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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Nov 23. 2021

무운을 비오

떠나보낼 책에 대하여 #1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모 정치인이 '무운을 빈다'라고 한 말을 두고, YTN 기사는 無運, 그러니까 운이 없기를 바란다는 말로 해석했다. 상대의 불운을 비는 그런 몰염치한 말인 셈이다. 그러나 '무운을 빈다'는 말은 영 다른 의미를 갖는다. 武運, 즉 승기를 얻으라는 행운을 비는 말이다. 이 일을 두고 어느 언론은 한자 교육을 운운했으나, 그 역시 부질없는 비판이다. 불운이란 말은 하되, 무운이라는 말을 어디 쓰던가? 그냥 무턱대고 풀이하는 몰이해는 어떻게도 막을 수 없다. 사소한 일이나 뭇사람들에게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무운을 빈다'는 말을 수시로 읽고 들었던 사람들에게 이는 상상도 못한 사건이었다.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단 말인가!! 




무협지의 시대가 있었다. 원수는 원수를 낳고, 칼은 칼을 낳으며 고수는 고수를 부르는. 농반진반 무협지로 논술을 깨치는 시대도 있었다. 무협지라고 거기에 무도武道, 쌈마이들의 이야기만 있는 건 아니다. 거기엔 활자 인쇄물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미덕이 있었다. 무협지에 빠져 자연스레 활자인쇄의 매력에 빠졌으며, 서사의 풍부함을 향유했고, 무엇보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버릇을 들였다. 독서력 신장에 지대한 공헌이 있다고 하자. 무협지를 읽다, 책이 좋아졌고, 그러다 이 책 저 책 읽다, 연구자가 되었다는 서사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늘날 보면 뭔 그런 테크트리가 있나 싶지만.


무협지를 논하는데 진융金庸, 김용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숱한 무협소설이 그의 손을 거쳐 나왔다.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소오강호 등등. 그의 이름에 콩콩 가슴이 뛰는 이들이 적잖이 있으리라. 그래서 그의 책을 받아오는 날 적잖이 기분이 좋았다. 간체본 전집 가운데 1권~28권이 있었다. 나중에 찾아보니 36권 까지 있어야 하나 28권, 소오강호 1권이 끝이었다. 그즈음 문득 들었던 말이다. 무협지를 중국어로 읽으면 그렇게 재미있다고. 하긴 번역체로 읽어도 그렇게 재미있는 책을 원문 그대로 읽으면 그 재미는 또 어떨까. 그렇게 담아왔지만 여전히 먼지를 씻지 못하고 책장 한 구석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 개인적으로 나는 무협지에 그리 푹 빠진 적은 없었다. 그보단 역사소설. 협객보단 영웅이 좋았다. <삼국지>가 나의 최애소설이었다. 중학교 때였을 테다. 이문열의 삼국지 10권짜리 1질을 집에 가져오면서 뿌듯했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 집에까지 오려면 약 1시간가량 버스를 타야 했는데 그 무거운 책을 들고 오면서도 함박웃음이었다. 그리고 말 그대로 닳도록 읽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철이 들고는 <삼국지>를 뚝 끊었다. 다시 보려 해도 당최 재미가 없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영웅에 대한 동경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사기>를 읽으며 오래간만에 짜릿한 감성을 다시 마주했으니. <오자서 열전>을 읽으면서는 복수에 불타는 한 인간의 서사가 너무 좋았다. <자객열전>에서 역수를 건너는 형가의 노랫소리에 가슴이 울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사면초가의 현장, 패왕별희의 밤 항우의 노래에 마음을 빼앗겼다. 항우의 노래를 듣고 장수들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는데, 수천 년 후의 독자도 마찬가지였다. 


무협의 매력은 <사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칼 한 자루를 의지한 협객은 <자객열전>의 후예들이 분명하다. 오자서의 복수는 격정의 시대 속에 또 다른 복수로 재탄생하기 마련이다. 비극적 영웅의 서사는 어떤가. 그의 곁에는 명마가 있고 미녀가 있다. 중국의 수많은 이야기 꾼들은 얼마간 <사기>를 남긴 사마천에게 빚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헌 책으로 서가 한 귀퉁이에 꽂혀있는 <김용작품집金庸作品集>의 새 반려자를 찾는다. 이 책을 입양할 좋은 독자를 만났으면 좋겠다.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도끼자루 썩는 줄도 모르게 푹 빠져 읽을 사람이면 좋겠다. 한편 또 그렇게 따질 게 무어냐 싶기도 하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되지. 


일전에 <사기> 모임을 한 적이 있다. <사기본기>와 <사기열전>을 읽었는데 함께 공부하다 책이 무거워 놓고 돌아가 책만 덩그라니 남은 경우다. 일일이 연락처를 찾아 주인을 찾아줄 수도 없는 일이다. 이미 시간이 많이 흘렀다. 이 역시 새로 반려자를 찾아야 하는 책이다. 


김용작품집은 99년 삼련서점 출판본이고, <사기본기> 및 <사기열전>(1)은 민음사 개정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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