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3-4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여씨를 따르고자 한다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유씨를 따르고자 한다면 왼쪽 어깨를 드러내라. 군사들은 모두 왼쪽 어깨를 드러내어 유씨를 따르고자 하였다.
「為呂氏右袒,為劉氏左袒。」軍中皆左袒為劉氏。
<사기 여태후본기>
봉건제와 군현제와 군국제. 교과서적으로 설명하면 주나라는 봉건제를 택했고,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는 군현제를 택했다. 봉건제는 중앙에 왕이 있고 사방에 제후를 두는 방식이었다면, 군현제는 황제 일인이 천하를 다스리되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는 방식이다. 앞서 보았듯 봉건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제후들이 서로 다툼을 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었고, 군현제는 황제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권력과 책임이 전가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이에 한나라는 두 체제를 섞은 군국제를 선택했다는 식으로 설명된다.
춘추전국이라는 혼란기를 거치고, 또 시황제의 새로운 체제를 거치면서 진의 멸망 이후 천하의 판도를 어떻게 구축할지는 중요한 문제였다. 진나라를 무너뜨린 이후 항우는 봉건제와 유사한 방식을 선택한다.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켜 공을 세운 이들을 왕으로 삼았다. 이에 유방을 한왕漢王으로 삼고 스스로 서초패왕西楚覇王이 되었다. 주나라의 봉건제와 차이가 있다면 종주국宗主國의 역할을 하는 나라가 없었다는 점이다. 항우의 초나라가 강하였지만 다른 나라들과 다른 지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 패왕覇王이라는 이름처럼 힘으로 다른 나라를 압도할 뿐이었다.
이후에도 항우의 비전을 따랐다면 중국의 모습은 지금과 영 다른 모습일 것이다. 여러 나라로 찢어졌겠지. 그러나 ‘중국’이라는 개념은 필연적으로 통일된 하나의 국가를 지향하도록 이끌었다. 항우에게도 비슷한 조언을 하는 이가 있었다. 진나라의 수도에 터를 잡고 천하를 경영하라고. 그러나 항우는 이렇게 답했다 한다. “공을 세웠는데 고향에 돌아가지 않으면 비단옷을 입고 밤에 돌아다니는 것과 같으니 누가 알아주겠는가!(富貴不歸故鄉,如衣繡夜行,誰知之者!)” 그를 설득하고자 하는 자는 이렇게 한탄할 뿐이었다. “초나라 사람은 원숭이에게 모자를 씌워준 꼴이라더니 정말 그 말이 맞는구나.(人言楚人沐猴而冠耳,果然。)” 여기서 금의환향錦衣還鄕과 목후이관沐猴而冠이 나왔다.
한나라는 초나라와 천하를 두고 다투면서 수차례 패배를 맛보았다. 이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골몰하다 주나라의 후손들을 찾아내어 왕으로 봉해주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전국시대 각 나라의 후손들이 나와서 왕을 자처하면 자연스레 초나라의 힘도 분산되지 않을까? 이를 실행하려고 하는 찰나 뒤늦게 이 소식을 듣고 찾아온 장량이 한사코 이 계책을 만류했단다. 이렇게 천하를 갈라놓으면 대업을 도모할 수 없으므로.
유방은 항우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후, 옛 진나라의 수도를 수도로 삼는다. 당시 그 지역을 ‘관중關中’이라 불렀는데 오늘날 시안西安이라 불리는 도시가 그곳이다. 시안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 진나라와 한나라 시대의 천하 중심이었던 이 도시는 지금 서쪽 변경으로 밀려나 버렸다. 실제로 이후 중국 역사의 중심지는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을 보인다. 뤄양과 카이펑 난징 그리고 베이징까지. 흥미로운 점은 그렇게 중심이 이동하는 상황이었음에도 ‘중심’이라는 관념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황제의 중앙집권 국가는 실패했지만, 천하 중심으로서의 황제의 자리는 견고히 남아있다.
