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의 시대, 새로운 발견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4-2

by 기픈옹달

* 동대문도서관에서 진행하는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 철학사' 강의안 초안입니다. (링크)


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다 한 노인을 만났다. 푸른 눈동자에 아이처럼 맑은 얼굴이었는데, 손에는 지팡이를 들었다. 장각을 동굴 속으로 부르더니 세 권의 기이한 책을 주었다. “이 책의 이름은 <태평요술太平要術>이다. 이 책을 가지고 하늘을 대신하여 가르침을 펼쳐 백성들을 구제하거라. 만약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반드시 재앙이 내릴 것이다.” 장각이 절을 하고 이름을 물었다. “나는 남화노선南華老仙이라 한다.” 말을 마치자 바람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因入山採藥,遇一老人,碧眼童顏,手執藜杖,喚角至一洞中,以天書三卷授之,曰:「此名太平要術。汝得之,當代天宣化,普救世人;若萌異心,必獲惡報。」 角拜問姓名。老人曰:「吾乃南華老仙也。」言訖,化陣清風而去。
<삼국연의>


맹자는 오백 년에 한 번 성인이 나타난다 보았다. 어째서 오백 년일까? 아마도 오덕종시설五德終始說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의 말이 맞다면 오백 년에 한 번 성인이라 할만한 인물, 즉 천하의 어지러움을 끝내고 왕도정치의 이상을 펼칠 제왕이 나와야 할 테다. 그러나 당연히 실제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백 년에 한 번 성인이 나타나기는커녕 오백 년을 채 가지도 못한 나라들이 수두룩했다.


진나라는 천하를 통일한 이후 약 채 20년도 가지 못했다. 한나라는 중국 역대 왕조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한나라도 왕망(王莽 BCE45 ~ 23)의 신新나라로 명맥이 중간에 끊긴다. 보통 신나라 이전을 전한前漢, 신나라 이후를 후한後漢이라 부른다. 전한의 경우 서쪽의 장안長安, 오늘날 시안西安 일대에 수도를 두었으므로 서한西漢이라 부르기도 한다. 후한의 경우 동쪽의 뤄양洛陽에 수도를 두어 동한東漢이라 부르기도 한다.


중국 드라마나 영화를 즐겨보는 사람이라면, ‘동한말년東漢末年’이라는 표현을 만나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한나라 말기에 또 다른 난세가 펼쳐지는데 흔히 삼국시대三國時代라 불리는 시기이다. 아마도 중국 역사 가운데 춘추전국시대와 더불어 대중에게 가장 친숙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바로 소설 <삼국연의三國演義> 때문일 것이다.


<삼국연의>는 다음과 같은 구절로 시작한다. "천하의 큰 흐름을 이야기해보자. 나뉜 것이 오래되면 반드시 통일되며, 통일된 나라도 오래되면 반드시 나뉜다. (話說天下大勢,分久必合,合久必分)" 맥락이 조금 다르지만 맹자도 일찍이 비슷한 말을 하기도 했다. 일치일란一治一亂, 치세와 난세가 번갈아 나온다. 통일왕조 한나라의 치세가 끝나고 다시 분열의 시대, 즉 난세가 펼쳐질 차례였다. 이 혼란기는 후한 말기부터 수나라의 통일까지 약 400년간 이어진다. 이 전체를 통틀어 ‘위진남북조 시대’라 부른다. 참고로 삼국시대는 이 가운데 고작 100여 년을 차지할 뿐이다. 여기서도 <삼국연의>의 주요 인물이 등장하는 시기는 약 50여 년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끊임없이 회자되는 것은 소설 <삼국연의>의 매력 때문일 것이다. 또한 중요한 변화의 시기이기도 했다.


