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만나는 장자 3
앞서 언급했듯 <장자>에는 공자가 많이 등장한다. 대부분 지어낸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아주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니다. 일부는 공자가 실제로 경험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이런 까닭에 동일한 사건이 <논어>와 <장자>에 다르게 실려있기도 하다.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의 노래가 대표적이다.
초나라의 광사 접여가 공자 곁을 지나가며 이렇게 노래하였다.
“봉황이여! 봉황이여! 어찌하여 이 꼴이 되었는가? 과거는 탓할 수 없지만, 앞일은 그래도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 그만두라! 그만두라!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위태로울 따름이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와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피해서 이야기할 수 없었다.
– 박성규 역, 소나무. 713쪽 <미자 5>
원문에는 '초광접여楚狂接輿'라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미치광이(狂)란 정신이 어떻게 된 게 아니라 세속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통상적인 방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 그래서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당하지만 거꾸로 새로운 지혜를 가진 현인賢人이라 할 수 있다. 공자가 수레에서 내려 그를 만나고자 했던 것도 이런 까닭이다.
비슷한 장면이 <장자>에도 보인다. 차이를 주목해보자.
공자가 초楚나라에 갔을 때, 초나라의 광접여狂接輿는 그(가 머문) 집 문앞을 오가며 노래했다.
“봉새여, 봉새여, 어째서 네 덕이 약해졌느냐. 앞날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날은 좇을 수가 없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룩하지만, 천하에 (올바른) 도가 없으면 성인은 (몸을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행복은 깃털보다 가벼워도 (손에) 담을 줄 모르고, 재앙은 땅보다 무거워도 피할 줄을 모른다. 그만두게, 그만둬. 도덕으로 사람을 대하는 짓은. 위험하네, 위험해. 땅에 금 긋고 (그속에서) 허둥대는 따위 짓은. 가시(나무)여, 가시여. 내 가는 길 막지 말라. 내 가는 길은 구불구불 (위험을 피해 가니), 발에 상처를 내지 말라. 산의 나무는 (사람에게 쓸모 있어) 스스로 자기를 베게 만들고, 등불은 스스로 제 몸을 태운다. 계수나무는 (계피를) 먹을 수 있어서 베어지고, 옻나무는 (옻칠에) 쓸모 있어 쪼개진다. 사람들은 모두 쓸모 있는 것의 쓸모는 알아도 쓸모 없는 것의 쓸모를 모른다네.”
– 안동림 역, 현암사. 143쪽 <인간세>
전체 줄거리는 같지만 큰 차이가 있다. <논어>의 접여는 ‘과거는 탓할 수 없지만, 앞일은 그래도 도모할 수 있지 않은가?(往者不可諫,來者猶可追。)’라며 지나간 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말고 미래를 기약하자고 말한다. 과거보다 미래를! 미래지향적이라 할 수 있을 법하다. 그러나 <장자>의 접여는 염세적이다. ‘앞날은 기대할 수 없고 지난날은 좇을 수가 없다.(來世不可待,往世不可追也。)’ 과거도 미래도 부정한다. 과거는 과거의 것이며, 미래도 기대할 것이 없다. 무엇이 이 차이를 만들어 냈을까?
<논어>에서는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은 위태로울 따름이다.(今之從政者殆而)’라며 정치에 뛰어드는 것의 위험을 말한다. 반면 <장자>의 비판은 더 날카롭다. ‘천하에 (올바른) 도가 있으면 성인은 (그것을) 이룩하지만, 천하에 (올바른) 도가 없으면 성인은 (몸을 숨기고) 살아갈 뿐이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형벌을 면하는 게 고작일 뿐. (天下有道,聖人成焉;天下無道,聖人生焉。方今之時,僅免刑焉。)’ <장자>의 접여가 말하는 시대의 모습은 이렇다. '천하무도天下無道'! 극심한 혼란기에는 겨우 형벌을 면할 뿐이다.
