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4-1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황제는 흉노 대선우께 삼가 묻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하늘과 땅이 낳고 해와 달이 세운 흉노 대선우는 황제께 삼가 묻습니다. 안녕하십니까?”
「皇帝敬問匈奴大單于無恙」 ... 「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敬問漢皇帝無恙」
<사기 흉노열전>
2019년 겨울, 중국 시안 박물관을 방문했다. 여러 유물 가운데 처음으로 눈을 사로잡은 것은 황금빛 말 모양의 동상이었다. 이 유물의 이름은 ‘유금동마鎏金銅馬’, 길이가 76cm 높이가 62cm로 제법 큰 크기였다. 무게도 25kg이 넘는단다. 이 동상은 한무제의 동생 양신공주陽信公主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아마 한무제가 동생에게 보낸 선물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양신공주는 본래 평양후平陽侯 조수曹壽와 혼인하였으나 조수가 세상을 떠난 뒤, 위청(衛靑, ? ~ BCE106)과 다시 혼인한다. 흥미로운 점은 위청이 본디 평양후 집안의 노비였다는 점이다. 공주와 노비의 혼인이라니! 여기에는 몇 가지 배경이 있다. 하나는 그의 누이 위자부가 한무제의 황후가 되었다는 점. 누이 덕분에 위청은 장수가 되는데,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워 대장군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대장군과 공주와의 혼인이라면 좀 납득할만하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훗날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납득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나라가 효孝를 중시했다지만, 철저하게 규범화된 사회는 아니었다는 점을 반증하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유동금마’는 양신공주와 대장군 위청이 합장된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한무제는 신선에 관심이 많기도 했지만 중국 밖의 다른 세계에도 관심이 많았다. 강력한 권력을 지닌 여느 황제들처럼 그 역시 영토를 넓히는데 힘을 쏟았다. 특히 흉노족과 전쟁을 벌이는데 열심이었다. 대장군 위청과 표기장군 곽거병(霍去病 BCE140 ~ BCE117) 모두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 둘은 사막을 뚫고 전진하여 흉노의 기세를 꺾었다. 그들의 군대는 몽골고원을 지나 바이칼호 주변까지 진격한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매우 까다로운 존재였다. 한고조 유방은 흉노와 싸우다 백등산에서 일주일간 포위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하기도 했다. 흉노가 포위망을 열어준 틈을 따서 도망하여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한고조 유방은 흉노의 세력을 걱정하여 황실 공주를 흉노의 선우에게 보내기도 했다. 게다가 흉노와 형제의 관계를 맺기도 했다.
선우單于는 흉노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 한고조 유방을 궁지로 몰았던 것은 묵돌선우였는데, 그는 비밀리에 키운 사병을 앞 세워 아버지 두만선우를 죽이고 선우의 자리에 오른 인물이었다. 묵돌선우 당시 흉노는 매우 강성하여 한나라를 크게 위협할 정도였다. 초한전쟁에서 공을 세운 여러 인물들이 흉노에 투항하기도 했다.
