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픈옹달 Nov 23. 2022

아니 없어요 그냥

덕자득야 : <한국문학의 구조>


지난 대선 과정에서 여러 촌극이 벌어졌지만. 최진석 선생이 안철수 후보의 선대위원장이 된 사건은 꽤 충격이었다. 어떤 바닥을 보는 경험이라고 해야 할까. 그가 보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예전부터 익히 알고 있었다. (사실 다른 인문학과 달리 동양학 주변에서 진보적 인사를 찾기는 힘들다.) 그러나 선대위원장이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사건이었다. 언론은 '삼고초려'라는 표현을 쓰며 대대적으로 홍보했다. 과연 그것이 어떤 정치적인 공과를 남겼는지는 모르겠다. 도리어 중국철학이 어떤 식으로 소비될 수 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단적인 사건으로 기억한다.


사람들은 인문학에 어떤 환상을 가지고 있다. 인문학을 하면 삶이 성숙해지고, 행복해진다는 식의. 중국철학에 대해서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어떤 지혜가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이럴 때 쓸데없이 툭툭 튀어나오는 것이 '문명'이라는 표현이다. 최진석은 '문명'을 운운하며 선진국 문명을 창조할 길을 이야기하곤 했다. 그는 문명 담론에서 현실정치로 내려왔다고 혹은 뛰어들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쓴 감투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중국철학이라는 전문 영역은 날아가고 숭고한 꼰대질만 남았다. 학문이 정치권력에 봉사하는 일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도가 지나치다는 생각이었다. 노장철학의 '대가'가 21세기 한국 정치판, 특히 대선 과정 가운데 무슨 일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홍익 이념으로 대통령의 멘토를 자처하는 것이나 본질상 얼마나 다른 일일까.


철학, 혹은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탐구라 한들 철학 공부가 바로 지혜로운 삶으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미식가라고 훌륭한 요리사가 되는 게 아닌 것과 마찬가지. 게다가 오늘날 근대 학문으로 철학은 분과적 전문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철학도 하나의 전문 지식이며, 따라서 그 전문성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설사 학제를 넘나들며 정치, 경제, 문화 영역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제한적인 수준에 불과하다. 노장 텍스트의 전문가가 정치에 대해, 그것도 현실정치의 날 선 칼날 위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칼춤을 추겠다고 덤비다가 발을 베이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조형일의 <한국 문학의 구조>를 읽으며 내내 인문학에 대해 생각했다. 조형일은 도입부부터 '한국에는 근대문학이 존재하지 않는다'(9쪽)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는다. 아쉽게도 책을 읽는 내내 이에 대한 세세한 논의를 좇아갈 수는 없었다. 다만 한국 문학이 구조적으로 얼마나 허약한지 알 수 있었다. 이 책에는 세 편의 글이 실려있는데 책 제목과 같은 <한국 문학의 구조>에서는 세계문학 만들기를 통해 한국 문학을 자리매김하려는 노력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한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 한강의 <채식주의자>,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을 거론하며 이 책의 유행 원인이 문학 바깥의 있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작품에 대한 문학적인 평가, 독자들의 자발적인 사랑과 무관하게 띄워진 작품이라는 뜻.


특히 저자는 한국문학을 세계문학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비판적으로 본다. '본고장의 인정'(34쪽)을 받고 싶어 하는 욕망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이 '일종의 수직관계'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나의 인정 욕구이기도 하지만 나아가 세계문학론을 통한 내수시장 개척의 일환이다. 그렇게 외적인 동력으로 내수시장이 성장하는 것이 문학판에 도움이 될까? 저자의 시선은 냉랭하다. 나아가 예술, 문학에 대한 '국가의 개입'(37쪽)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다는 점을 꼬집는다. 한국문학번역원을 통한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요청은 결국 문학이 국가의 보호 아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문학 본유의 가치,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 가치가 국가, 통치, 정치에 종속되어 버린다는 서글픈 현실. 국가의 종속된 문학에 대한 비판은 국가의 지원 사업으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는 인문학의 현실을 떠올리게 했다.


한편 다음과 같은 주장도 여러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예컨대 제국주의를 경험한 국가의 문학들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국가의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문학이나 소수자문학, 디아스포라문학 같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한국에는 그와 같은 것이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미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과 부대끼며 사는 국가이지만, 놀랍게도 문학 만큼은 모두 한국인이 한국어로 쓴 문학입니다."(72쪽)


이어지는 <실험으로서의 비평>은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에 대한 이야기다. 저자의 이야기를 간단히 옮기면 가라타니 고진이 말한 '근대문학의 종언'이란 '문학이 매우 커다란 의미를 가졌던 시대가 예전에 있었다'(118쪽)는 회고적 발견, 나아가 '그때까지 부여되어온 과잉된 의미를 잃은 것'(139쪽)이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해 문학에 부여되었던 '무거운 짐'(123쪽)을 내려놓게 되었다는 것. 저자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유행에 주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90년대의 가벼워진 문학의 위치를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다. 


