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5-1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나라는 망했지만 산과 강은 여전하고
장안성에 봄이 오니 풀과 나무가 무성하도다
國破山河在 / 城春草木深
- 두보杜甫 춘망春望
어떻게 시대를 구분할 것인가. 이는 가치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전통적으로 한漢, 당唐을 하나로 묶고 이후 송宋, 명明을 묶는 편이다. 물론 각각의 나라 사이에는 커다란 혼란기가 있었다. 한나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위진남북조라 불리는 시대가, 당나라와 송나라 사이에는 오대십국이라는 시대가, 송나라와 명나라 사이에는 몽골제국 원元이 있다.
보통 철학사를 논할 때 한나라와 당나라를 암흑기로 설명하곤 한다. 이는 주희(朱熹 1130~ 1200)와 같은 이들의 관점을 따른 결과이다. 그는 맹자 이래로 성인의 가르침이 오래도록 전수되지 못했다고 보았다. 한나라와 당나라를 거치면서 쇠락하고 퇴색되었던 성인의 가르침이 송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회복될 수 있었다. 이 관점에 따르면 송나라와 명나라는 유가 부흥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위에 언급했던 남송의 주희와 명의 왕수인(王守仁, 왕양명王陽明 1472~1528)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두 거목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와 같은 관점과 정 반대의 접근도 있다. 한나라와 당나라야 말로 중화제국의 전성기라고 보는 입장이다. 방대한 영역의 국토, 사방 오랑캐에 대한 압도적인 우위, 자유롭고 활발한 교역 등이 이 시기를 대표하는 모습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송, 명은 상대적으로 문약文弱한 시대라 평가할 수 있다. 주희, 왕수인과 같은 인물은 공리공담에 몰두한 인물에 불과하다.
확실히 송, 명은 한, 당에 비해 약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각각 원元과 청清이라는 오랑캐 나라에 의해 멸망당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런 까닭에 문치文治의 이상을 펼쳤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처럼 평가는 상대적이다. 중요한 것은 한, 당과 송, 명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며 이것이 문약文弱이든 문치文治든 ‘문文’이라는 개념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시대의 우열을 논하기보다,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를 주목하도록 하자. 왕조의 흥망성쇠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느리지만 꾸준히 변화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원하건 원치 않건 어느 시대든 과거의 유산 위에 자신의 시대를 건설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진나라 이후 장안長安 일대는 천하의 중심으로 기능했다. 전한과 당이 수도로 삼았으며 특히 당나라는 경서의 이상에 따라 수도를 새롭게 건설하였다. 네모 반듯한 성을 기준으로 마치 모눈종이처럼 도시를 구역별로 구분하였다. 황제가 거하는 대명궁大明宮은 북쪽에 위치했다. 황제는 남면南面, 북쪽에서 남쪽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양 도성에서도 그와 같은 생각을 만날 수 있다.
‘장안의 화제’라는 말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처럼 장안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이름을 가지고 있다. 친숙함으로만 따진다면 중국의 역대 고도古都 가운데 낙양도 빼놓을 수 없다. 낙양은 일찍이 주나라의 수도였고, 이어서 후한이 수도로 삼은 곳이다. 당나라 시대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 624?~705 / 690~705 재위)가 잠시 수도로 삼기도 했다. 팔괘와 태극의 원리를 보여준다는 하도河圖와 낙서洛書가 나왔다는 전설을 간직한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후 역사를 보면 이 두 도시는 서쪽 변방으로 밀려나 버리고 만다. 당나라 말기 몇 차례의 혼란을 거치면서 장안성은 화려함을 잃어버린다. 그 유명안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763)’, 안녹산과 사사명이 일으킨 난이 대표적인데 시인 두보는 안녹산의 난 당시 장안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때 두보가 쓴 춘망春望이라는 시는 장안성의 쇠락을 봄의 화려함과 대비하여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시의 시작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와 ‘성춘초목심城春草木深’은 비단 당나라의 몰락을 넘어 천년 넘게 여러 사람의 심금을 울렸다. 김소월은 <봄>이라는 제목으로 이 시를 옮기기도 했다.
이 나라 나라는 부서졌는데
이 산천 여태 산천은 남아있더냐,
봄은 왔다 하건만
풀과 나무에 뿐이어
오! 서럽다 이를 두고 봄이냐
치워라 꽃잎에도 눈물뿐 흩으며
새 무리는 지저귀며 울지만
쉬어라 두근거리는 가슴아
못보느냐 벌겋게 솟구치는 봉숫불이
끝끝내 그 무엇을 태우려 함이리오
그리워라 내 집은
하늘 밖에 있으니
애닳다 긁어 쥐어 뜯어서
다시금 짧아졌다고
다만 이 희끗희끗한 머리칼뿐
이제는 빗질할 것도 없구나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淺淚 恨別鳥驚心
烽火連三月 家書抵萬金
白頭搔更短 渾欲不勝簪
안녹산의 난은 커다란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당나라 후반기에서 시작하여 송나라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변화를 일러 당송변혁기라 부르기도 한다. 당, 송을 거치며 다양한 변화를 맞는데, 지리적으로 보면 남방의 부상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미 남북조시기에도 남방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할 정도였다. 당송변혁기이후 남방의 부상은 더욱 두드러져 이후 중국 역사는 남방이 경제, 문화, 상업을 주도하는 형국이 된다. 장안과 낙양은 더 이상 천하의 중심이 아니었다. 실제로 송은 장안이나 낙양이 아닌 개봉開封에 수도를 정했고, 이후 금金나라의 침입을 받자 아예 수도를 남쪽 임안臨安, 오늘날의 항저우(杭州)로 옮겼다.