한나라 말 커다란 민란이 일어났다. 이를 보통은 ‘황건적의 난(184)’이라 부른다. 누런 수건을 머리에 둘렀기에 ‘황건黃巾’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적賊’이란 보통 국가와 사회를 어지럽히는 이들을 부정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황건적’이라는 말에는 이들이 한나라를 뒤흔들어 난세의 원인이 되어버렸다는 시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이미 오랜 왕조는 낡아버렸고 여러 문제로 사회가 병들었다. 이런 시기에 백성들이 불만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 농민반란, 민중반란의 역사를 중시하는 관점에서는 ‘황건기의黃巾起義’라 부르기도 한다.


<삼국연의>의 묘사에 따르면 장각(張角 ? ~ 184)이 약초를 캐러 산에 갔다 한 노인을 만나 책을 받는다. 그 책의 이름은 <태평요술太平要術>인데, 이 책을 익혀 다양한 술법을 부릴 수 있게 되었다 한다. 그는 농민을 규합하여 군대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천공장군天公將軍이라 불렀으며 동생 장보를 지공장군地公將軍, 장량을 인공장군人公將軍이라 불렀다. 한편 이 책을 전해준 이의 이름이 흥미로운데 바로 남화노선南華老仙, 바로 제자백가 가운데 한 명인 장자莊子 였단다. 남화노선은 장자의 별명 가운데 하나로 <장자莊子>를 일컬어 <남화진경南華真經>이라 부르기도 했다.


<삼국연의>의 기록은 역사와 이야기가 뒤섞여 있어 과연 역사적 사실이 어떤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다,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의 기록을 참고하면 장각 형제가 천공장군 등을 칭하며 군대를 일으켰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이들은 종교를 통해 농민들을 모았는데, 부적으로 병자를 고치며 신도들을 모았다. 민간종교가 당신의 어지러운 상황과 맞물려 대규모 봉기로 이어진 것이다. 이 종교를 태평도太平道라 한다. 태평太平이라는 일종의 천년왕국을 기대한 무리라 할 수 있다. 이 밖에 기이한 책을 받았다는 이야기나 이를 바탕으로 술수를 부린 것 등은 소설적 창작일 것이다. 헌데 어째서 남화노선, 즉 장자가 등장하는 것일까?


이는 한나라를 지나면서 도교道教라는 형태의 종교가 탄생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도가道家의 개념을 차용하였으며 다양한 민중신앙의 요소도 받아들였다. 역사적 인물, 혹은 고대 철학자로서 장자가 아니라 신선의 모습을 한 남화노선이 이 이야기에 등장할 수 있는 것은 당시의 그런 상황을 반영한 결과라 하겠다. 한나라 말기에는 태평도를 비롯하여 오두미도五斗米道라는 이름의 종교도 창시된다. 오두미교는 입교할 때 오두미五斗米, 쌀 다섯 두를 내야 했다. 이들은 봉기를 일으킨 태평도와 달리 서쪽 변방의 한중이라는 지역에 모여 종교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다. <삼국지>의 장로(張魯)가 바로 그 교단의 주요 인물이었다.


이렇게 한나라 시기에 시작된 도교는 이후 중국 역사 속에서 민중 운동의 요소로 작동하기도 하고, 철학적 관념의 요소로 다시 수용되기도 하고, 다양한 이야기나 설화의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태평도와 오두미도에서 볼 수 있듯, 도교는 양생養生 즉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특징이 있었다. 한편 태평太平이라는 말에서 볼 수 있듯, 현재의 문제를 일소에 해결하는 종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이런 까닭에 민중에게 폭넓게 수용되고, 새로운 변화의 동력으로 쓰일 수 있었다.


<삼국연의>에 따르면 당시 태평도는 다음과 같은 가사의 노래를 널리 알렸단다.


