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후예는 누구인가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3-2

by 기픈옹달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주나라 무왕과 문왕은 자제들을 제후로 삼아 성이 같은 이들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서로 멀어지자 마치 원수처럼 다투었습니다. 제후들이 서로를 죽이고 멸하는데 이르렀어도 주나라 천자는 이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周文武所封子弟同姓甚眾,然後屬疏遠,相攻擊如仇讎,諸侯更相誅伐,周天子弗能禁止。
<사기: 진시황본기>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한 이후 신하 가운데 자제를 왕으로 삼기를 권한 이들이 있었다. 천하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었으나 이를 모두 다스리기 힘드니 주나라 때처럼 제후국을 만들자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사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는 여러 제후를 삼은 것이야말로 전란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고 본다. 절대적인 권력, 황제의 출현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천하를 다시 나누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시황제는 이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현郡縣을 설치하였고 지방에 관리를 파견하였다. 군현제郡縣制, 이른바 중앙집권체제의 탄생이다.


천하구주天下九州라는 말이 있다. 천하가 아홉 개의 주로 나뉜다는 말이다. 어찌 비단 천하만 그럴까. 유학자들은 토지도 아홉으로 나누어야 한다고 보았다. 아홉으로 나눈 토지 가운데 하나를 공전公田으로 삼고 나머지 여덟을 사전私田으로 삼는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1/9을 세금으로 내는 게 된다. 이를 정전제井田制라고 하는데, 우물 정자(井) 모양으로 아홉 등분 하는 제도라는 뜻이다. 정전제는 맹자 이래로 유학자들의 공통된 이상이었다. 돌아오면, 천하도 마찬가지. 중앙에 왕이 있고 나머지는 제후들이 다스리면 될 일이다. 봉건제封建制를 통해 천하는 한가족이 되고, 조화를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유학자들은 정전제와 봉건제로 고르게 나뉜 천하를 꿈꾸었다.


시황제도 유학자들의 도전을 받는다. 그들이 보기에 천하에 우뚝 솟은 황제 한 사람의 권력은 위태로워 보였다. 자제와 공신을 제후로 삼아 버팀목으로 삼자. 더구나 시황제는 자제들도 신분상으로는 평민이나 마찬가지이니 권력을 탐내는 신하가 나타난다면 하루아침에 혼란에 빠지지 않을까? 신하들 사이에서 다시 한바탕 논의가 벌어지나 이번에도 이사가 승리한다. 이사는 옛 법을 지금 사용할 수는 없다 주장하며, 이들의 주장이 군주의 위세를 꺾고 붕당을 만들어 세력을 구축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고 본다. 이사의 주장은 한걸음 더 나아간다. 진나라의 역사가 아니면 모두 불태워야 한다.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서적을 빼앗고, 민간에서 옛 글을 논하는 이들도 죽여버리자. 이리위사以吏為師, 대신 관리를 백성의 스승으로 삼자.


이것이 사마천의 기록에 남아있는 분서갱유 사건의 배경이다. 분서갱유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잔혹한 사상탄압을 떠올리곤 한다.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단편적인 이해는 늘 한계를 갖기 마련이다. 잔혹한 임금과 아첨하는 신하, 진시황과 이사를 악마화 시켜버리면 끊임없이 벌어지는 사상적 갈등의 맥락을 이해하기 힘들다. 진나라의 군현제와 주나라의 봉건제만 보더라도 그렇다. 역사는 진나라의 몰락 이후 군현제가 폐기된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군현제가 제기한 문제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약 이천여 년 뒤 신해혁명으로 황제 제도가 폐지되기 이전까지, 황제는 천하의 유일한 지배자로 군림했다. 아니, 황제라는 이름만 사라졌을 뿐, 황제의 옥좌는 여전히 견고한지도.


