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4-4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보리수는 나무가 아니고 / 거울도 없거늘 / 본래 아무것도 아닌데 / 어디 먼지가 앉을 데가 있을까
菩提本無樹 / 明鏡亦非台 / 本來無一物 / 何處惹塵埃
혜능의 게송
한무제가 한나라를 대표하는 황제라면 당나라를 대표하는 황제로는 당태종(唐太宗 598~649/626~649 재위)을 꼽을 수 있다. 정관지치貞觀之治라 불릴 정도로 그의 통치 시기는 당나라 최고의 전성기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 역시 커다란 실수를 하는데, 고구려 정벌에 나선 것이다. 645년 낙양에서 현장을 만난 이후 그는 동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선다. 결과는 잘 알려져 있듯 당나라의 패배였다.
이 전쟁 때문일까, 아니면 이후 내부 반란으로 몰락하는 역사 때문일까. 당나라 군대라고 하면 체계도 없고 힘도 약한 오합지졸로 생각하곤 한다. 그러나 당나라는 중국 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력한 제국이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체계적인 구조 아래 세워진 계획도시였다. 동서남북으로 난 도로는 마치 자로 잰 듯 반듯했으며, 신분과 계층에 따라 구획이 나누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도시는 다양한 이질적인 문화들이 몰려드는 곳이기도 했다. 서역에서 넘어온 상인들이 머무르기도 했고, 이국적인 다양한 문물이 거래되는 곳이기도 했다.
당시 장안에는 서역 상인을 따라 여러 종교가 흘러들어왔다. 그 가운데는 기독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스교도 있었다. 그들의 흔적은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教流行中國碑’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경교景教, 기독교보다는 이슬람교의 전래가 두드러졌다. 서역 상인 가운데는 장안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들은 중국 문화를 일부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종교적 특징은 유지하고자 했다. 이들의 후예는 회족回族이라 하여 중국의 소수민족 가운데 하나로 지금까지 명맥을 잇고 있다.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다문화, 다종교, 다인종의 세계적인 도시였던 셈이다.
일부 학자들은 당나라가 북방 소수민족이 건국한 나라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관롱關隴, 관중과 농서 지역에서 일어난 세력이 당나라를 건국했다는 이야기이다. 여기서 관중은 오늘날 중국의 산시성 지역을 가리키며, 농서는 깐수성 지역을 가리킨다. 상세한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겠지만 이렇게 보면 중국이라는 제국을 매우 흥미롭게 이해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와 철학을 이야기할 때 중화中華라는 개념을 언급하고는 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무관하게 후대에 창작된 혹은 오래전부터 상상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오랑캐도 중국 황제가 될 수 있을까? 유가의 주장에 따르면 천자는 문명의 수호자이자 창시자로 그는 곧 문화적인 영웅이어야 했다. 중국과 사방 오랑캐를 가르는 구분이 바로 이 문명의 힘 아닌가.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우리는 당나라 이후 오랑캐 출신의 황제를 여럿 이야기할 수 있다. 거칠게 말하면 진시황이 황제 제도를 내놓은 이후부터, 황제란 덕성과 무관한 ‘통치 기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제도는 황제가 누구 건, 천하 국가를 움직이는 하나의 거대한 ‘통치 기계’가 되었다. 중국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는 매우 복잡하지만 황제 제도와 관료제도는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당태종 역시 황제의 위상을 떨치기 위해 태산에 올랐다 한다. 봉선 의식을 통해 천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자 했다. 