창천이사蒼天已死 푸른 하늘이 이미 죽었으니
황천당립黃天當立 누런 하늘이 반드시 서리라
세재갑자歲在甲子 새해 갑자년이 되면
천하대길天下大吉 천하에 큰일이 있으리


여기서 창천蒼天이란 한나라 조정을 가리킨다. 한나라가 이미 낡고 부패했으니 새로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말이다. 헌데 어째서 이를 대신할 나라가 황천黃天, 누런 색을 지니고 있을까? 이 역시 오덕종시설과 연관이 있다. 한나라가 화덕火德의 나라이므로 화생토火生土, 이를 계승하여 토덕을 의미하는 누런색을 차용하였다. 헌데 어째서 화덕을 의미하는 적천赤天이 아니라 창천蒼天, 푸른 하늘일까? 푸른 하늘이라면 목덕木德을 상징하는데. 이는 난을 일으킨 184년이 갑자년甲子年이었기 때문이다. 십간十干을 오행五行으로 나누면 갑자년은 목덕의 해가 된다. 갑자년에 봉기를 계획하여 ‘푸른 하늘의 죽음’을 구호로 삼아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는 실패하고 도리어 군벌 세력이 강성하는 결과를 낳는다. 조정에서는 외척 세력을 통해 지방 군벌을 제어하려 하는데 이때 대장군에 오른 이가 바로 하진何進이라는 인물이다. 그는 본디 백정 출신이었으나 동생이 황후가 되자 대장군의 자리에 까지 오른다. 원소 조조 등 신진 세력과 결탁하여 십상시十常侍라 불리는 황실 내부의 세력을 일소하고자 계획한다. 그러나 도리어 십상시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하진의 죽음 이후 원소를 비롯한 젊은 무장들은 황궁에 들어가 십상시를 도륙한다. 황궁이 크게 어지러운 상황에서 이를 수습하고 세력을 잡는 것이 바로 동탁이라는 인물이다.


조조.jpg 쉬창시 조승상부의 조조 동상


대체로 이것이 <삼국연의> 초반의 정세인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인물은 바로 대장군 하진이다. 왜냐하면 그의 손자 하안(何晏 190? ~ 249)이 매우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하안은 어머니를 따라 조조의 집안으로 들어가 조비, 조식 등과 함께 자란다. 조조의 양자나 다름없던 셈. 그러나 조비는 그를 미워하여 ‘남의 자식’이라 부르며 욕하기도 했다. 그는 이후 동복누이, 그러니까 어머니와 조조 사이에서난 금향공주와 결혼하여 부마, 왕의 사위가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아무런 실권을 잡지 못하다가 조비의 손자 조방이 황제에 자리에 오르자 권력의 중심에 선다. 그러나 사마의가 벌인 쿠데타 고평릉 사변으로 목숨을 잃는다.


고평릉 사변 이후 조조의 조씨가 아닌 사마의의 사마씨가 나라의 권력을 잡고 결국엔 조씨의 위魏나라가 아닌 진晉나라로 된다. 이 시기를 위진魏晉시대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마씨의 진나라가 권력을 잡았으므로 숙청대상이었던 하안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논어집해>의 편집자 가운데 하나였으며 가장 중책을 맡았던 인물이기에 그를 <논어집해> 편집의 실질적 인물로 본다.


하안 이전까지 <논어>는 몇 차례 정리되며 여러 판본이 있었다. 하안은 다시 <논어> 본문을 정리하고 당대까지의 해석을 묶어 <논어집해論語集解>를 펴낸다. 이후 이 책은 약 천년 뒤 주희의 <논어집주論語集注>가 등장하기 전까지 <논어>의 표준 판본인 동시에, 표준 해석이 되었다. 즉, 하안 이전의 <논어>는 오늘날 우리가 읽는 <논어>와 조금 다른 모습일 수 있다는 이야기며, 그가 내놓은 주석의 방향대로 주희 이전까지 천년 넘게 <논어>를 읽고 해석하였다는 뜻이다.