주周나라는 천명天命을 받아 천하의 지배자를 자처했다. 주나라는 친족과 공신을 제후로 삼아 나라를 떼어주었다. 이를 봉토건국封土建國, 간단히 줄여 봉건封建이라 한다. 제후국들은 주나라의 봉건제 아래 크게 보면 한 집안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헌데 그 가운데 진晉나라가 망하는 일이 있었다. 조趙, 위魏, 한韓 세 집안이 진나라 임금을 죽이고 나라를 셋으로 나누었다. 그뿐인가 오나라와 월나라는 오랜 다툼으로 원한을 품어 서로의 임금을 죽이는 지경에 이르렀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는 연이은 복수로 상처투성이가 된 두 나라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전국戰國, 전란의 시대에는 그만큼 많은 죽음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전쟁터에서만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각국의 치열한 경쟁은 백성들의 삶을 쥐어짜내고 있었다. 장자는 이를 '겨우 형벌을 면할 뿐(僅免刑焉)'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이런 혼란의 시대는 가시나무 길을 걷듯 조심조심 살아가야 한다. 이제까지 통용되었던 전통적인 규범과 가치는 아무런 쓸모가 없게 되었다. 현재 내 삶을 챙기기도 버거운 상황, 이것이 장자가 마주한 현실이었다.
잔인한 시대의 엄혹한 현실은 가치관의 변화를 요구하기 마련이다. 예전의 방식대로 살아가다가는 스스로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뜨릴 수도 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이 (어느 날) 당상堂上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윤편輪扁이 당하堂下에서 수레바퀴를 깍(아 만들)고 있다가, 총치와 끌을 놓고 올라가 환공에게 물었다.
“(한마디) 묻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읽으시는 건 무슨 말(을 쓴 책)입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성인의 말씀이지.”
“성인이 (지금) 살아 계십니까?”
환공이 대답했다.
“벌써 돌아가셨다네.”
“그럼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이군요.”
환공이 (벌컥 화가 나서) 말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데 바퀴 만드는 목수 따위가 어찌 시비를 건단 말이냐. (이치에 닿는) 설명을 하면 괜찮되 그렇지 못하면 죽이겠다.”
윤편이 대답했다.
“저는 제 일(의 경험으)로 보건대, 수레를 만들 때 너무 깎으면 (깎은 구명에 바퀴살을 꽂기에) 헐거워서 튼튼하지 못하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들어가지 않습니다. 더 깎지도 덜 깎지도 않는다는 일은 손 짐작으로 터득하여 마음으로 수긍할 뿐이지 입으로 말할 수가 없습니다. 거기에 비결이 있는 겁니다만 제가 제 자식에게 깨우쳐 줄 수 없고 제 자식 역시 제게서 이어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70인 이 나이에도 늘그막까지 수레바퀴를 깎고 있는 겁니다. 옛사람도 그 전해 줄 수 없는 것과 함께 죽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 읽고 계신 것은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입니다.!”
– 안동림 역, 현암사. 355~365쪽 <천도>
장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知者不言 言者不知 – 아는 자는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자는 알지 못한다.’ 장자가 말하는 앎(知)이란 각자가 체득하는 깨달음을 말한다. 저마다 각자의 경험 위에서 개별적으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이 지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참된 깨달음이 아닐 것이다. 구체적인 상황이 빚어낸 생명력을 잃어버릴 테니 말이다. 어쩌면 이는 예민한 감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자가 성인聖人, 역사적인 문화영웅에 주목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윤편의 말을 통해 장자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무슨 들을 말이 있단 말인가. 그들의 지혜 역시 그들과 함께 죽어버렸다. 펄떡이는 현재의 삶이야 말로 주목해야 할 지점이다. 장자가 말하는 앎은 과거가 아닌 현재, 각자가 직면한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한다.
초나라 미치광이 접여는 지나간 과거를 붙잡지도 말고, 알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지도 말라고 말한다. 결국 현재 밖에 남지 않는다. 어지러운 시대에 내던져진 삶, 가시밭길과도 같은 척박한 현실을 살아내야 한다. 어떻게? 장자는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날카롭고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과거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 과연 좋을까? 낡은 지혜는 낡은 삶과 함께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 살가운 질문으로 바꿔보자.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지금까지와 같은 방법으로 사는 것이 옳을까?
* 고덕평생학습관 강의 : 장자를 만나러 가는 길(5강)의 강의안 초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