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서 내려 제국의 기틀을 닦다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3-3

by 기픈옹달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육생陸生은 늘 시서와 같은 옛 경전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고제高帝 유방은 호통을 치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 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뭣하러 시서 따위를 익히겠는가!” 육생이 말하였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지만,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陸生時時前說稱詩書。高帝罵之曰:「乃公居馬上而得之,安事詩書!」陸生曰;「居馬上得之,寧可以馬上治之乎?」
<사기: 역생육가열전>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 토기 조각들을 발견한다. 혹시 옛 유물의 흔적은 아닐까? 계속 파내려 가자 사람 모양의 흙인형이 나왔다. 성인 크기의 이 흙인형은 분명 범상치 않은 유물이었다. 본격적인 발굴작업이 이어지자 더 많은 흙인형이 발굴되었다. 수십, 수백 개가 아니라 거대한 군단을 이룰 정도였다. 흙인형(俑) 병사(兵)와 말(馬)이 발견된 구덩이(坑)라는 이름의 병마용갱兵馬俑坑은 반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병마용갱을 직접 보면 그 크기와 숫자에 압도당하고 만다. 과연 이 수많은 흙인형을 빚어낸 권력은 어떤 것이었을까? 중국 최초의 황제, 시황제의 흔적은 이 천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깊은 인상을 남긴다. 병마용갱이 발굴되지 못했다면 시황제에 얽힌 다양한 이야기를 그리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병마용갱이 발굴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시황제에 얽힌 사마천의 기록에 많은 과장이 섞여 있으리라 여겨졌다. 전설 같은 이야기겠거니 하는 식의.


병마용갱의 병사들이 시황제의 무덤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시황제의 무덤은 일찌감치 도굴되었고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이다. 그러나 출토되는 유물들은 그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 여불위의 이름이 새겨진 창 날(戈)이 발견되기도 했다. 병마용 뒤 커다란 흙 언덕 안에 진시황의 무덤이 있으리라 예측되고 있다. 발굴된다면 또 어떤 유물들이 있을까? 그러나 부장품의 훼손을 우려해 발굴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도 발굴 계획이 없다.


사마천은 그의 무덤 안에 궁궐의 모양을 갖추어 놓았으며 천하의 모습을 본떠 장식해 두었다고 전한다.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었으며, 하늘의 별을 수놓고 땅의 지형도 본떠 놓았다. 그는 살아서도 제왕이었으며 죽어서도 천하이 제왕이었다. 그러나 그를 이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방의 죽음은 이와 달랐다. 사마천은 유방의 무덤에 대해 별 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의 소탈한 성품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였을 것이다.


진나라의 멸망 이후 그는 항우와 일전을 벌이고 결국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 전란의 시대를 매듭지었으나, 유방은 좀처럼 쉴 수 없었다. 흉노와 전쟁을 벌여야 했고, 한때 전우였던 이들의 반란을 토벌해야 했다. 토벌이라니! 반란자로 지목되었던 이들은 무덤에서 발끈 성을 내며 항의할지 모른다. 토사구팽兎死狗烹, 쓰임을 다했으니 제거해버린 것 아니겠느냐고. 이 문제는 잠시 뒤로 미루도록 하자.


유방은 경포와 전쟁을 벌이던 중에 화살이 스치는 상처를 입었다. 경포는 항우, 한신, 팽월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맹장이었다. 그 상처는 싸움의 치열함의 흔적이기도 했다. 그 상처가 덧나 몸져눕게 되었다. 의원은 상처를 보고는 치료가 가능하다며 희망 섞인 이야기를 한다. 이때 유방의 말. “나는 평범한 백성의 자리에서 칼 한 자루를 쥐고 천하를 얻었다. 이것이 천명 아니겠느냐? 내 명줄(命)도 하늘에 달려있거늘 편작 같은 명의가 있다고 하더라도 달라질 게 무엇 있으랴!(吾以布衣提三尺劍取天下,此非天命乎?命乃在天,雖扁鵲何益!)”