역사는 하안이 <논어> 이외에 <노자>와 <장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고 전한다. 유가와 도가를 대립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언뜻 이상한 일이지만, 당대에는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일이었다. 하안과 교류하던 왕필(王弼, 226 ~ 249) 역시 <논어>에 관심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왕필의 <논어> 해석은 파편적으로 일부만 전해질뿐이며 <노자>와 <주역> 주석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왕필은 중국 역사에 손꼽히는 천재로 이야기되곤 한다. 이는 20대에 이미 중국 역사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주석서를 세상에 남겼기 때문이다. 특히 <노자 왕필주>가 중요한데, 지금까지도 <노자> 해석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 전하는 기록에 따르면 하안은 왕필을 만나고 <노자>에 대한 주석서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의 빼어난 해석에 보탤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라나. 왕필과 배휘가 나눈 대화도 유명하다. 배휘가 먼저 묻는다. 공자는 ‘무無’를 이야기하지 않았고 노자는 ‘무’를 여러 차례 강조했다. 어째서 그런 걸까? 왕필의 대답은 이렇다. 공자는 ‘무’를 체득하여 ‘무’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고, 노자는 아직 ‘무’를 체득하지 못했으므로 ‘무’에 대해 수차례 이야기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여러 텍스트를 넘나들며 자유롭게 사상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공자를 성인으로 보는 관점은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무無’라는 주제를 심도 깊게 논의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왕필은 세계의 근원을 ‘무’로 보고 이를 체득해야 할 궁극적 가치라 생각했다. 무를 체득하여 혼연일체가 된 경지가 왕필이 추구하던 목표였다.


이처럼 이 시기는 또 다른 혼란의 시기였지만 새로운 종합과 창의적인 발견의 시대이기도 했다. 하안의 <논어>, 왕필의 <노자>처럼 택스트를 편집하고 해석하는 철학적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들보다는 조금 더 이후의 인물이지만 곽상(郭象 252? ~ 312)의 <장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제 분수를 지키며 자신의 자리에 만족하는 것이 중요한 덕목이라 보았다. 사마천의 <사기>에 따르면 <장자>는 본래 10여만 자였다 한다. <한서 예문지>에 따르면 52편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33편 약 6만 5천여 자의 <장자>는 곽상이 정리하고 주석을 단 결과물이다.


삼국시대는 말 그대로 세 나라가 동시에 일어난 시기였다. 위, 촉, 오 세나라에 각각 황제가 있었다. 본디 황제는 하나뿐이어야 하지만 어지러운 시대는 천하를 셋으로 나뉘어 놓았다. 이런 난세 속에 치열한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전란과 암투, 여기서 물러나 개별적인 삶에 몰두하고 보다 초월적 지대를 꿈꾸는 이들이 등장했다. 왕필이나 곽상의 해석이 이러한 경향에 일조했다.


흔히 이 시기의 철학을 중현학重玄學이라고도 하는데, 중현重玄이란, <노자>에서 말한 도道의 형상 현玄, 아득하다는 표현을 더욱 밀어붙인 표현이다. "아득하고 또 아득하다 (玄之又玄)"는 말처럼 ‘도’는 초월적 대상인 동시에 말과 언어의 굴레를 벗어나 기묘한 존재양식을 갖는 무엇이 된다. '없음의 없음'이라는 식으로 기존의 유무관을 뛰어넘는 독특한 사유가 이 시대 철학의 특징이다.


이러한 철학이 등장한 것은 기존의 이쪽과 저쪽이라는 구분으로 현실의 어지러움을 해결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후세의 학자들은 이 시기 철학자들을 '염세주의적'이라 평가하기도 하는데, 현세를 부정하는 동시에 대안적 세계도 또한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것.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것. 아득하고 아득하기만 한 그 무엇. 흔히 '부정의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한다. 이 말처럼 이런 부정의 논리를 그렇게 해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그러나 고대 중국인들은 이 부정의 부정이라는 방식을 통해 또 다른 개념을 상상하곤 했다. '없음의 없음', 선도 없고 악도 없는(無善無惡) 그 무엇.




여섯 꼭지로 읽는 중국철학사 | 3강 진시황과 한무제, 황제의 탄생

강의 영상 : https://youtu.be/qKsCwUVduyA


keyword
이전 14화변방의 소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