황제가 오르는 상징적인 산이었으므로 태산은 오악독존五岳獨尊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오악五岳이란 오행사상에 근거하여 이름난 산 가운데 다섯을 꼽은 것이다. 동악 태산, 남악 형산衡山, 서악 화산华山, 북악 항산恒山 그리고 중악 숭산嵩山이 있다. 이 가운데 중국 철학사에 끼친 영향을 고려하면 숭산을 언급해야겠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남북조 시기에 이 숭산의 한 동굴에서 말 그대로 면벽수행을 하는 승려가 있었다. 현장처럼 불법을 찾아 서역으로 떠난 사라도 있었지만, 그 처럼 불법을 전수하기 위해 먼 동쪽 이국땅까지 온 사람도 있었다. 그로 인해 중국 불교는 새로운 전환기를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가 바로 불교 선종禪宗의 시초로 불리는 초조初祖 달마達摩이다. 그가 머물며 독특한 수행과 특별한 깨달음의 길을 가르친 곳이 바로 소림사少林寺이다. 보통 소림사라고 하면 무술의 본산으로만 알고 있지만 초조 달마가 머문 곳으로 크게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그래서 소림사 입구 한쪽에는 선종의 시조 달마가 머문 곳이라는 뜻의 선종조정禅宗祖庭이라는 네 글자가 크게 새겨져 있다. 한편 서방성인西方聖人이라 하여 그를 기리는 곳도 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달마의 모습은 대체로 신선의 모습인데, 소림사에 있는 달마상은 그와 영 다르다. 꼬불꼬불 수염이 덥수룩한 데다 머리도 크고 덩치도 크다. 전형적인 서역인의 모습이다. 전래되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정말로 달마가 저 먼 서천서역을 떠나 동쪽으로 온 것이라면, 그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아는 것과는 영 다른 모습일 것이다. 후대 관습에 따라 한화漢化된 모습이 아닌 전혀 다른 외모를 상상해야 한다.
구마라지바와 현장의 한역경전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이론적 이해가 깊어질 수 있었다. 격의불교라는 제한된 이해에서 벗어나 정통적인 시각에 가까운 불교를 수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격의불교에서 벗어나 외래종교로서 불교를 습득하고자 한 사람 가운데는 인도를 ‘중국中國’이라 일컫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다. 불교를 숭상하는 이들에게는 인도야말로 본연의 가르침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곳이었다. 그러니 문화의 중심 중국이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불교의 전래로 이렇게 중국이 변방이 되는 일도 있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현장이 목숨을 걸고 그렇게 먼 길을 떠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종은 전혀 다른 식으로 접근한다. 체계적인 교리보다 깨달음을 중시하는 이 불교는 학습과정과 학습목표는 물론 학습대상도 부정하고자 한다. 선종의 매우 과격한 주장,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라(殺佛殺祖)”에 따르면 경전을 구하러 이역만리로 떠날 필요가 없다. 도리어 그런 식의 접근, 고행을 마다하지 않고 먼 길을 가는 수고, 경전의 원류를 찾아가 정수를 습득하는 열정, 한 글자씩 자구를 붙잡고 이를 풀이하는 학습, 모두가 부질없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다. 아니, 한걸음 더 나아가 설법을 잊고, 경전을 찢으라 할지도 모른다.
단박에 깨우침을 얻는 것, 이것을 돈오頓悟라 한다. 깨우침의 즉시성과 현장성도 중요하지만 통상적인 방법을 파괴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기존의 학습 틀, 이해의 방식을 깨뜨려야만 한다는 것이 선종의 중요한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육조’란 달마를 시초(初祖)로 삼아 여섯 번째로 전승받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는 본디 일자무식으로 경전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경전을 듣고 단박에 깨우침에 이르렀으며 결국 스승으로부터 깨달은 자의 징표인 의발衣鉢, 가사와 바루를 물려받는다.
