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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Aug 20. 2022

삼성가노, 여포를 위한 상상

방학을 맞아 아이들과 삼국지를 읽었다. 어떤 삼국지를 읽을까 하다 황석영 본을 만화로 옮긴 이충호의 <만화 삼국지>를 읽었다. 출판사에서는 황석영 '정역본'을 참고했음을 강조하지만 이를 일일이 확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참고로 이와 비교해서 아이들이 많이 읽는 책으로는 이희재의 만화가 있다. 이희재의 삼국지는 이문열의 삼국지를 만화로 옮겼다고 하는데, 이후 휴머니스트에서 재출간되면서는 이문열의 이름은 빠지고 나관중의 삼국지를 바로 만화로 옮겼다고 알리고 있다. 어째서 이문열의 이름을 빠졌는지는 알 수 없는 일. 뭔가 출판사의 사정이 있겠지. 


삼국지를 이야기할 때 이문열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테다. 아무래도 그의 삼국지가 우리나라의 삼국지 열풍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문열 삼국지 표지를 보면 '이문열 평역'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자신의 평을 덧붙여 옮겼다는 뜻이다. 자신의 관점에 따라 이야기를 조금 뒤틀고 인물의 성격을 바꾸었다는데, 일설에서는 일본의 요시카와 에이지의 평역 삼국지를 참고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여 이충호의 만화 삼국지를 선택했다. 황석영의 <삼국지>를 두고도 제대로 번역했네 못했네 이러쿵저러쿵 여러 말이 있기는 하나 여튼 정역본, 간단히 말해 원본에 충실하게 번역했다 주장하는 까닭이다. 일단 원전을 있는 그대로 알아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에. 


정역본을 선택하면 마주하는 문제가 바로 촉한정통론이다. 유비의 촉이 후한을 계승했다는 생각인데, 유-관-장 삼형제를 주인공으로 하는 삼국연의가 이 생각을 따르고 있다. 유관장이 의형제를 맺고 이들이 후한의 혼란 속에 세력을 다져가며 끝내는 유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는 이야기. 이것이 대충 삼국지 이야기의 얼개다. 이 얼개 속에 이들과 대척점에 있는 이들은 악역으로 소환된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조. 


삼국지를 읽는 아이들은 백이면 백, 유비를 좋아하고 조조를 싫어한다. 삼국지 초반부 최대의 빌런, 동탁과 여포를 싫어하는 것도 같은 궤. 그러나 이 순진한 관점은 여러 문제가 있다. 우선 후반부 이야기의 맥이 빠져버린다. 그렇게 한 황실의 부흥을 외치던 유비가 스스로 황제에 오르고서는 이야기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거다. 실제로 유비가 촉을 세운 뒤 이야기는 엉망진창이다. 더 이상 충의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야기가 아니게 되어버리는 까닭이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21세기 오늘날에도 충의가 필요할까? 충효忠孝라는 '국가國家'주의적 관점에 대한 비판적 관점에서 삼국지를 다르게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 면에서 삼국지의 최고 패륜아 여포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삼국지 속의 악역을 꼽으라면 여럿 있다. 어린 소제를 폐위하고 죽이기까지 했으며, 낙양을 불태운 동탁, 여백사 사건과 서주 대학살을 저지른 조조, 제갈량의 북벌을 막았으며 차후 고평릉 쿠데타를 일으켜 정적을 죽이고 모든 실권을 손에 쥔 사마의 등등. 이들과 견주어도 만만치 않은 악역으로 이름을 떨치는 인물이 바로 여포이다. 삼성가노三姓家奴라는 말이 그의 악행을 대표한다. 


"아비 성을 세 개나 가진 노비 놈아, 달아나지 마라! 연인 장비가 여기 있노라!" (송도진 역, 글항아리)
"아비를 셋이나 둔 잡놈 주제에 감히 내게 맞서려 하다니!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연나라 사람으로 황실의 후예인 유비 장군의 아우되는 사람이다!" (이충호 만화 삼국지, 문학동네)


'삼성가노'라는 호칭은 장비가 여포를 상대하면서 내뱉은 말이다. 삼국지 속에서 장비는 입이 험하고 거침없이 말을 내뱉는 것으로 유명한데, 여포를 상대하면서도 그의 장기를 발휘하고 있다. 여포는 장비와의 대결에 앞서 여러 장수를 베며 위세를 떨치고 있었다. 장비와 여포의 대결은 장비라는 삼국지 이야기 속의 손꼽히는 무장의 본격적인 등장무대이기도 하다. 


