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자득야 : <알페스 x 퀴어>
어린 시절 나는 눈물이 많은 편이었다. 아버지는 우는 아들을 다그치며 '남자가 울면 안 된다' 혼냈다. 몇 살 때였을까. 나는 울음이 많아 남자가 못되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그와 비슷한 몇몇의 경험이 있다. 큰 병치레로 몸이 약한 편이어서 힘센 남성을 동경했으나 동경에 그칠 뿐이었다. 청소년기에 말수가 많았던 나는 여전히 사내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게다가 군대까지 가지 않았다. 그렇게 결여된 남성성으로 중년 한남이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는 것은 <알페스 x 퀴어>에 대해 몇 글자라도 남기기 위함이다. 이 책은 팬픽으로 퀴어를 배웠다는 저자가 알페스와 퀴어, 페미니즘 논쟁, 레즈비언의 정상성 등을 다룬다. 얼마간의 호기심과 얼마간의 의무감으로 책을 완독했다. 물론 중간에 어질어질 한 부분이 종종있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분도 있고.
고전 연구자로서, 중년 남성으로 이 책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어쨌든 하나의 입구를 찾아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내 이야기를 하는 수밖에. 알페스 논쟁이 커뮤니티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 때에도, 이 책을 다 읽은 지금도 팬픽에 손을 뻗을 생각은 없다. 저자는 "팬픽은 어떤 대상, 어떤 아이돌 멤버를 종이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일종의 '인형놀이'이자 '떡밥놀이' '서사놀이'"(42)라고 정의한다. 아무래도 인형놀이에 관심이 없는 탓이겠지. 하긴 어려서부터 나는 인형을 하나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돌에 눈을 돌려보기도 한다. 스스로 입덕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는 것. 헌데 잘 안 되더라. 노래를 들어도 흥이 나지 않고, 무대를 보아도 탄성이 나오지 않는다. '취존'이라 하면 간단한 일이겠지만, 그 사이에 무엇이 있을까 질문을 던져보고 있다.
아이돌에 관심을 둔 것은 주위의 청소년들이 대부분 아이돌에 입덕 한 까닭이다. 상대를 이해하려는 나름의 성실한 노력이라 하자. 게다가 K팝이나 K컬처니 하는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있지 않나. 자국 문화에 관심을 가져야지, 암. 그러나 시끌벅적한데 함께 즐길 수 없다. 흥이 나지 않고 잘 모르겠다. 사람이 낡아서 그런지, 아니면 취향이 달라서 그런지. 아니면 어떤 관습적 사유에 얽매여 있는지 되물어 보는 것이다.
저자는 <알페스 x 퀴어>에서 팬픽과 알페스를 통해 비남성 서사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특히 저자가 경계하는 것은 정상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 다양한 매체 속에서 저자가 얼마나 분투했는지. 이른바 레디컬 페미니즘에서 이야기하는 비판, BL물과 팬픽 등이 여성 당사자성을 빼앗는다는 주장에 대해 질렸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레즈비언의 정상성도 마찬가지다. 펨과 부치라는 구분에서 생산되는 레즈비언의 정상성에 저자는 의문을 던진다. 당사자성과 정상성을 넘어 저자는 '퀴어'로서 횡단을 꿈꾼다.
저자의 글이 과연 얼마나 꼼꼼한 논의인지, 저자가 주장하는 퀴어가 무엇인지, 횡단이 가능한지 등등에 대해서도 나는 잘 모르겠다. 다만 '말해지지 않았던 욕망들'이라는 2부의 제목이 좋았다. 이러한 문제를 다루기 어려운 것은, 너무 빨리 판갈이가 되기 때문도 아니고 젠더나 페미니즘 혹은 퀴어에 대한 이해의 부족 때문도 아니라 욕망을 다루는 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질문해 보는 까닭이다. 내가 내 욕망을 다루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타자의 욕망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하여 끊임없이 들었던 질문은 나는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가. 어떤 욕망을 어떤 식으로 실현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었다. 금지당한 욕망, 거세당한 욕망 위에서는 저자의 논의를 도무지 따라가지 못하겠지.
한 모임에서 중년 남성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정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며, 감정을 표현하는 자리도 없다고. 어쩌면 그것은 '락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을 이야기한 공자님 때문이 아닐까. 누군가는 페미니즘 리부트를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儒敎Girl을 이야기한다. 시끄러운 논의 가운데서도 욕망을 다루는 지혜로운 방법을 찾지는 못한 것 같다. 종종 하는 이야기이지만, 점점 싸가지없는 이들이 많다고 혀를 끌끌 차는 것은 옳지 않다. 싸가지없는 이들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두들 머리에 피가 마른, 예의바른 반반한 얼굴들이다. 하여 욕망을 다루는 말들은 여전히 소중하다.
저자는 아이돌에 대한 탐구, 예전 같으면 '누구를 판다'고 했을 것을 '착즙'이라 표현한다. "'착즙'이라는 단어는 2018년경부터 쓰이기 시작했는데, 과일에서 주스를 착즙하듯 아이돌의 어떠한 매력을 끈질기게 찾아내 소비하고마는 행위를 '착즙한다'라고 표현하곤 한다.(114쪽)"이런 착즙은 욕망의 실현과 발굴을 위한 치열한 분투는 아닐까. 물론 착즙은 그 자체로 짜릿한 쾌감과 만족감을 선물해 주리라.
"그들에 대한 열광은 레즈비어니즘이었을까? 아니면 소년애였을까? 이것은 때때로 분간하기가 어렵다. 어쩌면 레즈비어니즘으로 인해 소년애적 감정이 솟아난 것일 수도 있고, 소년애적 감정 때문에 레즈비어니즘을 하게 된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욕망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그 근원을 깨끗하게 찾아내 분별하기는 참 어려운 것이다."(147쪽)
저자가 이야기하듯 욕망의 근원을 깨끗이 찾아내기는 힘들다. 욕망이란 그 스스로 생동하며, 때로는 전염되고, 때로는 스스로를 배신하는 까닭에. 그래도 착즙하는 이들은 그 욕망의 정체를 조금은 선명히 대하리라. 하여 착즙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사랑이 저희 것이리라.