하긴 유튜브 범람 시대에 하루키고 문학이고 모두 낡은 것에 불과하다. 문학이 사라지는 날은 없겠지만 문학이 예전과 같은 역할을 하는 날이 올까? '모두가 의무적으로 배워야 하는 문학, 입시에 필요한 문학, 제도로서 보호되어야 하는 문학의 역사는 기껏해야 백 년을 조금 넘겼을 뿐입니다.(119쪽)'라는 저자의 주장을 곱씹으면 입시가 사라지고, 국가의 보호가 사라진 뒤에 문학은 어디쯤 있을까 의문이 든다. 이어지는 <재론>에서는 문학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한 까닭을 문사文士 전통, 그러니까 문인이 지배 계급이었던 역사에서 찾는다. 문도론文道論, 그러니까 글은 '도道'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식의 양반 의식의 근대적 전환(?)이 문학에 대한 과도한 의미 부여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저자는 국가에 기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한국 문학의 현주소를 꼬집으며, 문학의 사회적 책무 따위 역시 과잉된 것이라 비판한다. 하긴 과거에는 문학을 통해 사회적 문제를 학습하던 시기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학생들에게 <광장>을 읽히면서도 이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다. 현대 문학이라기엔 문체가 낡았고, 소설이 다루는 분단국가의 현실은 낡은 문제가 되었다. 물론 누군가는 여전히 중요한 사회적 문제라 하겠지만.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은 어떨까? 과연 이 책이 달라진 시대에서도 중요한 문학 작품으로 위치할 수 있을까? 한 명의 독자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밥벌이하는 인문노동자로서 냉소적이다.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에 다만 고개를 끄덕끄덕. 


이 책을 읽으며 내내 '인문학의 죽음'에 대한 논의가 떠올랐다. 십 수년 전에 인문학의 죽음이 언론에 회자되었다.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인문학은 여전히 의미가 있다는 주장도 있고, 인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대학의 위기라는 비판도 있었다. 오늘날 여전히 책을 읽고, 공부를 하는 입장에서 모든 주장에 시큰둥하다. 인문학의 죽음 역시 과잉된 의미가 사라졌다는 뜻으로 이해하자. 철학이 전위적 학문으로 스스로를 내세우던 시기가 있다. 중국철학은 본디 관료의 학문 아니었던가. 그러나 오늘날 철학이 다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중국철학을 한다고 정치인의 멘토가 되는 것도 웃긴 일이며, 새로운 문명의 길을 탐구할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은 더더욱 헛소리에 불과하다. 철학이 건강한 사회적 담론을 만들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미래학문으로서 철학은 나에게 까마득히 멀다. 게다가 중국철학이란 내내 과거로 고개를 돌리고 옛날 글을 들추는 일이니.


고전 연구자로, 철학 전공자로 스스로를 소개하는 것은 하나의 전문가로 나를 대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거기에는 떳떳하지 못함도 있다. 이른바 학위로 나를 내세울 수 없는 까닭이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학위를 할 생각도 없으며, 학계에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다. 문제는 외로울 뿐이다. 내가 제대로 읽고 있는지, 내가 헛소리를 지껄이지는 않은지 걱정될 뿐. 인문노동자로서 내 글과 내 강의가 별 밥벌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울함에 이르기도 한다. 밥벌이에 대한 유혹이 더욱 커지면 제도권 학계에 발을 디딜까. 앞으로의 일은 모를 일이다. 여튼 분명한 것은 연구자로서 대학이라는 제도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는 점. 이것이 내 비극의 씨앗이다.


결국 인문노동자로서 이전과는 다른 생산, 유통, 소비의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쓸쓸하고 고독한 길이다. 그래도 정직한 길이 여기가 아닐까 싶다. 사람들의 기대를 배신하면서 다른 길을 만드는 것이 내가 배운 배움의 길이다. '아니 없어요 그냥', 인문학에 큰 의미 따위는 없다고, 본래 없었고, 나에게도 없고, 앞으로도 없다고. 설사 뭔가를 찾더라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시작하는 수밖에. 그래도 한 줌의 예외를 기대하며, 또 뚜벅뚜벅. 


"흔히 이동은 젊음의 특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가라타니를 보면 진정한 이동은 노년에야 비로소 가능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최근 젊은 비평가들을 보면 이동보다 안주를 선택하는 것 같습니다. 이동처럼 보이는 것도 막상 살펴보면 시대적 흐름을 추종하는 것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독립된 개인이기를 포기하고 고독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뭔가 새로운 것을 기대하는 것만큼 부질없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언젠가 이런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증명할 젊은 비평이 등장할 것이라는 믿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210쪽)




http://aladin.kr/p/jzJn8


작가의 이전글 착즙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