한나라의 황제와 흉노의 선우는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는데, 흉노는 황제가 보낸 것보다 더 큰 크기의 죽간에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러면서 “하늘이 세운 흉노 대선우(天所立匈奴大單于)”라거나 “하늘과 땅이 낳고, 해와 달이 세운 흉노 대선우(天地所生日月所置匈奴大單于)”라고 스스로 일컫기도 했다. 이 부분에 주목하는 것은 중국이 고대로부터 천하天下를 운운하고 천자天子라며 하늘의 대리자를 자처했으나 실제로 지배했던 영역은 중원中原 일대, 즉 황허강 주변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이 영역은 대체로 점차 확장되는 추세를 보인다. 중요한 점은 중심으로부터 외부로 뻗어나가는 식의 확장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변방은 늘 새로운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예를 들어 기마술이 그렇다. 본디 말타기와 활쏘기는 북방 유목민족의 특기였다. 일찍이 전국시대의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은 기마술을 받아들이고자 했다. 문제는 기존의 옷이 말을 타기에는 거추장스럽다는 점이었다. 결국 무령왕은 호복胡服, 즉 오랑캐의 옷을 입기로 한다. 신하들은 물론 왕실의 사람들도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무령왕은 이렇게 말한다. “성인께서는 옷(服)이란 몸을 이롭게하는 것이고, 예禮는 일을 편안케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聖人利身謂之服,便事謂之禮。)”
한무제 시기 이후 유가는 국가철학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철학사>를 쓴 펑유란은 이 부분에 주목하여 한무제 시기 이전을 ‘자학시대子學時代’로 그 이후를 ‘경학시대經學時代’로 구분한다. 이렇게 보면 한무제 이전은 제자백가와 같은 여러 철학자들이 등장했던 시대가 된다. 그 이후는 이들이 남긴 텍스트, 즉 경전經典을 읽고 연구하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이때의 경전이란 대부분 유학자들이 경전이라 일컬은 것을 말한다. 이런 접근이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훗날 중국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끼친 다양한 요소를 무시하거나 축소할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이 다인종, 다문화, 다종교 국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중국철학이란 다양한 요소, 흐름, 주제를 묶어 이야기하는 것일 뿐이다. 중국철학이라는 무엇이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중국도 철학도 단수段數가 아니라 복수複數이다.
다시 한무제로 돌아가도록 하자. 한무제는 진시황을 이어 황제 일인의 통치 시스템을 닦은 인물이었다. 그는 태산에 올라 천지만물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천자天子로서 봉선 제사에 참여했다. 산둥성 태산泰山 옥황봉玉皇峰에 있는 ‘유천재상惟天在上’, 오직 하늘만 위에 있다는 뜻의 비석은 고대 중국인의 세계관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런 한무제가 “하늘과 땅이 낳고, 해와 달이 세웠다(天地所生日月所置)”고 스스로 일컬었던 흉노의 선우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언뜻 보아서는 하늘 아래 두 명의 천자天子는 없다며 전쟁을 벌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기록된 역사는 그렇지 않다. 도리어 팽창이라는 제국의 속성 때문에 흉노 정벌을 벌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 중국인은 소박한 천하관天下觀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자天子라는 자리도 고정되어 있기보다는 현실적인 힘의 향방에 따라 언제는 바뀔 수 있는 것이었다. 중국 역사에서 오랑캐 출신의 황제를 종종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무제의 제국은 사방으로 세력을 확장한다.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한무제는 북쪽으로는 흉노를, 동쪽으로는 조선을 제압하고 남쪽으로는 만이蠻夷라 불리는 서남쪽의 지역까지 세력을 펼친다. 고대 중국인들은 사방 네모난 모양의 땅 위에 산다고 생각했다. 중국中國 혹은 중원中原이란 그 중앙을 가리키는 말이고, 나머지 변두리에는 각각 이름을 달리하는 오랑캐가 살고 있다 여겼다. 이를 각각 북적北狄, 동이東夷, 남만南蠻, 서융西戎이라 일컫는다. 풀이해보면 북쪽의 이리, 동쪽의 활, 남쪽의 벌레, 서쪽의 창이라는 뜻이다. 중원의 사람들에게 사방 변경은 위험한 세계였다.
한무제 시기 장건(張騫 ?~BCE114)은 서쪽 변경으로 나가 탐험을 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본래 흉노를 상대하기 위해 동맹세력을 찾고자 하였으나 생각보다 멀리 그리고 오래 떠나게 된다. 흉노에 포로가 되어 고생을 하기도 하고, 이후에 탈출하여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겨우 다시 한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서역西域, 즉 중앙아시아 지역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보를 가져오는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교류가 가능하게 되었다.
