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림자와 껍데기
옅은 그림자가 그림자에게 물었어.
“아까는 걸어가더니 왜 지금은 멈추었소?
또 아까는 일어섰는데 지금은 앉아있구려.
뭐 그리 줏대가 없단 말이오?”
“내가 기대어 있는 게 있어서 그런 거겠지.
내가 기대어 있는 것도 또 어딘가에 기대어 그런 걸 테고.
그러니 내가 기대어 있는 것이란
뱀의 껍데기나 매미의 날개 같은 게 아닐까?
어찌 그런지 알겠으며, 또 어찌 그렇지 않은지 않겠는가?”
그림자가 있다. 그림자란 빛을 가려 생겨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림자 주변을 보면 옅은 그림자가 또 붙어 있곤 한다. 본체와 그림자, 그리고 옅은 그림자. 헌데 흥미롭게도 장자는 옅은 그림자를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전개한다. 결코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옅은 그림자의 입을 빌어.
옅은 그림자(罔兩)는 불만이 많다. 왜냐하면 갑자기 삶이 요동치기 때문이다. 제 원하는 데로 가거나 멈추지 못하고, 쉬지도 못한다. 대관절 무엇 때문일까. 겨우 원인을 찾아낸다. 바로 그림자라는 놈이 제멋대로 지조도 줏대도 없이 이랬다 저랬다 하는 까닭이다. 그냥 그림자와 무관하게 움직이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옅은 그림자는 그림자에게 기대어있는(待) 존재인 까닭이다. 그러니 그림자에게 하소연하는 수밖에.
그림자(景)도 할 말이 많다. 그림자는 옅은 그림자의 입장을 잘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도 제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하나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없다. 그도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삶이 버겁다. 그러나 옅은 그림자의 불만이 이해되면서도, 딱히 해줄 말이 없다. 그 역시 기대어있는 존재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物)에 묶여 있다. 그가 일어서면 그림자도 일어서고, 이어서 옅은 그림자도 일어선다. 그가 앉으면 그림자도, 옅은 그림자도 따라서 그래야 한다.
드디어 문제의 원인을 거슬러 올라왔다. 일어서고 앉고 걷고 멈추는 것을 보면 사람(人)일 텐데, 그럼 그 사람에게 질문을 돌리면 되는 걸까? “아까는 걸어가더니 왜 지금은 멈추었소? 또 아까는 일어섰는데 지금은 앉아있구려. 뭐 그리 줏대가 없단 말이오?” 그 사람은 제대로 대답해줄까? 왜 그렇게 줏대 없이 움직였는지, 그림자와 옅은 그림자의 의향에 따라 움직일 수 있을까? 드디어 옅은 그림자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걸까?
그러나 그림자는 알고 있다. 그렇게 원인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그림자가 기대어 있는 존재(物/人) 역시 무엇엔가 기대어 있는 까닭이다. 그는 그 질문이 해소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특정한 의향을 갖고 있는 존재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지만 영 주소를 잘못 찾았다. 그 존재 역시 불안한 토대 위에 있다. 마치 뱀의 껍질과도 같아서 그저 형태만 갖고 있을 뿐이다.
옅은 그림자는 그림자를 닮았다. 그림자의 껍데기라 할 수 있겠지. 그림자는 누군가를 닮았다. 따라서 그림자도 껍데기인 것은 마찬가지. 껍데기의 껍데기를 벗겼더니 그럼 이제 본체를 만날 수 있을까? 그러나 장자는 말한다. 그 역시 껍데기일 뿐이라고. 그럼 이렇게 질문하면 어떨까? 벗기고 벗기고 또 벗기면 본체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단단하고 제 의지와 의향을 가진 본체를. 그에게 이 요동치는 껍데기의 삶을 물으면 되지 않겠는가.
장자는 결코 그 답을 찾을 수 없을 거라 말한다. “어찌 그런지 알겠으며, 또 어찌 그렇지 않은지 않겠는가?” 답을 집어삼키는 질문, 너무 먹먹해서 아무런 답도 찾을 수 없게 만드는 질문. 원인을 찾고 찾아도 결국 껍데기 벗기기에 불과한 헛수고. 아니 껍데기만 무수히 확인되며, 대답은 아득히 멀어지고 질문만 또렷해질 뿐이다.
실상은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옅은 그림자도, 그림자도, 존재도 사실은 하나의 쭉정이에 불과하다. 그 누구도 제 마음대로 살지 못하며, 어떤 우연에 벌거벗겨져 있다. 앉아 있던 그 시간은, 어딘가로 가던 그 시간은 그저 잠시 그랬을 뿐이다. 결국 장자의 존재는 독립적이지 못하며 어딘가에 기대어 있다. 존재란 껍데기에 불과하다. 알맹이 없는, 아니 알맹이를 찾을 수 없는.