이 대결은 쉬이 결판 나지 않고 점점 여포의 우세로 기울어진다. 이때 관우가 합세하여 2:1의 싸움을 벌인다. 그럼에도 여포는 밀리지 않았는데 결국 유비까지 합세하여 3:1의 싸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른바 삼영전여포三英戰呂布, 유관장 세 영웅이 여포를 맞서 싸운 이야기이다. 이 싸움의 활약으로 유관장 삼형제는 듣보잡에서 여러 군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삼국지 이야기의 서사 가운데 여포는 이들의 등장을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거꾸로 뒤집어 보면 삼국지 이야기 속의 주인공들을 모두 한꺼번에 상대할 정도로 여포가 대단한 무장이라는 뜻이다. 결국 이는 여포 최강자설이 나오게 된 배경이 된다. 한편 여포의 무력은 이후 다른 사건에서도 반복되는데, 이번에는 조조의 무장들과 싸움을 벌인다. 허저, 전위, 하후돈, 하후연, 이전, 악진 총 6명의 장수를 한 번에 상대한다. 따라서 삼국지의 무장 가운데 누가 가장 강한가라는 최강자 놀이에 여포는 늘 상위권에 있을 수밖에. 


삼국지를 좀 더 깊이 읽는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황충 혹은 마초와 여포가 맞붙는다면? 이들은 각각 관우, 장비와 호각을 다투었던 인물이다. 단순 비교로는 이런 이야기도 가능하다. 여포 혼자 황충과 마초를 상대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뭐, 이런 상상은 끝이 없다. 여포와 접접이 없었던 인물과 여포를 겨루어 본다면? 여포의 위세가 워낙 대단하니 대부분 싱거운 결말일 텐데, 한 인물은 좀 다른 상상이 가능하다. 바로 조운과의 대결. 


만화 <화봉요원>은 이 상상을 바탕으로 초반부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러면서 생각지도 못한 설정을 덧붙였다. 여포가 단순히 무력만 강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 지략에도 능한 계략가였다는 설정은 매우 새로운 접근이다. 삼국지 속에서 여포는 꾀 없이 힘만 센 무장들 가운데 하나로 유명한 까닭이다. 압도적인 무력에 지략까지 갖춘다면 거의 모든 것을 갖춘 셈인데 그렇게 여포를 띄워주고 있다. 


삼국지는 기원후 180년~280년 사이에 벌어진 역사적 사건을 바탕으로 쓰인 이야기이다. 민중 사이에 다양한 이야기들이 떠돌던 것을 14세기 원나라 시대 나관중이 연의소설로 정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 이후에도 삼국지는 숱한 아류작을 낳았지만 여포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야박하다. 다양한 삼국지 이야기 가운데 <화봉요원> 식의 접근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것은 그에게 덧씌워진 '배신자 프레임' 때문일 테다.



장비가 이야기한 '삼성가노'라는 욕이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삼국지에서 여포는 정원의 수양아들로 등장한다. 어째서 그가 정원의 수양아들이 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동탁은 금은보화와 함께 적토마를 선물로 주어 여포를 끌어당긴다. 그 결과 이번에는 동탁을 아버지처럼 모셨다나. 하여, 본래는 여씨인데 정씨와 동씨를 아버지로 섬겼다고 장비가 그렇게 욕하는 것이다. 여, 장, 동 삼성을 가진 후레자식이라고.

이후 잘 알려져 있듯 여포는 초선을 사이에 두고 동탁과 사이가 틀어져 결국 그를 죽이고 떠돌이 신세가 된다. 이후 조조, 유비, 원술 등의 각축장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나 결국 조조와 유비의 연합군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그러나 사실 삼국지는 동지였던 자가 적이 되는 일이 숱하게 일어난 이야기이다. 배신이 일상인 시대라고 할까? 대표적으로 유비의 행적이 그렇다. 다른 인물 아래에 몸을 맡긴 적이 숱하게 있다. 조조와 원소, 유표 등에 의탁하고 있었던 행적이 이를 잘 말해준다. 그리고 조조를 제외하고 모두 좋지 않은 최후를 맞았다. 제 잇속에 따라 몸을 맡기고 마치 기생충과 같이 제 살을 키우던 것이 유비라고 말한다면 너무 지나친 평가가 될까?


사실 유비는 여포에게 몸을 의탁하기도 했다. 여포는 그를 동생처럼 아껴주었다고 하나, 유비는 조조를 도와 여포를 친다. 여포가 조조에게 목숨을 구걸할 때 여포를 죽이도록 부추긴 것도 유비였다. 


조조가 다시 문루로 올라오자 여포가 소리 질렀다. "명공의 우환거리로 나보다 더한 것이 없는데, 오늘 내가 이미 굴복했소. 공께서 대장이 되시고 내가 부장을 맡는다면 천하를 평정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오." 조조가 현덕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찌하면 좋겠소?" 현덕이 대답했다. "공께서는 정건양과 동탁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여포는 현덕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 가장 믿을 수 없는 놈이로구나!" 조조는 문루 아래로 끌어내 목매달아 죽이라 했다. 여포는 현덕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귀 큰 놈아! 원문 밖의 극을 쏘아 맞춘 일을 그새 잊었느냐?" (송도진 역 19회)


'원문 밖의 극을 쏘아 맞춘 일'이란 유비가 원술의 공격을 받았을 때 활 솜씨를 뽐내어 유비를 구해준 일을 말한다. 즉, 은혜를 모르는 놈이라는 뜻. 그 뒤 유비의 행적을 보자. 유비는 조조 아래에 몸을 맡기나 조조를 암살하려 하다 실패하고 달아난다. 이후 조조의 공격에 패하고는 조조의 적 원소에게로 달아난다. 유비는 원소를 부추겨 조조와 싸우게 하나 대패. 이후 남쪽 유표에게 몸을 맡긴다. 비록 유표는 일찍 세상을 떠나 험한 꼴을 보지 못했으나, 유표의 자식은 조조의 포로가 되어 죽임을 당한다.