의발을 물려주기 위해 스승이었던 오조 홍인(五祖弘忍 601∼674)은 제자들에게 게송偈頌,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은 시를 지어오라 명한다. 이때 홍인의 가장 빼어난 제자였던 신수(神秀 ?~706)는 이렇게 지었단다. "몸은 보리수, 마음은 맑은 거울, 늘 털어내어, 먼지가 앉지 않도록 해야지. (身是菩提樹 / 心如明鏡臺 / 時時動拂拭 / 勿使惹塵埃)" 한편 혜능도 게송을 지었는데 조금 다르다. "보리수는 나무가 아니고, 거울도 없거늘, 본래 아무것도 아닌데, 어디 먼지가 앉을 데가 있을까. (菩提本無樹 / 明鏡亦非台 / 本來無一物 / 何處惹塵埃)" 신수는 마음을 깨끗이 닦아야 한다 이야기한다. 그러나 혜능은 마음이라는 대상 조차 치워버린다. 그렇다고 신수가 제기하는 주장에 반대한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신수가 제기하는 문제 자체를 뒤집어 버린다. 본성이 본래 청정무구하고 깨끗한 것이라면 먼지를 털어낼 것도, 깨끗하게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게다가 그것이 하나의 물건이나 대상처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활활 불타오르는 횃불 같은 것이라면? 이런 식의 접근, 이런 식의 논의가 선불교의 특징이다.
이 게송을 듣고 홍인은 혜능을 조사로 인정해주었다 한다. 그러나 신수와 그의 제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이 사건은 선종이 남북으로 나뉘는 계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르냐 하는 것을 따지지는 말자. 이런 사건 자체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식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이런 식의 사고가 커다란 변혁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언어와 규범에 대한 파괴, 사유의 근거와 체계를 거침없이 허물어뜨리려는 시도. 이런 식으로 수수께끼 같은 말들로 깨우침을 이야기하는 말을 공안公案이라 하며, 이를 기록한 <벽암록碧巖錄>은 악명이 높은 책으로 유명하다. 워낙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가 많아 도무지 어떻게 풀이를 해야 할지 난감한 까닭이다.
이 독특한 철학은 대체 어디서 어떻게 연유한 것일까? 정말 달마로부터 시작한 것일까? 선종을 중국 불교의 독특한 특징으로 보는 입장도 있다. 이렇게 보는 입장에서는 도가 텍스트 <장자>와의 연관성에 주목한다. 즉, <장자>의 문제의식과 여러 주제가 불교에 흡수되어 선종을 낳았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거칠게 말하면 선종이란 머리를 깎고 가사를 입은 장자라고도 할 수 있다. 속은 장자이되 불교식의 이야기를 하는. 이런 식의 발칙한 상상을 해보는 것은 텍스트 자체를 이해할 때는 텍스트를 독립적으로 읽어야 하지만, 철학사 곧 사상의 흐름을 이야기할 때는 각자가 던진 주제가 어떤 식으로 해석되고 변용되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철학사 역시 해석의 영역이며, 해석을 통해서만 또 다른 철학사를 쓸 수 있는 까닭이다.
달마의 이야기가 사실이든, 혜능의 이야기가 거짓이든, 반대로 선사들이 <장자>를 그저 빌려다 썼든, 선종의 유래와 실체가 무엇이든 선종은 매우 중요한 주제를 던져주었다. 본성이란 과연 무엇인가? 가르침의 방식은 어때야 하는가? 언어와 지각으로 다룰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매우 매력적인 요소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전등설傳燈說, 즉 등불과 등불을 이어 전달하듯 도道의 비밀스런 전승과정이 있다는 이야기.
중국의 여러 책들이 그러하듯, <벽암록> 역시 전승되는 수많은 이야기를 훗날 한 인물이 정리한 것이었다. 이를 정리한 것은 원오극근(圜悟克勤 1063–1135)이었다. 헌데 그의 제자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는 <벽암록>이 깨달음을 규정화하는 것이라 여겨 그 책을 불태웠단다. 깨달음은 언어는 물론 문자로도 남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대혜종고의 글을 읽은 자 가운데 언어와 문자로 되돌아가는 자도 있었다. 그는 명맥이 끊기고 사라진 성인의 가르침을 바로 지금 부활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경서의 문장 하나, 글자 하나를 꼼꼼하게 정리하는 작업을 통해. 바로 남송의 주희가 그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