따라서 한나라의 군국제란 봉건제와 군현제를 적당히 섞어 놓은 것이 아니라 군현제를 목표로 봉건제의 이상을 수용하는 방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중앙집권국가라는 커다란 목표 설정은 한 번도 수정되지 않았다. 유방이 황제가 되고, 함께 전장을 누볐던 이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하였다. 한편 그의 자제들도 왕으로 봉하였다. 언뜻 보면 주나라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중앙에서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여 실질적으로는 중앙의 통치를 받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제후왕들의 권한은 상대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결정적으로 유방은 유씨만이 왕이 될 수 있다고 못 박았다. 유씨가 아닌 제후왕의 자리는 세습이 되지 않았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천하는 결국 유씨의 것이 되고 말 것이라는 전망. 그러나 유방은 그 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했다. 그는 기회를 보아 자신이 봉했던 제후왕의 세력을 꺾고 차례로 죽여버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한신이었다. 항우를 꺾을 당시 그는 제왕齊王이었다. 그러나 한나라의 통일 이후 초왕楚王이 된다. 필시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기 때문일 테다. 초왕 한신도 불안했다. 결국 그에게 반란을 도모했다는 누명을 씌우고는 회음후淮陰侯로 강등해버린다. 이때 한신이 뱉은 유명한 말. ”날랜 토끼가 잡히니 사냥개는 삶기는구나. 높이 나는 새가 사라지자 좋은 활도 치워버리는구나. 적국을 없애자 훌륭한 신하까지 해치우는구나.(狡兔死,良狗亨;高鳥盡,良弓藏;敵國破,謀臣亡。)”
이후 한신은 유방의 부인 여태후의 꾐에 빠져 목숨을 잃고 만다. 항우, 유방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한신이 한 여인의 꾐에 목숨을 잃다니. 후대 제갈량이 내놓았다는 천하삼분지계는 본디 한신에게 먼저 제안되었던 계책이었다. 한신은 이 계책을 버리고 유방편에서서 항우와의 싸움에 선봉에 선다. 맹장이 초라한 죽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여태후의 이후 행보를 보면 그렇게만 볼 것은 아니다. 고조 유방의 죽음 이후 천하의 권력을 손에 쥔 것은 여태후였기 때문이다. 두 번째 황제, 그의 아들인 호혜황제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여태후는 자신의 친족 여씨를 왕으로 삼기도 했다. 유씨만 왕이 될 수 있다 하지 않았나? 그러나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유방 사후 천하의 유일한 지배자는 여태후였다. 그러나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여씨천하의 꿈도 무너지고 만다. 태위 주발은 병사들을 모아놓고 유씨의 편에 설 것인가, 여씨의 편에 설 것인가 묻는다. 모두가 유씨 편에 섰다. 결국 유씨 천하가 되었다.
이 경험은 귀한 교훈을 남겼다. 황권을 위협하는 불안요소 가운데 하나를 명확히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흐름만 보아도 몇 가지를 손꼽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환관, 권신 그리고 외척. 한나라 초기의 역사는 이런 불안요소들이 하나씩 제거되는 식이었다. 토사구팽으로 권신의 싹이 잘렸으며, 여태후의 죽음과 함께 외척 세력이 힘을 잃었다. 이후 경제 시기에는 오초칠국의 난이라 하여 유씨 왕들이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이 역시 실패로 돌아가는데, 이제 외부 황실 세력도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지 못한다는 뜻이었다. 겉으로는 군국제였으나 이미 군현제적 통치가 이루어지는 상황이었다.
한무제(漢武帝 BCE156 ~ BCE87 / BCE141 ~BCE87 재위)는 이런 배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모든 불안요소가 제거된 상황에서 그는 막강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일부는 그를 시황제에게 견주기도 하는데, 황제의 이상에 가장 근접한 인물이었던 까닭이다. 황제는 천하의 지배자로서 하늘에 제사를 지낼 필요가 있었다. 시황제도 태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려 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 제대로 제사를 지내지 못했다. 시황제는 어느 소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는데, 이 나무가 고마운 나머지 오대부五大夫의 관직을 내렸다. 지금도 태산을 오르는 길에 그 나무의 후손을 만날 수 있다.
