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석의 포기, 지리소의 자신감
송나라 형씨라는 고을은 갖가지 나무가 자라는 곳이었데
굵기가 한 줌 되는 나무는 원숭이 말뚝으로 쓰려 베어 가고
아름드리나무는 대들보로 삼겠다고 베어 가고
더 큰 나무는 양반집이나 부잣집에서 관짝을 짜겠다고 베어갔어
그렇게 수명을 다하지 못하고
죄다 도끼질에 목숨을 잃고 말았지.
그러니 쓸모가 걱정거리가 되는 거야.
얼룩소, 코가 비뚤어진 돼지, 치질이 있는 사람
이런 것들을 제물로 쓸 수나 있겠어?
제사를 치르는 무당은 이런 것들을 손가락질하며 비웃지만
신묘한 사람(神人)은 아주 귀히 여기지.
나무 이야기. 장석匠石이라는 인물이 제나라로 가는 길에 곡원曲轅이라는 곳을 지나다 커다란 나무를 보았다. 어찌나 큰지 산을 굽어볼 정도였다나. 이 큰 나무를 구경하는 사람도 많았는데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가던 길을 갈 뿐이었다.
다시 또 나무 이야기. 이번에는 남백자기가 상구商丘에 갔다가 또 커다란 나무를 보았더란다. 어찌나 큰지 수레 수천 대를 뒤덮을 정도였다나. 헌데 크기만 하면 무엇하겠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니 온통 이리저리 얽히고 꼬여 있어서 도무지 목재로 쓸 수 없었다. 그것뿐인가 잎을 핥으면 혀가 문드러지고, 냄새를 맡으면 취해서 정신을 잃어버렸다나.
‘재목 감이 못 되는 나무(不材之木)’. <인간세>의 두 나무 이야기는 <소요유>에서 읽었던 나무 이야기를 떠올린다. <소요유>에서 장자의 괴이한 주장을 두고 혜시는 비꼬며 쓸모없이 커다란 나무와 같다 말했다. 이 나무는 <인간세>에서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장자>에서 빈번하게 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나무를 잘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기열전>에서 사마천은 그가 칠원漆園, 즉 옻나무 동산의 관리였을 거라 말하기도 했다. <제물론>에서 숲 속에 울리는 다양한 소리에 대해 풍부하게 논의한 것을 기억하자. 그는 숲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한편 잘리고 베어져 목재木材가 되는 나무를 통해 이른바 인재人材라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일 테다. 장자에게 이 세상은 하나의 숲과도 같으며, 이 숲에서 자라는 나무처럼 이런저런 사람들이 있다. 한편 어슬렁거리며 도끼를 들고 적당히 베어갈 나무를 찾아 떠도는 사람이 있다.
앞에서 이야기한 장석이라는 인물이 바로 그렇다. 그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나무꾼(匠)이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제나라로 가고 있다. <장자>의 많은 이야기가 하나의 우화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 이야기를 조금은 더 풍부하게 해석해볼 수 있을 법하다. 제나라는 장자 시대에 꽤 이름난 강국이었다는 점을 생각하자. 장석은 제나라라는 부강한 나라를 찾아가는 유세객을 의미하는 건 아닐까? 제 재주를 펼쳐보겠다고 먼 길을 떠나는 사람.
<인간세>의 앞부분에는 세 우화가 연이어 비슷한 주제를 두고 이야기한다. 첫 번째는 공자와 제자 안회의 이야기. 안회는 폭정이 난무하는 위나라로 가서 그 나라를 바로잡아보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두 번째는 공자와 섭공 자고의 이야기. 섭공 자고가 사신으로 제나라를 가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시달린다는 고민을 공자에게 털어놓는다. 세 번째는 안합과 거백옥의 이야기. 제멋대로인 위나라 태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겠느냐는 안합의 걱정에 거백옥이 답한다.
이 세 이야기에서 장자의 시선은 시종일관 냉소적이다. 의원 역할을 자처하며 위나라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는 안회에게 그게 가능하겠느냐 되묻는다. 자칫하다 스스로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경고와 함께. 커다란 과업을 맡아 스트레스로 시달리는 섭공 자고에게는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맡은 일을 기계적으로 하라고 이야기한다. 너무 잘하려 하다가는 자신을 상하게 할 테니. 제멋대로 날뛰는 태자는 나중에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이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다가는 목을 내놓아야 할 판이다.
당랑거철螳螂車轍의 고사가 여기에서 나왔다. 수레바퀴를 앞에 두고 앞발을 치켜들며 대드는 사마귀를 보자. 사마귀는 제법 사납고 무섭다. 곤충 중에는 으뜸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제 아무리 힘이 세다 한들 수레바퀴를 상대하겠다고 덤벼들면 어떻겠는가. 사마귀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수레바퀴는 사마귀를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가던 길을 돌아가는 가는 일도 없다. 사뿐히 즈려밟고 제 갈길을 갈 뿐. 당랑거철의 결말은 뻔하다.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바퀴에 짓눌린 사마귀만 쓸쓸히 남을 뿐이지만, 그 흔적도 오래가지 못한다. 사마귀 한 마리가 짓눌려 죽은들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테다.