한편 당송변혁기는 전통적인 귀족 가문이 몰락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전까지는 몇몇 거대 귀족 가문이 지배세력으로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송변혁기를 거치면서 전통적인 귀족세력이 완벽하게 몰락하고 만다. 장안과 낙양의 쇠퇴는 거대 귀족가문들이 몰락하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한, 당을 거치면서 수도를 중심으로 세력 기반을 구축했던 까닭이다. 어지러운 정치상황도 큰 영향을 끼쳤다. 약 반 세기 동안 다섯 개의 왕조가 차례로 등장했다 사라졌다. 후량後梁(907~923), 후당後唐(923~936), 후진後晉(936~947), 후한後漢(947~951), 후주後周(951~960)까지. 흥망성쇠를 이야기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짧은 기간 동안만 존속했다. 송나라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평가를 보자. “오대는 겨우 50년을 견뎌냈다. 다섯 번 왕조가 바뀌었고, 8개 가문 출신의 13명 황제가 있었다.”(<하버드 중국사 송>, 49쪽.)
새롭게 중원을 통일한 송나라는 어떻게 나라를 이끌어 갔을까. 송나라는 과거제도를 전면적으로 시행하여 관료를 선발하기로 한다. 과거제의 이상은 멀리 공자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공자는 ‘유교무류有敎無類’, 즉 출신이나 신분에 상관없이 가르침을 펼쳤다. 그가 말하는 군자君子란 덕을 갖춘 인물로, 남에게 모범이 될만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이상을 구체적인 제도로 실현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수나라, 당나라 시기에도 초보적인 과거제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과거제를 통해 선발되는 인원은 제한적이었고, 마찬가지로 이들이 관료사회에서 감당하는 역할도 제한적이었다. 과거제를 통해 능력 있는 이를 선발하기는 했으나 여전히 능력보다는 신분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송나라에 이르러 전면적으로 과거제가 실시되며 능력본위의 시대가 열린다. 물론 송나라 시대에도 고위 관료의 자제는 관료로 진입하는데 유리했다. ‘음습蔭襲’이라 하여 과거제도를 거치지 않고 관료로 진입하는 길이 있었다. 한편 부정합격이라는 오래된 관습도 문제였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과거제를 통해 실력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풍조가 널리 퍼져있었다. 설사 고위 관료의 자제라 하더라도 과거제를 거치지 않는 것은 부끄러운 일로 치부되었다.
이른바 ‘사대부士大夫’라는 새로운 계층이 등장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면 황제가 천자로서 천하를 지배하며, 그 아래에는 왕王 혹은 공公이라 불리는 여러 제후들이 있을 수 있다. 또한 그 아래에는 다시 경卿과 대부大夫라는 귀족 계층이 있었다. 이들은 황제나 왕으로부터 토지를 수여받아 이를 근거로 대대로 세력을 유지해나갈 수 있었다. 그 아래에는 사士라는 지식인 계층이 있었는데 이들은 관리가 되기도 하고, 경이나 대부의 가신家臣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송대에 이르러 과거제도를 통해 관리가 된 이들은 스스로를 사대부라 일컬었다. 국가를 경영하는데 참여하는 관료 계층이라는 점에서는 과거의 대부에 스스로를 견주었으며, 그 기반이 경서를 통한 학습에 있는 만큼 사士, 선비로서의 정체성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기본적으로 과거제도는 원칙상 천민계층이 아닌 이상 누구나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시대에 따라 이 기본적인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지만, 더 큰 문제는 과거시험을 치르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문에도 돈이 드는 법이다. 실상은 이보다 더 어려웠는데,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을 공부시키는데 드는 비용보다 그가 노동에서 빠짐으로 발생하는 결손분이 더 부담이었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여유는 필수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대부로서의 정체성을 경제적인 기반에 두지는 않았다. 쉽게 말해 있는 집 자식과 사대부 출신의 도련님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어쨌거나 과거제를 통해 능력과 덕을 갖춘 이를 선발한다는 이상이 어느 정도 실현되었던 까닭이다. ‘부자도 3대는 못 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명망 있는 관료를 배출한 가문이라 하더라도 후손들이 과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면 가문의 쇠락을 피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해야만 가문의 세력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다.
경제적인 기반과 함께 문화적인 기반이 중요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과거 급제자를 배출한 가문이나 지역은 다시 과거 급제자를 배출할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는 급제자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서적이 풍부하고 인쇄물 유통이 많은 곳은 그만큼 과거시험에 유리했다. 과거시험의 출제자들은 종종 자신이 읽은 서적을 기반으로 문제를 출제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읽은 책을 구해볼 수 있는 사람과 구할 수 없는 사람의 차이에 대해서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따라서 요약하면 유가 경전을 바탕으로 문화적 소양을 갖춘 지식인 관료 계층이 바로 사대부라 할 수 있다. 물론 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새롭게 등장한 것은 아닐 것이다. 과거에도 이와 비슷한 계층은 있었다. 그러나 당송변혁기를 거치면서 기존 귀족 가문이 대거 몰락하고 과거제가 전면적으로 실시되면서 사대부 계층이 역사의 중심 무대에 등장한다. 이 시대를 문치文治의 시대라 한다면 문사文士, 독서인讀書人이 사대부로 사회의 권력을 확실이 움켜쥐게 되었기 때문이다. 문사 혹은 독서인이라는 다른 이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엇보다 이들은 글과 서적에 가까운 이들이었고, 그 결과 경서經書는 이전과 다른 위상을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