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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픈옹달 Jul 21. 2022

<논어>, 해쳐 모여!

명문줍줍 - 새로운 고전 읽기

독서를 여행에 비유하곤 합니다. 어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는 것과 같은 짜릿함을 선물해주곤 합니다. 그래서 독서를 위한 독서가 도움이 되곤 합니다. 이른바 가이드가 되는 책이 유용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책에는 지형과 지층이 있어서 처음 무작정 마주치면 어리둥절 헤매거든요. 그러니 가이드를 따라 가장 최적의 경로에 가장 최적의 관광-독서를 하는 것이 경제적입니다. 물론 폐해도 있습니다. 모두가 가는 곳을 가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곤 합니다. 천편일률적인 똑같은 해석.


<논어>는 매우 어지러운 책입니다. 약 500여 문장이 맥락 없이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총 20편으로 나누는데 왜 이렇게 나누었는지 <논어>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순서대로 나눈 것인지, 아니면 주제별로 나눈 것인지, 혹은 이 책을 편집한 공동편집자들이 나름의 관점에 따라 제각기 엮은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지형을 읽기 매우 힘든 책이라고 할까요. 처음 손에 쥐면 아무런 서사가 없는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고민입니다.


그러나 한번 빠져들면 꽤 매력적인 책입니다. 공자왈 맹자왈 하는 식으로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가득한, 두툼히 먼지가 쌓인, 낡은 책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나름 꼰대 정신의 보고, 씹선비의 경전으로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찌 하나의 길만 있을까요. 공자님 공자님 꼰대 공자님이 있다면, 그와는 영 다른 공자의 색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어찌나 빛나는 문장이 많은지. 툭툭 던지는 <논어>의 말에 귀 기울이다 보면, 푹푹 가슴을 찌르는 문장들을 만납니다.


<논어>는 누가 언제 엮었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공자의 글이라 생각하지만, 공자의 말을 채집한 이 책의 형식은 거꾸로 공자가 저자가 아님을 이야기합니다. 게다가 공자 제자들의 이야기까지 함께 실려 있어요. 굳이 화자를 저자라 한다면 공자와 제자의 공동저작물이라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명확히 한다면 화자는 있되 저자는 없는, 저자가 비어있는 책이라 해야 합니다. 누군가의 손에 옮겨 적힌 말들로 <논어>가 엮였으니까요.


기록자는 누구일까. 공자의 제자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논어>에는 공자 제자의 제자도 등장하는 바, 공자를 직접 보고 만난 제자의 손에 <논어>가 엮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공자의 후예로 손꼽히는 맹자와 순자의 글에도 '논어'라는 제목이 등장하는 않는 점, <논어>의 문장과는 좀 다른 공자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논어'라는 제목으로 완성된 것은 꽤 후대의 일일 수 있습니다. 


게다가 하필 제목을 '논어'라고 붙였을까. <맹자>와 <순자>가 있고 <장자>와 <노자>가 있는 것처럼 <공자>라는 제목이었다면 또 하나의 질문을 더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과연 '논어'란 무슨 뜻일까. 그러나 여전히 <논어>는 침묵합니다. 어수선함과 침묵, 이 극단의 부조화 속에 <논어>를 읽는 길은 갈팡질팡 우왕좌왕 헤맬 수밖에요.


주석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빼어난 주석가들은 <논어> 본문보다 더 많은 분량의 주석을 붙여 그 의미를 더 풍성히 만들었습니다. 따라서 주석가는 해석자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편집자이기도 했는데, 최초의 <논어> 주석으로 남아있는 하안의 <논어집해>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가 읽는 <논어>의 모습으로 정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논어>는? 노나라 버전, 제나라 버전, 공 씨 버전 등등이 있었답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 손에 쥐어진 <논어>는 한 권의 책이지만 <논어>가 이 꼴을 갖추기까지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쳤습니다. 복수의 화자와, 복수의 기록자, 복수의 편집-해석-주석가의 손을 거쳐 <논어>의 지층과 지형은 더욱 복잡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길은 이 역사가 빚어낸 길을 따라 읽어내는 것입니다. 주희의 <논어집주>를 읽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 해석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영 다른 길도 있을 수 있습니다. 지형과 지층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 그것은 단순히 새로운 해석을 하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새로운 주석과 새로운 편집으로 <논어>의 지형과 지층을 새롭게 구성해본다면 어떨까요. 텍스트의 재구성. 500여 문장을 다르게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논어>의 다른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논어>야 말로 이런 실험적 읽기에 가장 적합한 텍스트 일지 모릅니다. 제목 그대로 '말[語]에 대한 토론[論]'이란 정답 없이 자유롭게 펼쳐져야 하는 것일 테니까요.


<논어>를 읽되, 읽기에 그치지 않고 재해석과 재구성의 작업을 함께 진행하려 합니다. '논어' 정신에 걸맞게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해야겠지요. 이에 '명문줍줍'이라는 이름을 붙여보았습니다. <논어> 속 명문장을 솎아내고 엮어보는 과정에 참여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네, 이 글은 명문줍줍을 위한 긴 홍보글이었습니다. 함께 외쳐봅시다. <논어>! 해쳐 모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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