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를 가로지르며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4-3

by 기픈옹달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범문를 한문으로 옮기면 형식이 파괴되어 버리니, 비록 대체적인 의미는 파악할 수 있다 하더라도 본래 문체와는 동떨어져 버리고 만다. 이는 마치 남에게 밥을 씹어서 먹여주는 것과 같아서 본래 맛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토악질 나게끔하기도 한다.
但改梵為秦, 失其藻蔚, 雖得大意, 殊隔文體, 有似嚼飯與人, 非徒失味, 乃令嘔噦也.
구마라지바(鸠摩罗什)


뤄양 시내 동쪽 외곽에는 백마사라는 절이 있다. 절 앞에는 커다란 말 모양의 석상이 있는데 바로 이것이 백마사의 주인공을 형상화한 것이다. 백마사는 후한 명제 때 처음 불교가 전래된 것을 기념하여 세운 절이다. 가섭마등과 축법란 두 승려가 서역에서 흰 말에 <사십이장경四十二章経>을 싣고 와서 이 절에서 불경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똑같이 경전이라고 일컫지만 유가에서 경전의 위치가 여타 다른 종교에서 경전의 위치는 전혀 다르다. 유가는 옛 성인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을 익히는 것이 최우선이라 보았다. 유가가 국가철학으로 흡수되면서 경전에 대한 지식은 곧 행정관료의 기본 소양이 되었다. 후대 과거제가 완비된 이후에는 유가 경전을 익혀야만 과거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다. 한편 유가는 경전의 글자, 개념, 문구 등을 해석하고 이를 부연하는 방식으로 철학 작업을 수행했다. 유가 철학자들은 경전 전문가인 동시에 경전 주석가였으며 편집가이기도 했다. 이들을 Literati, 즉 문사文士 혹은 독서인讀書人이라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가 철학자들은 읽고 쓰는 지식 엘리트 계층이었다.


대부분의 종교도 이와 유사하다. 종교 전통 역시 경전 - 대부분 창시자의 가르침 담은 텍스트 - 을 읽고 쓰는 것을 전문적으로 훈련했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이는 사제 계층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일반 대중들이 경전을 읽고 쓰며 풀이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종교는 민중들에게 수용될 수 있는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었다. 간단한 기도, 순례, 헌물, 때로는 의미와 상관없이 경문을 송독하는 방식이 쓰이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은 오늘날에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따라서 유가 경전 없이 유가가 전래된 것을 상상하기는 힘들지만, 대부분의 종교는 경전보다 앞서 전래되곤 했다. 신앙은 문자보다 빠르고, 믿음은 이해보다 더 강력한 법이다. 구구절절 경전을 읽고 이해하지 않더라도 종교가 뿌리내리고 싹트는 일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불교 역시 후한 명제 시기보다 더 이전에 중국에 전래되었을 것이다. 서역과의 교류 가운데 자연스레 불교 신자가 유입되었을 수도 있으며, 다양한 형태로 초보적 교리가 전래되었을 수도 있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는 고증이 어렵다.


도교는 중국 안에서 민중으로부터 자생적으로 탄생한 종교이다. 한편 불교는 명백하게 외국에서 그것도 먼 인도에서 전래된 종교이다. 도교는 탄생부터 정확한 체계 없이 다양한 요소가 마구 뒤섞인 형태였던 반면, 불교는 전래 이전부터 정확한 교리와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많은 유사점이 있었다. 새로운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종말론적인 세계관을 통해 민중에게 폭넓게 수용되었다. 앞선 언급한 태평도 운동과 미륵불 사상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사후세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통해 생사의 경계를 넘는 또 다른 세계관을 구성할 수 있게 하였다. 도가의 양생술, 불교의 윤회사상으로 사후세계 혹은 저 세계를 복잡하면서도 체계적으로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요소는 유가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유가는 현 세계의 안정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이 세계에 대한 논의에 집중하는 특징을 갖기 때문이다. 유가가 도가와 불가를 싸잡아 공허空虛하다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차이 때문에 도교(혹은 도가)와 불교는 관료 지식계층의 철학이었던 유가와는 다른 식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유사성 이외에도 불교와 도교가 긴밀한 관계를 갖는 것은 도교가 불교의 수용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처음 불교는 도교의 분파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불교 교리와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까닭도 있지만, 불교의 전래가 노자의 전설과 맞물려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기> 기록에 다르면 노자는 서쪽으로 사라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서쪽으로 간 노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 사람들은 서쪽으로 건너간 노자가 인도까지 이르렀으니 그가 바로 부처라 생각했다. 간단히 요약하면 노자가 바로 부처라는 것. 이를 노자화호설老子化胡說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불교는 서방에서 전래된 낯선 가르침이 아니라, 노자의 가르침을 부연한 새롭고도 익숙한 가르침이 된다.


초기 불교 승려들도 이런 관점에 강하게 반박하지 않았다, 포교를 위해서는 굳이 이질성을 강조할 필요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도교와 불교가 한뿌리에서 나왔다고 하는 도불동류설道佛同流說이 폭넓게 퍼졌다. 이런 관점에 따라 도가의 개념과 연결시켜 불교의 교리가 수용되었다. 특히 <반야경般若經>의 공空을 <노자>의 무無와 같다고 받아들이기도 했다. 이처럼 기존의 해석 틀을 가지고 수용한 불교를 격의불교格義佛敎라 일컫는다. 격格이란 하나의 고정된 틀을 의미한다. 마치 창문으로 비친 풍경을 즐기는 것과도 같다고 해야 할까? 틀린 이해라 할 수는 없으나 부분적인 이해라는 점에서 이런 이해는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격의에서 벗어나려면 새로운 언어와 개념 체계가 필요했다.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가면서 이것이 외래에서 전래된 이질적 사유라는 점이 보다 분명해졌다. 또한 불교 경전에 대한 관심과 수요도 높아졌다. 백마사 전설에서 볼 수 있듯, 초기부터 한역경전漢譯經典에 대한 필요성이 이야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도 그렇지만 수준 높은 번역서란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특히 다의적이며 복잡한 해석이 가능한 경전의 경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상호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며, 두 언어와 철학 체계 사이의 용례도 많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빼어난 인물이 필요하다!