장자는 당면한 현실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다 말한다. 방향을 돌릴 수도, 멈출 수도 없다. 이를 세우거나 돌려보겠다고 용을 쓴들 찾아오는 결말은 참혹한 죽음뿐이다. 그러니 안회나 섭공 자고, 안합 등에게 들려주는 교훈은 모두 비슷하다. Let It Be, 내비둬!
아마 맹자 같은 인물이 장자의 이 말을 들었다면 크게 성을 내었을 테다. 제 목숨 하나만 귀한 줄 아는 자라며 손가락질하겠지. 그러나 장자는 거꾸로 되물을 테다. 천하보다 내 목숨이 소중하지 않느냐고. 물론 여기에는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이 깔려 있기도 하다. 누군가는 역사의 선의를 믿는다. 이른바 ‘정의는 승리한다’ 류. 그러나 장자는 다르다. 역사는 제 갈길을 갈 뿐이다. 그러니 이러쿵저러쿵 할 것이 무엇 있는가. 따라서 그는 무엇을 해보겠다며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사람들을 보며 차갑게 비웃을 뿐이다. 그래서 뭐가 바뀌겠어?
그가 이런 냉소를 가진 것은 특정한 목적 아래 사람들을 도구로 사용하는 이들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마치 제각기 쓰임에 따라 산의 나무를 베어가는 사람들처럼. 그렇게 하나 둘 베어가 산은 휑하니 비어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모두 ‘不材之木, 쓸모없는 나무들’ 뿐.
다시 장석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장석은 안회, 자고, 안합처럼 자신만의 포부와 이상을 가지고 제나라로 가는 길이었다. 가능하다면 그는 재주 있는 이들과 동행하고 싶었다. 나무꾼이라는 직업처럼 재주꾼들을 제나라로 데려가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우연히 괴이하고 커다란 인물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 정도로 꽤 유명한 인물이었는 모양. 허나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한참 그 곁에서 구경하다 뒤늦게 장석에게 달려온 제자가 묻는다. 저렇게 큰 나무는 본 적이 없습니다. 즉 저렇게 대단한 사람은 본 적이 없다는 말. 그런데도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다니요. 장석의 말은 단호하다. 못쓴다. 쓸모가 없었으니 저렇게 클 수 있었지. 남백자기가 보았던 나무처럼 그는 그 존재의 쓸모없음을, 나아가 위험함을 알았다. 자칫하다가는 혀가 문드러지며 냄새에 취해 정신을 잃는다.
얼마 뒤 장석의 꿈에 그 커다란 나무가 나타난다. 그렇다, 그는 쓸모없기에 그렇게 클 수 있었다. 나아가 그 쓸모없음이 자신에게는 커다란 쓸모였다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장석에게는 쓸모없었겠지만 자신에게는 커다란 쓸모였다. 그러니 수많은 나무들이 재목이 되어 잘리는 가운데서도 홀로 그렇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인간세>에 이어지는 지리소의 이야기는 과연 쓸모, 곧 재주 혹은 재능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되묻게 만든다. 지리소는 이름처럼 못난 인물이다. 아마도 사람들에게 적잖이 손가락질받았겠지. 그러나 정작 그는 그럭저럭 살아가는 인물이다. 그것뿐인가? 나라에서 징역이 있을 때 그는 홀로 자유롭다. 나라에서 사람들을 잡아가 노역을 시키고 군대로 끌고 갈 때 그는 홀로 당당하다. 아무도 그를 잡아가는 일이 없을 테니. 장석과 같은 인물, 노역을 시킬 일꾼을 군인으로 삼을 장정을 징발하러 온 행정관이 그를 거들떠보지 않을 것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가겠지.
쓸모란 무엇일까. 보통 우리는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능력을 떠올리곤 한다. 그래서 늘 들었던 말.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그러나 거꾸로 장자의 질문은 이렇다. 그 쓸모라는 것이 누구에게 좋은 것인가? 행여 우리는 남에게 좋은 것을 쓸모라 생각한 것은 아닐까? 특히 그 쓸모가 나를 상하고 다치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려 좋다고 말할 테다. 그러나 사과나무에게 사과란 무엇일까? 사과 때문에 가지가 뜯기고 잘리겠지. 그리고 사과가 열리지 않으면 베어지겠지.
헤드헌팅이라는 말이 있다. 재능 있는 이들을 찾아 뽑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표현 그대로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머리를 잘라가는 이들, 수급을 모아 누군가에게 갖다 바치는 이들.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인재人才라는 말도 무시무시하다. 사람을 재목감으로 쓴다는 말. 적당히 자르고 다듬어서. 쓰임에 따라 잘리는 것도 무섭지만 쓸모가 없다고 버려지는 것도 무섭다.
쓸데없이 무서워하는 게 아니냐고? 그러나 거꾸로 무서움을 모르는 것이야 말로 더욱 무서운 일이 아닐까? 장자는 어렵지 않게 꿰뚫어 보았을 것이다. 똑같은 사건을 두고 누군가는 교환이라 부르며 누군가는 착취라 부르는 것의 차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