따라서 진나라의 등장은 후대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볼 수 있는 여느 통일 왕조의 등장과는 다르다. 분명 거대한 전환이 이루어지는 시대였고, 필연적으로 이는 팽팽한 갈등을 낳았다. 과거 전통을 숭배할 것인가, 현재 새로운 개혁을 추진할 것인가. ‘예’라는 문화 규범으로 통치할 것인가, ‘법’이라는 객관적인 원칙으로 통치할 것인가. 국가란 커다란 가족인가, 아니면 낯선 이들이 모인 거대한 집단인가. 후대의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두고 저마다의 주장을 펼쳤다. 앞의 것을 유가, 뒤의 것을 법가라 하겠지만 순수한 유가도 순수한 법가도 존재하지는 못했다는 점을 기억하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진시황이 제기한 문제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진시황은 스스로를 ‘짐朕’이라 불렀는데, 황제라는 새로운 권력에게 적합한 말이었다. 이 말은 본디 조짐兆朕을 뜻하는 말로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황제는 여느 사람에게 쉽게 보이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생활하는지 알리지 않고자 했다. 황제의 거처는 백성에게는 물론 신하들에게도 보이지 않아야 했다. 얼굴 없는 권력, 이사와 진시황이 꿈꾼 것은 일종의 거대한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진시황은 평원진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다. 떠도는 이야기로는 그가 영생을 찾아 이런저런 약을 먹었기에 급사했다고 보는 입장이 있다. 그러나 천하의 일을 맡아 격무에 시달리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았다고 보는 것이 옳다. 그는 지방을 돌아다니느라 종종 궁궐을 비우곤 했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제국은 물론 자신도 이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역사는 환관 조고와 승상 이사가 힘을 합쳐 진시황의 죽음을 덮고, 진시황의 유지를 따라 첫째 부소를 황제로 삼는 대신 막내 호해를 황제로 세웠다 기록한다. 바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주인공이다. 호해가 아버지를 이어 이세황제, 새로운 제국의 지배자가 되었지만 실세는 환관 조고였다. 그는 자신의 위세를 자랑하기 위해 사슴을 바치면서 말이라 주장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호해는 좌우 신하들에게 묻는다. 말인가 사슴인가? 그러나 누구도 사슴을 사슴이라 하지 못했다.


이 고사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못한 제국이 어떻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한편 제왕 한 명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될 수 없다는 사실도 똑같이 보여주고 있다. 이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이후 천하를 통일하는 한漢나라는 진나라 군현제의 형식 위에 주나라 봉건제의 이상을 더했다. 이를 군국제郡國制라고 부른다.


한나라의 통일을 이야기에 앞서 짚어두어야 할 인물들이 있다. 먼저 진승과 오광. 이들은 고향을 떠나 노역을 하기 위해 먼 길을 가는 중이었다. 큰 비를 만나 도저히 기일에 맞춰 도착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당시 진나라의 법은 늦게 도착하는 이에게 사형을 내렸다. 가도 죽고 돌아가도 죽는다. 이에 이들은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다. 이때 진승이 던진 질문. “왕후장상녕유종호王侯將相寧有種乎,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는가?” 어찌 나면서부터 왕이 되고 제후가 되는 시대만 있겠는가. 나라고 왕, 나아가 황제가 되지 못하리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자신도 한번 천하의 지배자가 되어보겠다는 당돌한 포부를 가지고 진승은 왕을 자처한다. 그의 나라는 불과 몇 달 가지 못했으나, 그의 선언은 새로운 난세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사실 이전부터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진승의 반란에 앞서, 그와 비슷한 말을 꺼낸 인물들이 있었다. 항우는 진시황의 행차를 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나도 저 자리에 오를 수 있겠다.(彼可取而代也。)" 한편 유방은 이렇게 말했다. "아! 장부라면 저 정도는 되어야지!(嗟乎,大丈夫當如此也!)" 진시황은 스스로 얼굴 없는 신비로운 존재가 되고 싶었지만, 누구나 그의 자리를 탐할 수 있었다. 주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무찌르며 내세웠던 천명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맹자가 바랐던 것처럼 폭정을 끝내고 인정을 베풀겠다며 나선 이도 없었다. 그들에게 진시황은 하나의 실현 가능한 인간상 가운데 하나였다. 역사는 진승과 오광, 항우와 유방을 진나라에 반기를 든 인물로 기록한다. 그러나 거꾸로 이들이야 말로 진시황의 후예라 할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진시황과 비슷한 꿈을 꾸었다.


