를 대하는 방법에 있었다.
세심하고도 조심스러운 움직임, 뼈와 살을 가르지 않고 그 틈을 노리는 실력! 흥미롭게도 장자는 이 틈에 들어간 칼날의 움직임을 ‘유(遊)’라 표현했다. 바로 <소요유>에서 만났던 그 ‘유’ 말이다. <소요유>에서 ‘유’가 천하 바깥, 막막하고 무궁한 곳의 행위를 가리키는 표현이었다면 <양생주>에서의 ‘유’란 뼈와 뼈 사이, 힘줄과 근육 사이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포정에게 소란 주어진 커다란 과업이며 해체해 나가야 할 것들의 덩어리라는 점을 기억하자. 우리 각각에게 매일처럼 닥치는 수많은 사건들, 엉키고 설킨 일들, 자질구레하면서도 매일 끊임없이 닥치는 일들에 우리는 치이며 살곤 한다. 상인상마相刃相靡, 때로는 우리를 후벼 파기도 하고, 때로는 우리를 갈아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삶은 생기를 잃어버리기 마련.
그러나 포정은 생기를 잃지 않고, 번뜩이는 날카로움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있다 말한다. 다만 그 길은 눈에 보이지 않으며, 쉬이 습득할 수 없는 길이다. 장자는 그것을 습득하는 방법을 ‘신’이라 보았으며, 이를 습득한 경지를 ‘도’라 일컬었다. 이 틈을 파고드는 기술, 이것이 바로 양생의 비법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장자의 양생이 영생, 영원히 생기 넘치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말자. 그는 <양생주>를 열며 명확히 이야기한다. 우리의 삶에는 끝이 있다고(吾生也有涯). 문제는 이 한정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점일 테다. 이리저리 마구 치고받고 살아갈 텐가 아니면 ‘유遊’가 가능한 또 틈을 발견하여 거기서 생명을 가꾸며 살아갈 텐가.
포정은 자신의 칼이 무후無厚, 두께가 없다 말한다. 그렇다면 그는 칼을 손에 쥔 것인가 쥐지 않은 것일까? 이런 선문답 같은 질문에서 벗어나 <장자>를 열며 만났던 기묘한 생명체를 기억하자. 그는 까마득히 커서 크기를 알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또 장자가 말하지 않았는가. 가을 터럭은 천하보다 크다고. 두께가 없다는 말은 무엇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가늠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여 장지의 비유를 빌리면 지금 포정이 손에 쥔 칼은, 날카롭고 예리한 이 칼은 무엇보다 커다란 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엄청나게 큰 칼! 대체 그는 이 칼을 들어 무엇을 하려는 걸까? 포정의 칼은, 단순이 요리조리 틈을 비집고 살길을 도모하는 여린 생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장자는 커다란 칼을 들어 세상을 내리치고 있다.
그러니 문혜군, 한 나라의 임금이 백정에게 깨우침을 얻는 것이지. 그렇게 장자는 전복과 해체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칼을 손에 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