유비 기생충설의 입장에서 보면, 유비는 다른 세력에 기생하여 그와 대척하는 세력과의 싸움을 부추긴다. 그 전쟁 가운데 최대한 이익을 취하고 숙주가 죽으면 또 다른 숙주를 찾아 떠나는 식. 유비가 몸을 맡긴 여러 숙주 가운데 조조가 유일하게 화를 입지 않은 상대였다는 점, 여포가 가장 효율적으로 깨뜨린 상대였다는 점은 흥미로운 지점이다. 


따라서 여포만 배신의 아이콘이 되는 것은 부당하다. 유비 역시 만만치 않은 배신의 행적을 가진 인물이기에. 차이점이 있다면 여포는 제 손에 피를 묻혔다는 점이고 유비는 결코 제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른바 정치력이 없었다는 점이 여포의 단점이겠다. 나아가 유비는 촉의 황제에까지 오른다. 결과는 과거를 새롭게 윤색하는 법. 후한의 마지막 황제, 헌제가 폐위되었으나 여전히 살아있음에도 덜컥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비를 역사는 충의의 화신으로 기억한다. 




삼국지를 다시 읽으니 후한 말 군웅할거의 시대가 마치 창업創業의 시대처럼 읽히더라. 사실 국가란 오늘날 기업과 본질적으로 같은 속성을 공유하는 것 아닌가. 황건 무리는 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한 다단계 기업, 유관장 삼형제는 상호 간의 신뢰와 집단정신에 기반한 벤처 기업, 조조는 철저한 능력 위주의 인재 선발과 창업자의 능력이 돋보이는 엘리트 기업, 손권은 지연을 중시하는 향토적 가족기업 등등. 


이 가운데 여포는 홀로 기업의 명운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초초초 엘리트라 할 수 있다. 누구나 그를 모셔가려 애태우고, 그 역시 어디에 얽매이는 것에 상관없기에 이적에 거리낌 없던 인물 아니었을까? 그러나 그를 놓친 기업은 여포 1인에게 의지한 것이 너무 커서 그가 떠나자마자 폭삭 망해버리고... 이런 과정 가운데 그에게 삼성가노라는 치욕스런 별명이 덧씌워진다. '가족 같은 기업'에 어울리지 않던 그는 홀로 창업하나 숙주 유비에게 잠식당해 결국은 망하고 만다. (실제로 유비는 여포 휘하의 인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삼국지의 촉한정통론는 유관장 삼형제의 유사 가족을 통해 대리만족을 심어주는 이야기이다. 한나라의 창업자 유방은 죽으면서 유씨만 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그의 말은 망령이 되어 수백 년 뒤에도 유비라는 촌뜨기를 끌어들이고 있다. 유씨라는 것 이외에 별로 가진 것이 없는 그는, 정말로 가족과 같은 무리를 이끌고 황제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가족 같은 기업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삼국지의 숱한 인물이 결국 사마씨 가족에 의해 먹히는 것은 먼 훗날의 이야기.


가족 같은 기업이나 회사의 망령은 오늘날에도 반복된다. 그러나 그 가족이란 이런저런 상상이 가능한 공동체는 아니다. '내가 너를 자식처럼 대했는데!'라는 원망은 있어도, '내가 당신을 부모처럼 대했는데!'라는 원망이 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삼성가노, 성이 세 개인 후레자식이라는 여포는 아비처럼 살뜰히 챙겨준다는 이조차 당당히 내칠 수 있는 정신의 화신은 아니었을까? 여포의 행적이 새롭게 읽히는 것은 이런 까닭이다. 오늘날에도 그 같은 기린아여야만 이 험한 세상에 제 이익을 챙기면서라도 살 수 있을 테니. 


삼국지 이야기로 돌아오면, 촉한정통론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은 그런 창업 서사가 가진 고유의 매력 때문이겠다. 하여, 촉한정통론에서 벗어나더라도 쉬이 빠지는 것이 조조와 같은 새로운 영웅상을 그리는 길이다. 이문열의 삼국지, 요시카와 에이지의 삼국지 같은 부류가 그렇다. 이는 자칫 군국주의적 경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조금 다른 접근은 불가능할까?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는 다른 접근의 가능성을 탐구한 작품이었다. 사마의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삼국지를 전혀 새롭게 조망한다는 면에서 매우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보신保身과 수성守城을 통해 새로운 인물형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포와 같은 쌈마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새롭게 삼국지를 비틀어댈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여포가 북방 이민족 출신이라 천대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 상상도 흥미롭다. 어쨌든 그의 눈을 통해 보는 삼국지 세계는 전혀 다른 부조리로 가득찬 세상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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