이들 가운데 항우와 유방의 싸움이 특히 유명하다. 초패왕 항우와 한왕 유방의 싸움은 오늘날에도 장기판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것뿐인가 다양한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재생산되고 있다. 파부침주破釜沈舟, 솥을 깨고 배를 부수고 결전을 다짐했다는 항우 이야기. 먼저 진나라 수도를 점령했지만 약법삼장約法三章, 법령을 간소화하여 불안을 잠재운 유방 이야기. 그리고 홍문연에서 벌어진 이 두 세력의 눈치싸움, 초나라 의제義帝를 폐하고 패왕의 자리에 앉은 항우와 그를 꺾는데 활약한 또 하나의 전쟁 귀재 다다익선多多益善의 한신까지. 이 둘의 이야기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새로운 평가와 해석을 통해 재생산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패왕별희覇王別姬, 패왕 항우와 우희虞姬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항우는 패배를 모르는 전쟁의 신이었지만 오뚝이처럼 끊임없이 일어나는 유방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쟁을 계속할수록 승리를 맛보았지만 갈수록 군세가 줄었다. 결국 해하垓下에서 포위당하고 만다. 이때 한나라 군대에서는 초나라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사면초가四面楚歌,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려오자 초나라 사람들도 유방 편은 든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들었다.


이날 밤, 항우는 아래와 같은 시를 지어 노래를 부르고 마지막 결전에 나선다.


力拔山兮氣蓋世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으나
時不利兮騅不逝 때가 불리하니 ‘추騅’도 달리지 못하는구나
騅不逝兮可柰何‘추’가 달리지 못하니 어떻게 해야 할까.
虞兮虞兮柰若何‘우희’여, ‘우희’여 너는 또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짧은 기록에도 훗날 사람들은 여러 상상을 덧붙였다. 한 영웅의 최후가 적잖이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기 때문일 것이다. 항우는 ’시불리혜時不利兮’ 시대가 자신의 편이 아니어서 싸움에서 패배하고 말았다고 주장한다. 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의 곁에는 늘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 ‘추’와 아름다운 여인 우희가 있었다. 역사는 항우의 죽음을 기록하지만 이 둘의 최후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어쨌든 그는 늘 말 위에 있었고, 말 위에서 천하를 호령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 알지 못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호령할 수는 있으나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진시황이 구중궁궐에서 천하를 지배했다면 항우는 말 위에서 천하를 지배했다. 그러나 둘 모두 천하를 다스리는 자리는 아니었다. 구중궁궐로 사라지지도 말아야 하며 말 위에서 위용을 뽐내기만 해서도 안 된다. 유방이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둘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방은 재주도 대단치 않았고 출신도 별 볼 일 없었다. 한량閑良 같은 이가 어떻게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오를 수 있었을까? 유방 당시에도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엇갈렸다. 유방 스스로도 이런 논의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재능도 별 기반도 없는 이가 어떻게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의 대답은 흥미롭다. 장량, 소하, 한신을 언급하며 이들이 자신보다 더 능력이 빼어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자신은 이들을 거느릴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 바로 그 유명한 삼불여三不如의 고사이다.


진시황과 항우는 각각 새로운 정신과 뛰어난 능력으로 역사를 가로지른 인물들이다. 이들이 각기 개인의 능력으로 천하를 주름잡았다면 유방에게는 조직이 있었다. 천하를 통치하려면 곁에 있는 사람을 쓸 줄 알아야 했다. 진나라의 등장으로 법가 천하가 열렸다고 생각했지만, 한나라의 등장 이후 유가가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람을 다스리고 이끄는 관계의 기술. 새로운 황제는 유가의 쓸모를 꿰뚫어 보았다.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 2강 제자백가 난세를 논하다

강의 영상 : https://youtu.be/CcK01hSF2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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