황제가 하늘에게 지내는 제사를 봉선封禪이라 하였는데 진시황이 시도했으나 제대로 치르지 못했고, 그 이후에는 시도도 하지 못했다. 이런저런 어지러운 상황 때문이었다. 한무제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봉선의식을 제대로 치른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진시황 이전 삼황오제 시절에도 봉선의식을 치렀단다. 그러나 이를 상고할 수는 없는 일. 따라서 한무제야 말로 제대로 하늘에 제사를 지냔 최초의 황제라 해도 무방하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시황제는 신선의 삶을 동경하여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다고 한다. 무제 역시 신선의 삶을 동경하였다. 무제는 총 다섯 번이나 봉선을 치르는데, 신선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신선을 만날 수는 없었다. 황제가 신선을 동경했던 까닭에 여러 방사方士들이 궁궐에 들어왔단다. 이들은 점을 치기도 하고, 예언을 하기도 하며 여러 일을 벌였지만 제대로 진행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최초의 황제, 그리고 비로소 처음으로 황제 다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가 모두 신선술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은 흥미로운 점이다. 자신의 나라가 만세토록 영원하리라 기대했던 시황제처럼, 무제의 이런 모습은 영원을 꿈꾸는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전통적인 천인관天人觀, 하늘과 사람에 대한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하늘에 복속된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천인관이 등장했다. 하늘과 땅과 더불어 견줄만한 존재로서 인간을 말하기 시작했다.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 사상의 출현이다. 한편 천지와 짝하는 이 인간은 자신의 행위로 하늘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게 되었다. 이를 천인감응天人感應 혹은 천인상관天人相關이라 한다.
이전까지의 인간은 하늘의 명령을 수행하거나, 하늘이 준 운명에 제한받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인간의 행위는 하늘의 운행에 영향을 주며, 때로는 기이한 현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날씨가 바뀐다던가, 갑자기 이상한 생물이 등장한다던가, 아니면 혜성이 나타난다는 식의. 지금도 이야기하는 ‘하늘의 노하여…’라는 식의 방식이 비로 이때부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황제라는 새로운 권력과 함께 출현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천하에 영향을 끼치는 인간이란 저잣거리에서 만나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설사 내가 커다란 악행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세상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홍수를 불러오는 일도, 가뭄을 불러오는 일도, 지진이나 혜성을 불러오는 일도 없다. 설사 그런 재해가 일어난다 한들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강한 권력을 지닌 누군가의 행동이라면?
무제 시기의 유학자였던 동중서는 이 천인상관설을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그 이후 이 논의는 계속 발전하여 후대의 황제는 천자로서 천하만물의 대표자로 우뚝 서게 된다. 무제 이후에도 황제들은 계속해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이제 신선을 만나는 식의 개인적인 동기를 찾아볼 수는 없게 되었다. 황제는 하늘의 일을 체현한 인물인 동시에 하늘과 특별한 관계를 맺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무제는 동중서의 주장을 받아들여 파출백가罷黜百家 독존유술獨尊儒術, 그러니까 유가의 학문만을 택하고 나머지 학술을 내쫓았다 전해진다. 유가를 유일한 국가철학으로 받아들이고 나머지를 탄압했다는 뜻이다. 오늘날에는 동중서 한 사람에 의해 이런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논의에 의문을 던지는 목소리가 많다. 상술한 것처럼 중앙집권화는 이전부터 계속 진행되고 있었고, 이 과정 가운데 유가는 이 새로운 인간관과 세계관을 지탱하는 적절한 철학으로 선택되었다. 물론 이때의 유가는 과거 공자나 맹자, 순자의 것과는 다른, 역사 변천을 따라 여러 요소를 흡수한 또 다른 식의 유가였다고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