구마라지바(鸠摩罗什 334?~413?)는 한역경전 사업에 매우 중요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오늘날 신장위구르 지역의 소국 쿠차국의 귀족 출신이었다. 그는 남북조시기의 여러 국가 중 하나인 후량(後涼 386~403)의 포로가 되어 나중에는 장안에서 불경 번역사업에 매진한다. 이름에서 볼 수 있듯, 그는 한족과는 전혀 다른 문화적 배경에서 자란 인물이었다. 지금도 신장 위구르 지역의 위구르족은 한족이나 몽골족 계통의 동아시아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외양을 갖는다. 그 역시 이국적인 외양을 가졌을 것이다. 푸른 눈에 흰 피부를 가지지 않았을까.


그는 산스크리트어 즉, 범어梵語 경전을 한문으로 옮기는데 커다란 역할을 한다. 중국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손꼽히는 번역가로 언급될 정도이다. 천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의 번역이 읽히고 있으니 그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도 번역의 고충을 이야기했다. 어떻게 해도 따라갈 수 없는 원문의 독특한 문체와 표현을 옮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대체적인 의미를 옮길 수는 있으나 본래 문장의 ‘맛’까지 옮길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번역이란 남에게 밥을 씹어 먹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상대가 직접 먹을 수 없으니 번역가가 잘게 씹어 입에 넣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그것이 맛있겠는가. 설사 맛이 있다 하더라도 본연의 맛과는 영 동떨어진 맛일 테다. 게다가 자칫하면 구역질이 나게끔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번역은 토사물과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불교의 세 경전 경장經藏, 율장律藏, 논장論藏을 모두 익혔기에 삼장법사三藏法師라는 호칭을 얻기도 했다. 이처럼 빼어난 인물이었으나 그의 번역 역시 어느 정도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그가 서역 출신 인물이라는 점을 그 이유로 이야기한다. 그가 훌륭한 한역경전 번역가이기는 했으나 그에게 한문은 근본적으로 이방 문자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외국어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외국어를 번역하는 것이 더 익숙한 법이다. 이런 까닭에 그의 번역은 한문보다는 법문, 산스크리트어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또 다른 새로운 번역가가 등장해야 하는 법이다. 그 역시 불교 경전에 통달하여 ‘삼장법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사실 우리에게는 그의 법명보다는 삼장법사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기도 하다. 바로 당 현장(玄奘 602 ~ 664)이다. 구마라지바가 서역에서 동쪽으로 넘어와 불경을 번역했다면, 그는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서역 땅으로 직접 떠난 인물이다.


대안탑 앞의 현장.jpg 시안시 현장 동상. 뒤로 대안탑이 보인다.


그는 당태종 시기의 인물이었는데 당시 당태종은 서역과의 교류를 강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국경을 봉쇄하고 서역으로 가는 길을 막아둔 상황. 젊은 승려였던 현장은 불법佛法을 찾아 국법을 어기고 홀로 먼 여행길에 오른다. 전래되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국경을 넘어가며 수차례 위기를 겪기도 했으며, 사막을 건너느라 생사의 경계를 오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읊으며 고통과 고독을 이겨냈다고 전해진다.


후대에 지어진 재미난 이야기 <서유기>는 현장, 즉 삼장 곁에 빼어난 인물이 있었다고 한다. 제천대성 손오공, 천봉원수 저팔계, 권렴대장 사오정까지. 모두 이들 앞에 붙은 칭호는 모두 한때 불리던 이름이었지만 이런 쟁쟁한 인물이 곁에 있으니 든든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삼장은 용왕의 아들이 변신한 백마를 타고 있다. 그런데도 숱한 요괴들이 이들의 여행을 방해한다. 수차례 죽을 위기를 겪지만 결국엔 천축국天竺國, 인도에 닿아 불경을 얻는다. 이렇게 이야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현장이 홀로 직접 인도까지 이르렀고, 십수 년 뒤에 성공적으로 돌아왔던 실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의 여행길에는 요괴도 없었지만 손오공과 같은 이도 없었다. 그의 노고는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라는 제목의 글로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융숭한 환영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국법을 어긴 범죄자였으나 서역에 가서 직접 불경을 가지고 왔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문제적 인물이었다. 당태종은 그를 매우 반갑게 맞았다. 다만 그때 당태종은 장안에 없었다. 고구려 정벌을 위해 낙양에 머물고 있던 상황이었다. 현장이 낙양에서 당태종을 만난 그 해, 당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현장은 당태종을 뒤로하고 장안으로 돌아와 불경 번역에 매진한다. 지금도 시안시 대자은사大慈恩寺 앞에는 서역으로 떠나는 현장의 동상을 볼 수 있다. 현장이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든 절이 바로 자은사이다. 현장은 이후 불경 번역에 매진했으며 훗날 그의 번역은 구마라지바의 번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번역으로 평가받는다. 구마라지바의 것을 구역舊譯 현장의 것을 신역新譯이라 구분하기도 한다. 현장의 번역은 구마라지바의 것에 비해 한문 문장의 특성을 잘 살린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 3강 진시황과 한무제, 황제의 탄생

강의 영상 : https://youtu.be/qKsCwUVdu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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