유방에게 천명天命이란, 하늘이 개인에게 부여한 능력, 역할 따위를 가리키는 말에 불과하다. 그가 말하는 천명은 그리 고상하지도 않고, 명분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는 밑바닥에서 출발하여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당당함, 집요함, 유연함, 비열함 등이 그의 성공을 이끌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 따위가 아니라. 도리어 그는 도덕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유학자들을 골탕 먹이기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유학자들의 관을 벗겨 거기에 오줌을 싸기도 했단다. 그러나 글만 아는 백면서생에게 벌인 짓이지 제대로 된 비전과 능력을 갖춘 자에게는 예를 갖추어 대했다.


육생과의 만남도 비슷하다. 육생이 시서에 대한 가르침을 늘어놓자 유방은 호통을 치며 이렇게 대꾸할 뿐이었다. ‘이 몸은 말을 타고 전장을 누비며 천하를 재패했다. 시서 따위를 익혀 무엇하겠는가?’ 육생은 물러서지 않고 유방에게 질문을 던진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고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느냐고. 육생의 질문은 전란의 시대가 끝났으니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전장을 누비는 장수와 천하를 다스리는 황제는 다른 법이다.


유방의 자신의 태도와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이를 즉시 수정하는 기민한 유연함을 가지고 있었다. 육생의 말을 듣고 말에서 내려 천하를 경영하는 법을 배운다. 실제로 유방을 비롯하여 그의 전우들은 모두 출신이 변변치 않아 잔치를 벌이면 격 없이 웃고 떠들며 즐겼다. 누가 황제인지 누가 신하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위아래와 선후를 나눌 수 없으니 논공행상부터 문제였다. 저마다 제 공이 크다며 다투었기 때문이다. 이때 등장하여 교통정리를 한 것이 유학자들이었다. 옛 전통에 따라 황제의 자리와 신하의 자리를 나누고, 관직의 등급도 나누었다. 황제의 말과 행동, 신하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달라야 했는지를 일러주었다. 그제야 비로소 질서가 잡혔다.


유방 이후 한나라가 유학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는 점은 역대 황제의 시호에서도 볼 수 있다. 한나라는 진시황이 없앤 시법諡法을 부활시킨다. 유방은 사후 고황제高皇帝라는 시호를 얻는다. 이를 줄여 고제高帝라고도 하나, 사마천의 기술 <고조본기高祖本紀>를 따라 한고조 유방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뒤를 이어 효혜황제孝惠皇帝, 효문황제孝文皇帝, 효경황제孝景皇帝, 효무황제孝武皇帝로 이어진다. 보통 이를 간단히 줄여 혜제, 문제, 경제, 무제로 부른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시호를 ‘효孝’라는 글자로 시작한다는 점이다. 이는 효를 숭상한다는 점을 널리 알리기 위함이었다.


정말 역대 한나라의 황제들은 효자였을까? 역사 기록을 뒤져보아도 적당한 증거를 찾기 힘들다. 황제들이 효를 숭상하는 효자들이었던 게 아니라 효를 통해 제국의 안정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일찍에 <논어>에서도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 “효성스럽고 공손한 사람 치고 윗사람에게 대드는 사람을 보기는 힘들다.(其為人也孝弟,而好犯上者,鮮矣。)” 한나라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충효忠孝의 윤리를 적극 차용하고자 했다.