장건 이전에도 서쪽으로 통하는 교역로가 있었을 테지만, 장건 이후 서역과의 교류가 더 활발해진다. 이렇게 확장되는 교역로를 훗날 한자로는 사주지로絲綢之路, 우리 말로는 비단길이라는 뜻의 실크로드라 부른다. 이 길은 이질적인 문화가 수용되는 통로이기도 했고, 다양한 인종이 흘러들어오는 입구이기도 했다. 한편 경제적인 무역로이기도 했으며, 종교와 사상이 수입되는 경로이기도 했다. 오늘날 중국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이름의 경제문화정책을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한무제 시기의 중국은 사방 변방지역을 정벌, 지배, 발견하면서 제국의 모습을 갖추어갔다고 할 수 있다. 보통 철학사에서는 잘 다루지 않지만 이 시기에 활동한 매우 중요한 인물을 한 명 언급해야겠다. 바로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 BCE145? ~ BCE86?)이다. 그는 한때 낭중郎中이 되어 한무제를 섬기기도 했다. 이후 아버지를 이어 태사太史의 자리에 오른다. 태사는 천문天文을 관장하며 역사를 기록하기도 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이릉李陵을 변호해주었다는 이유로 황제의 분노를 사 형벌을 받는다. 이른바 ‘이릉의 화’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그는 생식기를 잘리는 궁형宮刑을 받는다. 이런 치욕스런 사건 위에 탄생한 것인 바로 <사기>라는 대작이다. 그는 역대 왕조와 황제의 역사를 기록한 <본기本紀>와 이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열전列傳>을 구분하였다. 사건을 순서대로 기록한 이전의 역사서, <춘추>의 기록방식과는 다른 형식이었다. <춘추>와 같은 식의 역사기술을 편년체編年體 <사기>와 같은 식의 역사기술을 기전체紀傳體라 한다.
기전체란 이름에서 볼 수 있듯 ‘본기’와 ‘열전’으로 나누어 기록하는 방식이다. 그는 왜 이렇게 두 가지 방식의 역사 기술을 사용했을까. 이는 왕조와 황제의 역사에는 이름을 남길 수 없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던 까닭이다. 저마다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빼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더 한 때 이름을 떨친 사람들. 수많은 인물의 이야기가 <사기열전>에 담겨 있다. 그는 역사가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사람과 사람이 얽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은 사자성어가 되어 오늘날까지도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시안 박물관 한쪽에는 마답흉노馬踏匈奴라는 이름의 커다란 석상이 있다. 말 그대로 말이 흉노를 밟고 있는 모양이다. 본디 이 석상은 표기장군 곽거병의 무덤 앞에 있는 것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곽거병은 젊은 나이에 흉노를 제압하여 이름을 떨친 인물이었다. <사기>에도 그의 활약상이 기록되어 있다. 언뜻 보면 곽거병이라는 젊은 장수가 공을 세운 것을 기념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 석상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중국이라는 문화 국가가 흉노라는 오랑캐를 짓밟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제국이 강력한 무력으로 소수민족을 지배하였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북방 유목민족에게 기마술을 배우고, 서역에서 말을 수입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나아가 옆으로 가득 찬 다양한 흙인형, 석상, 도자기 등은 그 뒤의 다양한 이야기를 또 전해주고 있다. 변방 오랑캐의 이야기는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이다. 이질적인 문화와 종교, 갖가지 물건들은 이후에도 중국에 끊임없이 영향을 주었다.
수 없이 많은 말과 낙타가 다양한 것을 실어 왔다. 한나라 이후 서역과의 교류는 끊임없이 확대되었다. 그 가운데는 흰말이 싣고 온 낯선 경전도 있었다. 후한 명제明帝는 꿈에서 금인金人, 금빛으로 빛나는 사람을 만났다 한다. 과연 그가 누구일까. 신하 가운데 하나가 말하기를 금빛으로 빛나는 그가 부처(佛)라 하였다. 이듬해 명제는 인도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들은 중간에 우연히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을 만나 돌아온다. 이들은 흰말에 경전을 싣고 당시 후한의 수도 뤄양(洛陽, 낙양)에 도착한다. 이렇게 중국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한다.
그러나 불교가 융성하게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다시 분열과 혼란의 시기를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