<제물론> 시작에서 남곽자기가 멍하니 제 스스로를 잃은(吾喪我) 것도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존재에 대한 탐구는 존재를 상실하는 데 이르고 만다. ‘자기’에 대한 탐구는 ‘자기 상실’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역설.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이라는, 묻고 또 묻고 물을 수록, 집요하게 질문할수록 답을 지우는 기묘한 질문. 결국 장자의 세계엔 그림자만 남고, 질문만 남았다.
비슷한 시기를 살았던 지구 반대편의 철학자는 그림자의 환영에 갇힌 것은 빛을 모르기 때문이라 말한다. 태양 아래서 사물을 본다면 그림자는 벗겨지고 사물을 또렷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 그에게 ‘철학’이란 그림자를 벗겨내는 것과도 같다. 형체를 벗겨내고 찬란히 빛나는 본체를 찾는 과정. 그러나 장자의 발견은 정반대이다. 거꾸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너도 나도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불안한 존재성의 발견.
남곽자기는 이름에서 ‘남곽’, 성곽 남쪽의 사람임을 보여주고 있다. 성 바깥의 사람, 들판(野)에 버려진 헐벗은 존재. 그러나 그는 기묘한 깨우침을 얻는다. 그러나 그 깨우침의 결과는 마치 말라죽은 나무(槁木)와도 같고 불 꺼진 재(死灰)와도 같다. ‘자기 상실(喪我)’의 존재성이라 할까.
남곽자기는 묻는다. 사람의 피리 소리를 들어본 것처럼, 땅의 피리 소리도 들어보았을 것이라고. 바람이 불면 기묘한 소리가 들리기 마련이다. 숲 곁에 살아본 사람은 잘 안다. 바람이 몰아치면 수많은 존재가 튀어나오는 것을. 스스, 윙윙, 흐흐, 깔깔… 때로는 우는 것처럼, 때로는 웃는 것처럼, 때로는 비웃는 것처럼, 때로는 혼내는 것처럼 그 기묘한 소리는 우리를 붙잡는다.
그러나 바람이 그치고 고요함이 닥치면 그 많은 소리가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구멍을 통과하는 일시적인 소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바람이 사라지면 소리도 함께 사라진다. 거대한 침묵만이 남을 뿐. 실상 그토록 시끄러운 소리는 순간일 뿐이다. 다시 바람이 불어도 그 소리는 반복되지 않는다. 다만 비슷할 수 있겠지.
인간도 구멍 뚫린 존재이다. 칠규七竅, 일곱 구멍이 있어 이를 통해 보고 듣고 말하며, 그리고 숨 쉰다. (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 <응제왕>) 다양한 감정, 생각, 주장, 깨달음은 세상의 바람이 이 구멍을 통과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람이 그치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정작 ‘나(我)’라고 생각했던 개별적 존재 역시 사라지고 말지 않을까.
장자는 마음(心)이라는 표현을 통해 다양한 감정과 생각의 총체성을 이야기했다. ‘이루어진 마음(成心)’에서, 우리는 나(我)라는 존재를 발견하곤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식으로 그러나 장자는 피식 웃으며 말할 것이다. 그 역시 일시적이며, 순간의 존재 양식에 불과할 것이라고. 피리에게서 피리 소리를 묻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아무리 피리를 다그쳐도 피리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처럼.
너도 나도 모두 피리에 불과하다. 텅 빈 존재. 그냥 구멍 뚫린 존재.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따라 때로는 울고 웃으며, 성내고 다투며, 사랑하고 아낄 뿐이다. 바람이 그치면 그 모두 사라지겠지. 또 다른 바람이 불면 울던 자는 웃을 거고, 성내던 자도 너그러워질 것이며, 알뜰히 사랑하더라도 이빨을 드러내고 물어뜯겠지. 그래서 이렇게 물어보았자 소용이 없다. ”뭐 그리 줏대가 없단 말이오?”
바람이 분다. 세상이 영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휩쓸려 흘러가고 있다. 2020년 전염병으로 세상이 뒤집힐 줄 누가 알았는가. 그러나 이 사태는 우리의 삶이, 개개인이 얼마나 얇고 허약한 삶 위에 살고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바람이 그치면 어떨까? 우린 다시 예전 삶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까? 또 바람이 불면 어떨까? 장자의 답은 이렇다. “어찌 그런지 알겠으며, 또 어찌 그렇지 않은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