유방의 일대기를 보면, 출신이 미천하였기 때문인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볼 수 있다. 탄탄한 이론적 배경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소문의 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손수 만든 멋진 관을 쓰고 다녔는데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유씨관劉氏冠이라며 소문이 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에 얽힌 소문은 또 있다. 한 번은 그가 길을 가다 큰 뱀을 한 마리 베어 죽였다 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흉물스러운 뱀 한 마리를 죽였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소문에 따르면 그가 죽인 뱀은 백제白帝의 아들이었다. 백제의 아들을 베어 죽였으므로 유방은 적제赤帝의 후손이 된단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행五行이라는 독특한 세계관을 살펴보아야 한다. 오행설五行說을 주장하는 이들은 세계가 다섯 개의 요소로 구성되어 움직인다고 여겼다. 바로 화수목금토火水木金土, 이 다섯이다. 이 다섯은 서로 낳기도 하고(상생相生 : 火 —> 土 —> 金 —> 水 —> 木 —> 火 …) 서로 억누르기도 하여(상극相剋 : 金 —> 火 —> 水 —> 土 —> 木 —> 金 … )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는다. 이 다섯 가지 요소는 다섯 가지 색과도 연결되는데(五色: 火-赤 / 水-黑 / 木-青 / 金-白 / 土-黃) 이에 따르면 백제를 죽였다는 것은 금金의 기운을 억눌렀다는 것이니, 곧 그는 화火의 기운을 가진 적제라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오행의 상생상극의 해석에 그치지 않는다. 오행설은 출발부터 국가의 운명을 이야기하는 논리로 체계화되었다. 즉 오행의 성질에 따라 국가의 흥망성쇠가 이어진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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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이라 하는데, 이미 진나라 성립 이전부터 널리 퍼져있었다. 이에 따라 시황제의 진나라는 흑색을 숭상했다. 이는 주나라가 화덕火德을 따랐으니 이를 극복하고 새롭게 등장한 진나라는 수덕水德의 나라이며 이에 따라 흑색을 숭상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따라 진나라는 기본 흑색을 기본 복색으로 삼았으며, 백성을 검수黔首, 검은 머리라는 뜻의 말로 바꾸어 부르기도 했다.


이 오덕종시설에 따르면 한나라는 진나라를 무너뜨리고 성립되었으므로 수극토水剋土의 논리에 따라 토덕土德을 상징하는 황색을 숭상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진나라를 계승한다면 수생목水生木에 따라 목덕木德을 상징하는 청색을 숭상하던가. 그러나 어째서 유방은 백제를 벤 적제로 소문났을까? 이에 대한 합리적인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이는 오덕종시설을 이용하여 단순히 새로운 나라의 창업자로 이름을 떨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덕종시설이 아직 체계적으로 완결된 논리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진나라를 상징하는 검은 뱀을 베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못한 것일 수 있다. 아니면 흰 뱀을 베었다는 이야기에 오덕종시설의 논리를 결합하여 신비로움을 더하고자 했다던가. 문제 시기에 이르면 이를 바로잡고자 한나라는 토덕을 숭상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가 나타난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주장대로 문제 15년, 실제로 황룡이 나타났단다. 믿거나 말거나.


이처럼 유방이 세운 새로운 제국은 예법을 중시 여기는 유가의 논리, 그리고 기존에 있던 오덕종시설과 같은 왕조교체설의 이론을 참고하여 하나씩 나라의 기틀을 잡아간다. 아마 유방과 그의 동료들은 물론 한나라의 역대 황제들은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이름이 이토록 오래 남아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漢族, 그들의 언어 漢語, 그들의 문자 한자漢字 등을 생각하면, 중국이라는 세계의 정체성을 이루는 다양한 개념들이 틀을 잡은 시기라 할 수 있다. 한편 진秦은? 해석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진秦을 가리키는 qin이라는 말에서 중국을 뜻하는 차이나china라는 말이 나왔다는 주장도 있다.


기나긴 춘추전국의 혼란이 끝나고 진나라와 한나라의 등장은 새로운 종합과 체계화의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전까지 마구 등장했던 다양한 학설과 학파는 이제 제국의 울타리 안에서 하나의 커다란 줄기로 정리된다. 유가儒家를 중심으로 정리되는 이 시기를 일컬어 혹자는 유가독존儒家獨尊 시대라 일컫기도 했다. 한나라 초기의 소박함 대신 국가철학으로서의 체계화된 새로운 철학이 등장한다.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 2강 제자백가 난세를 논하다

강의 영상 : https://youtu.be/CcK01hSF2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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